하나님의 진노와 섭리
“인간의 눈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추상적이고 초현실적인 것은 없다. 물론 물질은 존재하나 자체의 고유한 의미는 없다. 우리는 오직 컵은 컵이며 나무는 나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조르지오 모란디)
늘 정작 모른다. 실상 듣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로 지목하고 해결책을 주려 하는 것을, 은사로 사명으로 오해하고 있다. 당신들이 원인이라고, 더 큰 그림을 이야기할 수 없는 심연의 답답함. 선뜻 권하지 못함, 이것이 급소다. 왜, 그러한지 그들만 모른다. 되려 장애물이 되었다는, 애처로운 진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개혁은 늘 내면의 각성이다.
“진보의 집권 전략을 위해 강준만이 헌책했다는 <싸가지 없는 진보>의 조야한 성격을 더욱 또렷하게 해준다. 흔히 그의 ‘싸가지론’은 진보 진영의 도덕적 우월의식·선악 이분법·선명성 경쟁을 비판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무기력하고 허울뿐인 인민은 죽게 내버려두라고 채근한다. 싸가지론의 중심에는 ‘중산층 표심’이 자리 잡고 있는바, 이 전략은 자본주의 과두정의 조력자인 중산층만 갖고도 얼마든지 선거라는 게임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중산층의 입맛에 맞춘 의제와 정책만으로도 선거에서 이길 수 있고 정치가 굴러갈 수 있다면 잡다한 인민 따위는 배제되어도 좋다. 바로 이런 주장이 도덕적 우월의식·선악 이분법·선명성 경쟁을 내팽개치라는 주문으로 나타난 것이다.”
_ 장정일, 2014. 12. 16.
“미국 헌법에 있어서도 인민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시민과는 구별되고 있다.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인민을 의미하므로, 국가 우월의 냄새를 풍기어 국가라 할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사람을 표현하기에는 반드시 적절하지 못하다. 결국 우리는 좋은 단어 하나를 공산주의자에게 빼앗긴 셈이다.”(유진오)
“말들은 저마다 자기의 풍경을 갖고 있다. … 말들의 풍경이 자주 변하는 것은 그 풍경 자체에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가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풍경을 보는 사람의 마음이 자꾸 변하기 때문이다. 풍경은 그것 자체가 마치 기름물감의 계속적인 덧칠처럼 사람들이 부여하는 의미로 덧칠되며, 그 풍경을 바라다보는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마치 빛의 움직임에 따라 물의 색깔이 변하듯 변한다. 풍경은 수직적인 의미의 중첩이며, 수평적인 의미의 이동이다. 그 중첩과 이동을 낳는 것은 사람의 욕망이다. 욕망은 언제나 왜곡되게 자신을 표현하며, 그 왜곡을 낳는 것은 억압된 충동이다. … 욕망은 교활하게 자신을 숨긴다. 욕망은 개인의 탈을 쓰고 나타나, 자기의 흉포성을 개인적 외상으로 바꿔치기 한다. 말들의 풍경은 그런 욕망의 노회한 전략의 소산이다. 그것을 제대로 읽으려면, 우리는 거꾸로 들어가야 한다. 개인적 외상을 따지고, 거기에서 개인성의 특징을 찾아, 그 개인성을 만든 노회한 욕망을 밝혀내야 한다.”
_ 김현, ‘말들의 풍경’을 시작하며,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