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 갈렌(Sankt Gallen) 수도원 부속 도서관, 영혼의 약국
상트 갈렌(Sankt Gallen) 수도원 부속 도서관, 영혼의 약국
그런데 심도와 지평이 자라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황현산 선생보다 잘 표현할 힘이 없어 <밤은 선생이다> 한 대목을 옮겨 적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_ 황현산, <밤은 선생이다>, 난다, 2013, 12쪽.
“소설의 본질과 미래에 대해 세상이 어떤 갑론을박을 하건, 어떤 빛나는 재능의 소유자들은 그냥 조용히 좋은 소설들을 써낸다.”(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을 읽고, 신형철)
몇 해 전 봄이었다. 무작정 남쪽으로 떠나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긴 겨울이 끝났다는 기쁜 마음이 있었고 오래 다니던 직장을 막 그만두었던 시기라 허허로우면서도 막막한 마음도 얼마쯤 있었다.
새벽, 차를 몰로 고속도로에 올랐다. 대전 지나 함양쯤 갔을까. 환기를 시키려 창을 열었는데, 내가 떠나온 서을과는 공기부터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분 탓인지 아니면 온도나 습도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야 알 길이 없었지만 봄 냄새가 분명하면서도 선연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햅쌀을 불려놓은 물처럼 구수하고, 땀 흘리며 자고 있는 아이의 이마 냄새처럼 새큼하면서도, 오래 묵은 양주를 처음 열었을 때처럼 퍼지는 알싸함. 물론 이런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만약 내가 조향사라면 봄 냄새를 닮은 향수를 만들어낼 것이다.
오전, 남해의 한 마을에 도착한 나는 바다의 푸른빛과 하늘의 푸른빛을 번갈아가며 눈에 담아두었다. 한참을 지나서야 허기를 느꼈는데 아쉽게도 근처에 아침을 먹을 만한 밥집은 하나도 없었다. ‘봄도다리’나 ‘도미’같은 제철 횟감을 큰 글씨로 써서 붙여둔 횟집들만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오전부터 문을 연 곳은 없었고 설사 문이 열려 있다고 해도 혼자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차로 얼마간을 더 가면 멸치쌈밥으로 유명한 집이 있었다. 양념장과 함께 오래 졸인 생멸치를 여러 쌈 채소에 싸먹는 음식. 나도 두어 번 먹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멸치가 이렇게 크고 맛있는 생선이었구나 하고 놀라곤 했다. 문제는 그 집 역시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시간이었고 게다가 1인분은 팔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생각해낸 것이 학교 근처로 가보자는 것이었다. 학교 근처에는 늘 분식집이 있고 그런 분식집이라면 간혹 아침부터 장사를 시작하는 곳도 있으니 말이다. 나의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아도 학교 근처 분식집에는 아침을 거르고 집에서 나온 아이들이 깁밥이며 라면을 사 먹는 경우가 많았다. 내비게이션으로 가장 가까운 학교를 찾아갔다. 한 여자중학교였고 학교 근처에는 내 생각처럼 분식집이 하나 있었다.
나무 미닫이문을 열고 분식집에 들어갔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중년의 남자와 몸이 불편해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지금 식사를 할 수 있을까요” 하고 물었더니 둘은 동시에 “네” 하고 대답했다. 남자는 단호한 말투였고 여자는 어눌한 말투였다. 나는 메뉴판을 오래 보다가 김치찌개를 하나 시켰다.
여자는 뇌졸중 후유증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몸의 절반은 봄 같았고 남은 절반은 겨울 같았다. 더듬거리는 말로 남자에게 이것저것을 말했고 남자는 그녀의 말을 곧잘 따랐다. 내 테이블에서는 건너편 주방이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남자는 여자가 시키는 대로 뚝배기를 올리고 육수를 붓고 돼지고기와 김치를 넣었다.
그때 다툼이 시작되었다. 조미료를 넣지 말라는 여자의 말과 조미료를 넣지 않으면 맛이 안 난다는 남자의 의견이 팽팽하게 엇갈렸다. 둘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힐끔힐끔 주방을 보던 나는 무안한 마음에 분식집 벽면에 가득 적혀 있는 학생들의 낙서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돌 멤버 이름 뒤에 하트를 그려넣은 것이나 친한 친구들의 이름을 적어두고 사랑한다거나 영원하자는 말을 덧붙인 낙서가 대부분이었다. 장난스러운 말투로 ‘애인 구함’이라 적은 낙서 같은 것도 있었다.
그사이 김치찌개가 나왔다.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첫술을 떠보았는데 놀랄 만큼 맛이 좋았다. 조미료 맛이 나지 않은 것을 보면 결국 남자는 여자의 말을 들은 것 같았다. 한참 밥을 먹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내가 찌개를 어떻게 먹고 있는지 궁금한 듯 이번에는 그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는 것에 열중했다. 단숨에 뚝배기를 비웠다. 그 모습을 보고 그제야 그들도 안심하는 눈치였다. 나는 휴지로 입을 닦으며 아이들의 낙서로 가득한 벽면에 ‘봄날에는 사람의 눈빛이 제철’이라고 작게 적어두고 그곳을 나왔다.
_ 박준, “알맞은 시절”,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난다, 2017.
“사람의 키는 아무 때나 자라지 않는다. … 어휘력도 마찬가지이다. … 어휘력이 폭발적으로 느는 시기가 있다. 바로 초등학교 시절이다. 캐나다의 언어학자 펜필드Wilder Penfield는 ‘결정적 시기 이론Critical Period Theory’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동기는 생애 중에서 어휘 습득이 가장 왕성한 시기이다. 이때 습득한 어휘는 성인이 되어 원활한 독서와 청취는 물론이고, 생각과 의사를 글로 쓰고 말로 표현하는데 사용된다. 아동기 이후 어휘 습득은 생물학적 제약을 받아 둔화된다. 따라서 어휘량이 풍부하고 좋은 어휘를 사용하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는 아동기 독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펜필드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줄 만한 자료로는 일본의 교육 심리학자 사카모토 이치로阪本一郞의 ‘아동 및 청년의 어휘량 발달표’를 참고할 만하다. 이 표에 의하면 태어나면서부터 7세까지 어휘량의 증가 속도는 한 해에 500단어 내외 정도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시기인 8세부터 증가 속도가 확연히 달라진다. 10세 전후로 매해 5,000단어 정도씩 증가한다, 습득 어휘가 급속도로 증가하는, 이른바 어휘 폭발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1년에 5,000단어를 습득하려면 하루에 15단어 정도를 습득해야 한다는 산술적인 계산이 나온다. 실로 엄청난 양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머릿속에 저장된 어휘만큼만 이해하고 생각하며, 이해하고 생각한 만큼만 느낄 수 있다. ‘어휘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이렇듯 중요한 어휘량은 초등학교 시절에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초등학교 1학년은 그 폭발의 시작점이다.”
“미숙한 시인들은 모방한다. 완숙한 시인들은 훔친다. 나쁜 시인들은 훔쳐 온 것을 흉하게 만들고 좋은 시인들은 더 낫게 만든다. 더 낫지 않다 하더라도 적어도 훔쳐 온 것과 다르게는 만든다.”(T. S. 엘리엇)
저도 끝이고 겨울도 끝이다 싶어
무작정 남해로 간 적이 있었는데요
거기는 벌써 봄이 와서
농어도 숭어도 꽃게도 제철이었습니다
혼자 회를 먹을 수는 없고
저는 밥집을 찾다
근처 여고 앞 분식집에 들어갔습니다
몸의 왼편은 겨울 같고
몸의 오른편은 봄 같던 아픈 여자와
늙은 남자가 빈 테이블을 지키고 있는 집
메뉴를 한참 보다가
김치찌개를 시킵니다
여자는 냄비에 물을 올리는 남자를 하나하나 지켜보고
저도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그들을 봅니다
남자는 돼지비계며 김치며 양파를 썰어넣다 말고
여자와 말다툼을 합니다
조미료를 그만 넣으라는 여자의 말과
더 넣어야지 맛이 난다는 남자의 말이 끓어넘칩니다
몇 번을 더 버티다
성화에 못 이긴 남자는
조미료 통을 닫았고요
금세 뚝배기를 비웁니다
저를 계속 보아오던 두 사람도
그제야 안심하는 눈빛입니다
휴지로 입을 닦다 말고는
아이들이 보고 싶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잔뜩 낙서해놓은 분식집 벽면에
봄날에는
‘사람의 눈빛이 제철’이라고
조그맣게 적어놓았습니다
_ 박준, “낙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속에 슬퍼지더라 /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_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 백설희 가창 “봄날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