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December 12th, 2017

December 12, 2017: 11:17 pm: bluemosesErudition

: 8:52 pm: bluemosesErudition

“제 시가 외국에서 인정받는 것은 명료하고 논리적이고 분명한 것을 표현하려 했기 때문일 겁니다. 정확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문정희 시인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를 전재한다. 1996년, 그러나까 그가 49세에 발표한 시다.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 한계령쯤을 넘다가 /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 오오, 눈부신 고립 /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 1:45 am: bluemosesErudition

83. 우리나라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잘 듣지 않는 것이 문제로 인식되고 공론화된 것은 1999년이다. 당시 이 현상을 최초로 공론화하였던 전교조 참교육실천위원회는 “학교 붕괴 현상”이란 개념을 제시하면서 “학급에서 수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학생에 대한 교사의 생활지도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 상황과 이러한 결과에서 나타나는 학교교육의 본질적인 기능이 약화되는 현상”이라고 정의하였다.

85~86. 그런데 왜 1999년일까? 1997년에 IMF 외환위기가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은가? 둘 사이에 모종의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 것은 양자가 단지 시각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생겨나는 착시 효과일까? (중략) 대체로 IMF를 전후하여 이런 기제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이후의 중등학교 학생 문화에 대한 연구물들을 보면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들은 학생 문화의 중심부에서 밀려났다. 대신에 운동을 잘하거나 대중문화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지니고 있거나 끼 있는 아이들이 더 부각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중ㆍ고등학교의 그 살인적인 공부를 견뎌 내게 했던,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으로 공부의 결과가 연결되는 보상의 사다리도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 누군가 열심히 노력해서 세칭 좋은 대학을 나온다고 하더라도 장래를 보장받기가 과거에 비해서 어려워지고 있다. IMF 이후 급속하게 전개된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의 재편은 전통적인 학업과 취업의 파이프라인이 지니는 유용성을 상당한 정도로 소진시켰다.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자동적으로 무엇이 보장되는 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다. 이제 웬만한 사람들은 그 사실을 간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들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촉각으로 감지한다. 그러니 내일의 성공을 위해 오늘의 유혹을 참으라는 마시멜로 이야기로 학생들을 설득시키는 전략은 낡은 수사가 되어 가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학생인권조례와 같은 제도적 장치와 인권 의식의 신장으로 교사들은 수업을 듣지 않고 반항하는 학생들을 제어할 수 있는 손쉬운 수단마저 상실하게 되었다. 공포로 유지하는 교실의 질서와 평화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니 수업 상황이 온전하겠는가?

88. “교육의 역설은 당사자가 교육이 제공하는 이익을 교육이 어느 정도 진행될 때까지, 경우에 따라서는 교육과정이 끝날 때까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중략) 그런데 시장경제질서 하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이런 교육의 역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우치다의 주장이다. 그는 요즘 아이들은 교육받는 내용이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 물어보고 교사가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않으면 교육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치다는 아이들의 이런 태도를 시장경제제도의 소비 행위와 연관시켜 설명한다. 삼십 년 전의 아이들과 비교할 때 요즘 아이들은 생산 주체가 아니라 소비 주체로서 사회적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89. “우리들이 어렸을 때 사회적 활동은 먼저 노동 주체로서 자기를 세우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사회적으로 무능력한 어린아이가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해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가사노동이었다. … 아이들이 가족이라는 최초의 사회관계 속에서 처음으로 유용한 구성원으로 인지되기 시작하는 것은 가사노동을 분담하면서부터이다. (중략) 우리 세대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사회적 활동이 노동이 아니고 소비였던, 그러니까 가사 일을 돕는 경험보다 먼저 돈을 쓴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 거의 없었다. 반대로 지금 아이들의 거의 절반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사회 경험이 물건 사기였을 것이다. 이 첫 경험의 차이는 대단히 결정적인 것이다.”(우치다 타츠루 <하류지향>)

90~91. 우치다는 소비 주체가 물건에 대한 정보를 다 알고 등가교환을 시도하는 시장 원리에 기초해서는 배움이 일어나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배움은 ‘교육의 역설’에서 보듯이 배우고 나서야 그 의미나 의의를 측정할 수 있는 역동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는 학생들이 일종의 소비 주체로서 배움을 흥정하는 과정에 참여하며 자신의 낮은 안목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배움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겠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양태가 나타난다고 보았다. 여기서 우치다는 “학력 저하는 노력의 결과”라는 충격적인 주장을 한다.

94. 교육신경과학 분야의 전문가인 데이비드 수자는 <공부하는 우리 아이들, 머릿 속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왜 유독 요즘 아이들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나요?라는 흥미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뇌기반교육 전문가의 대답은 과거와 오늘날의 아이들의 양육 환경이 근본적으로 변해서 “기술 발달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외부로부터 쏟아져 들어온느 엄청난 양의 자극을 처리하다 보니 아동의 뇌 기능과 구조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이다. 다양한 멀티미디어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동안에 학생들은 새로움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주의력이 분산되어 전통적인 수업처럼 지루하고 예측 가능하며 반복되는 자극만 일어나는 환경에는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수자는 “현재의 학교는 아이들의 뇌를 배려하는 공간인가?” 하는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수자의 견해를 인용하자면, 요즘 아이들은 수업에 집중 안 하는 존재인 동시에 집중하려고 해도 집중하기가 어려운 존재가 되어 가고 있는 셈이다.

104~105. 현재를 과거를 통해 규명해 보려는 역사적 설명은 현재의 잘잘못을 과거에 전가할 위험성도 있다.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처럼! 그렇다면 … 현재를 현재로 설명하는 방식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중략) 누군가 건물 유리창이 깨진 채로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왜 유리창이 깨져 있는지를 규명해보려 한다고 가정해 보자. 첫 번째 접근은 누가 유리창을 파손했는지를 수소문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 내가 무엇 때문에 유리창을 파손했는지를 알게 되었다면 이는 일종의 역사적 규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리창이 깨진 지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건물주가 깨진 유리창을 그대로 내버려 둔 것이다. 이유를 탐문해 보니 돈이 없을 뿐 아니라 원래 건물이 통풍이 잘 안 되는 구조였는데 깨진 유리창으로 바깥 공기가 적당하게 들어와서 공기 순환에도 도움이 되어서 그냥 두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리창이 계속 깨져 있는 것에 대한 현재적 설명은 그것이 건물주나 건물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나름 순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기능주의적 설명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현재로써 설명하는 방식에 가깝다.

105~106. 교사들은 쏟아지는 공문 처리와 행정적인 일 때문에 수업과 교육 활동에 집중할 수 없다고 불평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런 관리 영역의 비대화가 고립적인 교사 문화가 존속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낸다. 이런 환경에 순응하는 것이 교사 집단과 관리자들에게 암묵적으로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교육 영역은 그 활동의 의미와 성과가 쉽게 측정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중략) 학교장은 교육 활동보다 관리 영역을 중시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낀다. 교육 활동을 일부 희생시키더라도 관리 영역을 잘 작동시키는 것이 유능한 교장으로 인정받는 길이기 때문이다. …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은 교사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다. 공문 처리와 같은 행정적인 일만 잘하면 교육 활동을 잘하든 못하든 별로 간섭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교실을 자신만의 왕국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불간섭은 긍정적인 의미의 교육의 자율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좋은 교육을 위한 노력을 방기해도 좋은 안락한 휴식처를 제공하는 ‘의사 자율성’에 불과하다. 종합해 보자면 고립적인 교사 문화는 역사적인 기원에 더하여 교육보다 관리 중심의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관리자와 교사 모두에게 기능적으로 유익이 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유지된다고 볼 수 있다.

114. “내가 들었던 모든 수업은 거의 예외 없이 단 한 사람(교사)의 활동과 권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나를 비롯한 다른 학생들은 그저 실재에 대한 교사의 보고를 가만히 듣거나, 교사가 선택하여 숙제로 내준 다른 권위자들의 보고들을 읽었을 뿐이다. 우리의 임무는 그러한 보고서를 암기해서 시험 때 그대로 옮겨 적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수업 시간에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개인적 참여는, 교사에게 강의 내용이나 읽은 책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을 암기하는 것이 전부였다. 토의 시간이 주어지는 수업들도 있었지만, 내가 선생님을 가르칠 수 있다는, 아니 동료 학생들이라도 가르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거의 없다. 사실 그렇게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도 거의 없다. 교실은 독창적 탐구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 권위자를 모방하는 자리였고, 협동의 장소가 아니라 학습자들 간의 경쟁의 장소였다.”(파커 파머,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115. 미국의 교실수업이 훨씬 더 활동 중심이고 개별 학생을 고려하는 수업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상식에 비추어 볼 때 그의 학창 시절 경험이 우리와 거의 똑같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그러나 생각해 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교사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일률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모델 자체가 산업 사회 초기의 서양 - 더 정확히 말하면 프러시아 - 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대가 바뀌었고 이런 수업이 더 이상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구가 이런 전통적 수업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을 일찍 시작한 데 비하여 우리의 경우 아직도 관습화된 전통에 고착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116. “좋은 수업은 민주적인 수업 문화의 틀 아래서 교육 본연의 과제에 기초하여 그리고 성공적인 학습 동맹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의미의 생성을 지향하면서 모든 학생의 능력의 계속적인 발전에 기여하는 수업이다.”(힐베르트 마이어 <좋은 수업이란 무엇인가?>)

122. 마이어는 개인적으로는 “학생 중심적이고 자신감과 자립성을 강화하는 수업”을 옹호하면서도 “강의식 수업이 본래부터 나쁘거나 모둠 수업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 아니듯이, 보수적인 교사 중심적 수업이 자동적으로 나쁜 결과를 낳고 열린 수업이 자동적으로 더 나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거기서 실천적으로 어떤 것을 이루어 내느냐에 달려 있다”라고 말한다. 또, “좋은 수업의 기준들은 모든 수업을 획일화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효과적인 수업은 개성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다”라고도 말한다. 어떤 교사는 10가지 기준 중에 어떤 것에 대해 약점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강점으로 그것을 보완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점을 [명제 2.10: 좋은 교사는 어떤 특징의 부족을 다른 특징의 강화를 통해서 보완할 수 있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나는 전적으로 마이어의 이런 의견에 동의한다. 좋은 수업이 획일화될 수 없다는 것은 좋은 야구 투수의 특질에 비추어 보면 아마 잘 이해가 될 것이다.

124. 수업을 명료하게 구조화하는 것은 개별 학생을 배려하면서 학습 촉진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10가지 기준들도 한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하나를 추구하는 것이 다른 기준과 모순 관계에 놓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따라서 좋은 교사는 통제와 자유 사이의 균형, 자기 주도적 학습과 협동 학습 간의 균형, 개인의 학습 조건과 관심을 도야적 요청과 조화시키는 일 등 다양한 요소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명제 4.3: 전문적 교사는 수업과 교육에서 등장하는 경쟁적인 요구들을 균형 잡는 데에 능숙한 사람들이다]라는 표현은 교사의 이런 능력을 잘 나타내고 있다. 즉, 좋은 교사는 수업에서 직면하는 여러 딜레마들을 민감하게 인지하고 상충하는 요구들을 잘 조절해 낼 수 있는 전문가이다.

137~138. 학계에서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을 때인 2013년에 정찬필 피디는 직관적 확신을 가지고 하나의 실험에 들어간다. 2013년 8월부터 6개월 동안 부산교육청의 협조를 얻어서 거꾸로교실 실험을 진행한 것이다. 부산의 초ㆍ중등 교사들이 참여한 6개월간의 실험 결과는 놀라웠다. 이 실험을 관찰도 하고 자문도 한 이민경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거꾸로교실은 참여형 수업으로의 변화를 통해서 교사와 학생의 상호작용 방식을 변화시키며, 또래 관계의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오고, 학생들의 성적과 학습 태도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연구에 참여한 많은 학생들에게 학교는 견뎌 내야 하는 곳에서 재미있을 수도 있는 곳이며, 경쟁과 적자생존이 아닌 소통과 협력을 통한 상호 성장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교사들에게도 거꾸로교실은 수업 방법의 변화를 통해서 교육 현실의 변화가 가능함을 보여 주는 효능감 향상의 계기로 인식되었다. 필자 또한 이 다큐멘터리의 자문 교수로 실험 현장을 자주 방문하고 실험 과정을 모니터링하였는데 6개월 짧은 실험을 통해서 한국 교실의 고질적인 문제가 해소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2013년 말 ‘21세기 교육혁명 - 미래 교실을 찾아서’의 3부작이 방송된 후 현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 교수 방법에 고무된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미래교실네트워크라는 교사모임을 출범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거꾸로교실의 마법’이라는 페이스북 그룹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 이런 모임에서 활동하는 교사의 숫자는 수 천명에 달한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은 다시 2015년 3월부터 ‘거꾸로교실의 마법 - 1,000개의 교실’이라는 4부작 다큐멘터리(<거꾸로교실 바이러스>, <꼴찌들의 반란>, <수업의 진화>, <정글탈출>)로 제작되어 방송되었다. 앞으로 거꾸로교실은 공영 방송에서 출발하여 현장으로 거대하게 확산되는 교실 개혁 실천 운동으로 발전되어 갈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운동이 성공한다면 공영 방송과 현장 실천이 결합된 최초의 학교 현장 개혁 운동으로 그 역사적 자리매김을 하게 될 전망이다.

138~139. 내 입장부터 밝히면 나는 거꾸로교실에 대한 상당한 지지자이다. 물론, 거꾸로교실이 잘못 적용되어 비교육적인 효과를 낼 가능성도 존재한다. 예컨대, 교사가 마냥 동영상 자료만 틀어 주거나 학생들에게 학습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전가하는 자습식 수업이 될 우려가 있다. 교사가 동영상을 재미없게 만들거나 교실 활동을 잘 구안하지 못하면 지식 전달도 학생 주도적 활동도 모두 놓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거꾸로교실이 지니는 교수-학습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을 경우 지식 전달을 위한 효과적인 도구로 동영상이 반복적으로 활용됨으로써 새로운 수업이 아니라 시대에 뒤떨어진 한국식 공부 방식을 오히려 강화시킬 우려도 있다. 나는 이런 우려들에 대해 일정 부분 공감한다.

141~142. 장기적인 노동 시간의 효율성 차원에서 비교하자면 동영상을 제작하여 활용하는 것이 교사의 노동 시간을 오히려 줄여 줄 뿐 아니라 교사의 시간 자체를 더 교육적인 목적에 맞게 재조정할 수 있도록 해 준다. 한 교사가 동일한 수업 내용을 여러 반에서 계속 가르쳐야 하는 중등학교의 경우에 이런 노동 시간 단축의 효과는 훨씬 더 분명하다. 아주 예전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내가 교사를 할 때 한 단위의 수업을 무려 열한 반에서 진행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중략) 나는 여기서 거꾸로교실이 교사의 기존 노동 강도를 줄여 주거나 최소한 더 강화시키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과잉 노동 사회 속에 포획되어 있는 우리들은 교사들에게도 은연중에 더 많은 노동을 끊임없이 강요한다. 교실 변화나 학교 개혁을 이야기할 때 교사가 지금보다 더 많이 노력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전제를 암묵적 혹은 명시적으로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헌신이나 봉사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다. 물론 게으른 교사도 있고 교사가 지금보다 노력하고 헌신해야 하는 영역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교사의 노동 시간을 증가시키지 않고 노력의 방향을 재조정하거나 유기적인 협력을 강화함으로써 더 나은 효과를 낼 수 있다면 그것이 더 바람직하고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거꾸로교실은 그런 현실적 가능성을 풍부하게 지니고 있다.

145~146. 거꾸로교실을 처음 시작하는 교사들이 직면하는 초기 고민은 어떻게 동영상을 만드느냐에 집중된다. 동영상을 만드는 기법을 익히는 것, 동영상을 잘 만드는 것, 학생들이 미리 동영상을 보고 오게 훈련하는 것, 동영상을 보고 오지 않은 학생들을 수업에 끌어들이는 것 등 교사의 고민은 동영상을 중심으로 맴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 고민은 해결된다. 그런데 이 문제가 해결될 즈음에 교사는 또 하나의 큰 산을 만나게 된다. 강의가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교실수업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하는 막막한 고민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교사는 이제 자신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낯선 수업 시간과 씨름해야 한다. 그리고 학생들과 면 대 면으로 마주하는 이 시간에 의미 있는 학습이 일어나도록 만들어야 한다. 아마도 많은 교사들이 이 단계에서 더 큰 도전에 부딪힐 것이다. 이런 경험과 고민을 나누는 동안에 거꾸로배움 네트워크 교사들은 “거꾸로교실”과 “거꾸로배움”을 개념적으로 구분하게 되었으리라. 결국 “거꾸로배움”은 “교실에서 학생들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단 하나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149~150. 사토 마나부가 보기에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형 교육의 근대화는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 압축적 근대화, 경쟁 교육, 산업주의 교육, 중앙집권적 관료주의적 통제, 강렬한 내셔널리즘, 교육의 공공성 부족 등이 그것이다. 사토 마나부가 언급한 현상들은 추가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특히 압축적 근대화, 경쟁 교육, 공공성 부족 등은 우리 교육의 문제를 그대로 드러낸다. “동아시아 국가는 교육의 목적을 국가의 번영과 함께 경쟁을 통한 개인의 사회 이동에 두었다. 국익 중심의 국가주의와 이기적인 개인 경쟁은 동아시아형 교육의 압축된 근대화의 양 축이었다. 이 구조 속에서 탈락해 버리는 것이 교육의 공공성이다. 왜냐하면 공공권은 본래 국가와 개인의 중간 지대인 사회권society, 그중에서도 자립한 개개인이 서로 원조ㆍ협력하는 협동사회association를 기반으로 하여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교육의 공공성이 국가에 흡수되어 온 것과 공교육이 개인주의적ㆍ이기주의적으로 의식되는 것은 일본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나라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156. 현대의 인식론은 객관적 지식 자체가 존재하기 어렵다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식은 인식 주체의 바깥에 발견되기를 기다리면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과 합의에 의해서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이 현대 인식론의 대세이다. 이 말은 물론 저기 바깥에 있는 물리적 실재를 부정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해석이라는 의미의 그물망을 통과하지 않고 직접 물리적 실재에 가닿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철학자 로티는 “세상은 저기에 있지만 그 세상에 대한 기술은 그렇지 않다”라는 말로 이 점을 간명하게 요약하였다.

157~158. 파커 파머는 객관적 지식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윤리적 차원에서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논변한다. 파머는 지식이 가치중립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지식은 자체적인 도덕성을 가지며 인간 영혼 내부에 있는 열정의 장소에서 시작한다. (중략) 파머는 근대의 지식을 출발시킨 원천은 호기심과 지배욕이라고 주장한다. 호기심에서는 대개 순수 이론 처럼 지식 자체가 목적인 지식이 나오고, 지배욕에서는 응용과학처럼 실용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지식이 나온다. 그런데 인간의 호기심은 유익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대상을 죽이기도 한다. 호기심은 도덕과 무관한 열정으로서 알고자 하는 욕구를 방해하는 어떠한 지시도 거부하려 든다. 과학자들이 인류 전체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핵에너지나 생물학 실험에 종사하는 것은 호기심에 의해서 추동되는 지식의 위험성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한편, 인간은 힘에 미혹되는 존재로서 지배욕을 가진다. 지배욕은 도덕과 무관할 뿐만 아니라 부패하기 쉽다. 근대 자연과학이 제공한 힘이 서구 열강에 의해서 어떻게 제국주의적 지배욕으로 구현되었는지를 우리는 20세기의 역사를 통해서 수도 없이 목격한 바가 있다. 파머는 호기심과 지배욕은 우리의 앎 이면에 자리한 열정으로 함께 결합되어서 우리를 생명이 아닌 죽음으로 이끄는 지식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파머의 말을 음미해 보면 왜 서양 근대 지식관에 터한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더 비윤리적으로 되기 쉬운지를 이해할 수 있다.

158~159. 파커 파머는 호기심과 지배욕에 터한 객관적 지식 교육의 비도덕성을 별도의 윤리교육으로 교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비윤리적 발사대에 위치한 객관적 지식 교육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기독교 신자답게 ‘사랑에서 발원하는 지식’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인식 주체가 호기심과 지배욕에 의해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이웃과 세계 전체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 터하여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161~162. 사토 마나부는 “공부”에서 “배움”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말로 번역된 ‘공부’의 일본어 한자는 “공부工夫”가 아니라 “벤쿄勉强”이다. 배움은 일본어의 “나라부学ぶ”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즉, “공부”에서 “배움”으로는 “勉强”에서 “学ぶ”로 전환해야 한다는 뜻이다.

162~163. ‘공부’의 전통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공부라는 말의 역사적 용례를 통해 김용옥은 “工은 功의 약자이고 夫는 扶의 약자이다. 工夫는 攻扶를 의미한다. 무엇인가를 열심히 도와서扶 공功을 성취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성공한다’라는 말도 단순히 ‘출세한다’는 뜻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공을 성취한다’라는 뜻이다. ‘공을 이룬다成功’는 말을 신체의 단련을 통하여 어떤 경지를 성취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한국인의 다양한 무술적 성취야말로 공부의 한 전형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중략) 이런 전통적 의미를 생각하면 ‘공부’라는 말을 쉽사리 폐기 처분해서는 안 된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164~165.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3차 학습’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3차 학습이란 “규칙성을 깨는 방법,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습관화를 막는 방법, 조각의 경험들을 이리저리 꿰맞춰 지금까지는 없었던 생소한 유형을 새로 만들고 다른 유형들은 잠정적으로만 수용 가능한 것으로 취급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중략) 젊은 시절에 형성된 사회와 정치를 인식하는 습성이 평생 지속되면서 철 지난 한 세대의 젊은 시절 경험이 그것이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은 시대에 영속되는 사태를 우리는 얼마나 자주 목도하고 있는가? 따라서 정신과 육체의 결합으로서의 우리 몸은 21세기적 시공간에서 낡은 습관에서 언제나 자유롭게 새로운 학습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유연한 몸이어야 한다. 그것은 바우만이 말하듯이 “습관 없이 사는 습관”을 익히는 새로운 학습의 경지일지 모른다.

_ 이혁규, <한국의 교육 생태계>, 교육공동체 벗,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