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청년 진보논객의 데이트 폭력 논란

한윤형박가분은 ‘짱돌을 들지 않는’ 88만원 세대에 대한 486세대의 소망이 고스란히 투영된 차세대 이데올로그들이다.”(오혜진)

“포스트모던의 바람 이후 우리는 분노, 용기, 양심, 성찰, 수행 같은 것들과 그 언어들을 낡고 지적으로 둔한 것처럼 치부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들이 단순화하고 교조화할 때 인간의 삶의 복잡성을 생략하고 이런저런 비인간적 폭력을 만들어낸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 해결은 폐기가 아니다. 인간의 지혜와 사회 디자인 가운데 폐기될 건 없다. 끝없이 수정하고 보완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포스트모던 바람은 그렇지 않았다. 현실 사회주의 패망과 그 실체의 폭로 앞에서 공황 상태에 빠진 80년대 좌파들의 유력한 탈출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것은 그들이 저주하던 박정희의 새마을운동 같았다. 초가지붕을 알록달록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고 새마을이라 부르듯, 그들은 근대도 경험하지 못한 사회에서 탈근대 언어의 유행을 만들어냈다. 그 해악은 다음 세대 좌파들의 머리통과 언어에 새겨졌고, 지적인 것과 인격적인 것의 부조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똑똑해 보이긴 하는데 존경심이 들진 않는다든가, 사회 변화에 대해 말하는데 정작 개인은 불안정해 보인다든가 같은 젊은 좌파 비평가들에 대한 모종의 공통된 인상은 그와 관련되어 있다. 그런 경향들이 데이트폭력의 직접적 원인이라 할 순 없다. 역시 노동당원으로 데이트폭력 사건의 가해자인 비평가 박가분이 쓴 자기파탄적 해명 글(“천하의 ‘진보논객’ 박가분의 몹쓸 짓에 대한 의혹에 관한 저 자신의 입장”이라는 제목의)은 그런 관련성을 짙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사건들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언어의 역전은 그런 경향성과 함께 희망도 내포된 혼돈 상태에 있음을 보여준다. … 지적인 것과 인격적인 것의 조화를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내 마음이 조화롭지 않은데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순 없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좌파는 굳이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김규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