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Results for 'Teleological'


August 4, 2017: 7:31 pm: bluemosesErudition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무는 동안에, 백성들이 모압 사람의 딸들과 음행을 하기 시작하였다. 모압 사람의 딸들이 자기 신들에게 바치는 제사에 이스라엘 백성을 초대하였고, 이스라엘 백성은 거기에 가서 먹고, 그 신들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바알브올과 결합하였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크게 진노하셨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백성의 우두머리들을 모두 잡아다가, 해가 환히 비치는 대낮에, 주 앞에서 그것들의 목을 매달아라. 그래야만 나 주의 진노가 이스라엘에서 떠날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재판관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제각기 당신들의 남자들 가운데서 바알브올과 결합한 자들을 죽이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 어귀에서 통곡하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한 남자가,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보는 앞에서 한 미디안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아론의 손자이자 엘르아살의 아들인 제사장 비느하스가 이것을 보고 회중 가운데서 나와, 창을 들고, 그 두 남녀를 따라 장막 안으로 들어가, 이스라엘 남자와 미디안 여자의 배를 꿰뚫으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서 그쳤다. 그러나 그 염병으로 이미 죽은 사람이 이만 사천 명이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아론의 손자이자 엘르아살의 아들인 제사장 비느하스가 한 일을 보아서, 내가 더 이상 이스라엘 자손에게 화를 내지 않겠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이 나 밖의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홧김에 멸하는 일은 삼갔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비느하스와 평화의 언약을 맺으려 한다고 말하여라. 그와 그 뒤를 잇는 자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보장하는 언약을 세우겠다. 그는 나 밖의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속해 주었기 때문이다.” 미디안 여자와 함께 죽은 그 이스라엘 남자는, 시므온 가문의 지도자인 살루의 아들 시므리이다. 그와 함께 죽은 미디안 여자는, 미디안에 있는 한 가문의 종파 우두머리인 수르의 딸 고스비이다.(민수기 25:1‭-‬15)

“키에르케고어에 따르면, 세계를 설명하고 세계에 방향성을 부여하는 하느님 없이 직접 의미를 창조하기 위해, 규정성과 방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실재’reality를 확립하기 위해 우리는 세계에 어떤 규정을 투사한다.” 문명의 뒷면에는, “내적인 혼란과 부조화의 상태라 할 수 있는 절망”이 꼭 그만큼 쌓인다. 키에르케고어는 <<공포와 전율>> 마지막 장에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친 사건(Akedah)을 분석한다. 아브라함은 야훼의 명령에 따라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 한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놓여야 할 자리에 대신 세웠던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체계들을 폐기”하였다.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를 거친 아브라함에게 윤리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 되었다. “윤리는 이제 신앙을 통해, 즉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통해 매개되고 정지된다.” “아브라함은 맨 먼저 하느님에게로 나아가고 그 이후에야 바로소 윤리 체계, 한때 매 순간 그를 지배했던 윤리 체계로 나아간다.”

May 19, 2016: 11:05 pm: bluemosesErudition

“Therefore, my beloved, as you have always obeyed, so now, not only as in my presence but much more in my absence, work out your own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for it is God who works in you, both to will and to work for his good pleasure.”(Philippians 2:12‭-‬13)

“디트리히 본회퍼의 사례를 보자. 그는 키에르케고어와 그의 작품 <공포와 전율>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가 히틀러 암살 모의에 가담하고자 결심했던 데에도 부분적으로는 키에르케고어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May 4, 2016: 2:08 am: bluemosesErudition

<고통의 문제>에서 루이스는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 자신의 선에 대한 이해와 연관시키려 할 때 딜레마에 봉착하게 되는 점을 주목했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우리보다 현명하시고,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더욱 고차원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선해 보이는 일이 사실은 선하지 않을 수 있고, 악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은 악하지 않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을 선하다고 부르는 것도 의미 없는 외침이 될 수 있다. 만일 그분이 우리의 의미에서 선하지 않다면, 우리는 그분께 도덕적 기반에서가 아니라 두려움으로 순종할 것이다. 하나님께 그런 식으로 순종하는 것은 권세 있는 독재자에게 복종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루이스에 따르면, 이러한 딜레마를 피할 수 있는 길은 우리의 도덕적 판단들이 하나님의 것과는 실제로 다르지만, 그렇다고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의 선함과 흑과 백처럼 다른 것이 아니라, 완벽한 원과 처음으로 바퀴를 그리려는 어린 아이의 시도가 다른 것과 같다. 그러나 어린 아이가 그리는 법을 배웠을 때, 아이는 그 순간 자기가 그린 원이 처음부터 그리려고 했던 바로 그 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April 25, 2016: 12:20 pm: bluemosesErudition

키에르케고어는 “단독자와 윤리의 관계, 그리고 그 윤리를 넘어서, 정확하게는 윤리와 무관한 신과의 관계에 집중한다.” “키에르케고어에 따르면, 세계를 설명하고 세계에 방향성을 부여하는 하느님 없이 직접 의미를 창조하기 위해, 규정성과 방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실재’reality를 확립하기 위해 우리는 세계에 어떤 규정을 투사한다.” 문명의 뒷면에는, “내적인 혼란과 부조화의 상태라 할 수 있는 절망”이 꼭 그만큼 쌓인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게 되었으나 이제는 올바른 방향을 지시해 줄 어떤 방향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문명이 확립한 실재는 “근본적으로 유한”하며, 그에 따라 “결국 붕괴”하며,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즉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요구에 부응하여 “실재의 체계화로 귀결” — 헤겔의 거대한 사변 형이상학의 체계가 이것의 극명한 사례일 것이다 — 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키에르케고어의 대답은 간단하다. 너 자신, 즉 개인(단독자)이 되어라.”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신에 의한 의미부여를 거부함으로써만 가능한 자유였음을 깨닫는, 이 거부를 다시 거부하는 회심을 내면으로부터 수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재거부는 “탈구축De-Construction 운동”이요, “자아를 창조하는 방법 … 결단”은 “재구축Re-Construction 운동”이다. 이러한 이중의 운동을 통할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고독해도 인간이 되느냐, 떠들썩하지만 푸성귀처럼 살아가느냐의 갈림길이 여기에 있다.

키에르케고어는 <<공포와 전율>> 마지막 장에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친 사건(Akedah)을 분석한다. 아브라함은 야훼의 명령에 따라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 한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놓여야 할 자리에 대신 세웠던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체계들을 폐기”하였다.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teleological suspension of the ethical를 거친 아브라함에게 윤리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 되었다. “윤리는 이제 신앙을 통해, 즉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통해 매개되고 정지된다.” “아브라함은 맨 먼저 하느님에게로 나아가고 그 이후에야 바로소 윤리 체계, 한때 매 순간 그를 지배했던 윤리 체계로 나아간다.”

신을 매개로 한 윤리 체계가 인간의 행위에 영향을 끼친 사례를 우리는 본회퍼에서 발견한다. “윤리 체계에 따르면 자신이 하는 일이 본질적으로 살인임을 본회퍼는 알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행동한 것을 근본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교인도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자신의 불안을 설명하면서도 하느님이 그렇게 행동하기를 요구하신다는 자기 느낌에 대한 확신 또한 보여준다. 그는 그 상황이 얼마나 중대한지를 알았다. … 그는 하느님의 명령을 들으면서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머물러야만 했다.”

_ 강유원, 2016. 3.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