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왜곡의 왜곡으로 이어지는 질곡

“현 정부에서도 대입 기본계획을 바꾸거나 <고교교육 기여대학 지원사업>의 조건으로 요구하거나 코로나19로 인한 비상조치를 취하는 방식으로 수시모집 수능 최저학력기준을 제거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고 싶은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능 최저학력기준이 없어지면, 수능은 사실상 재수생을 위한 “두 번째 기회”(second chance)라는 성격을 갖게 되므로 학교 교육에 미치는 수능의 영향력은 대폭 줄어든다. 그리고 학생은 수능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대학입시는 학교 교육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1] 체계로서의 교육

지역과 계층을 위시한 여러 세력의 이해관계가 물질적으로 응축된 “체계로서의 교육”은 인간의 잠재력 발현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왜일까. 일종의 동어반복이겠으나 “체계로서의 교육”은 가치의 권위적 배분을 매개하는 정치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2] 교육의 본성

체계로서의 교육(이하 “교육”)은 학습을 특정 지점으로 견인하고 추동하는 다중 메커니즘의 합이다. 교육은, 결과로서 과정을 입증하듯 평가에 의거하여 그 과정을 역으로 재구성한다. 일견 교육과정에 기반을 두고 평가가 이루어지는 듯 하나 평가는 교육과정을 언제나 앞서 조율한다. 이점에서 2021학년도 수능은 유의미한 사례임에 틀림 없다. 교육은 수업에서 디자인 되는 것이 아니다. 구조적으로 각인된 상대적 자율성의 일부가 수업에서 용인되는 것이다.

[3] 이데올로기 직면

이데올로기는 왜곡된 바를 자연스럽게 만든다. 작금의 교육은 위계를 전제하는 동시에 제한된 상상력으로 학습의 이상을 동경하도록 독려한다. 이 둘 사이에 대입과 관련된 모든 담론이 함몰된다. 예외는 없다. 마치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말한 것처럼. “파시즘은 대중으로 하여금 결코 권리를 찾게 함으로써가 아니라 표현하게 함으로써 구원을 찾고자 한다.”

[4] 교육의 교육적 전환

사람이 먼저일 수 없는 교육에서 인간의 얼굴을 찾는 일은 무익하다. 한계가 명확하다. 그럼 무얼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기존 교육의 ‘비평’에서 새로운 교육 ‘창작’으로 도약해야 한다. 가라타니 고진이 토로하였듯, 비평이란 결국 부정하는 대상에 기생하는 것으로, 적이 사라지면 자신도 소실되고 만다. 수능이 약화 혹은 폐기되면 교육 개혁이 도래하게 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비평의 필요로] 또 다른 시험을 발명해야 할 것이다. 정치에 의해 쓰여진 ‘기존의 교육’으로는 평가로 환원되는 뫼비우스적 위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5] 평가의 교육화

그렇다면 새로운 교육을 짓는 일, 벤야민이 말한 ‘정치의 심미화’에서 ‘예술의 정치화’로 가는 교육의 교육적 전환은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정치의 교육(학) 문법이 선발이라면, 교육(학) 본연의 문법은 육성이다. 우리는 ‘교육의 평가화’와 결별하고 ‘평가의 교육화’로 가야 한다. 여기에 구원이 있고, 이것은 나의 이직 사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