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March, 2007

March 31, 2007: 3:52 pm: bluemosesErudition

1. 딱 1/10만 내놓으라. 10배 이상 알지 못하면 논쟁치말고, 놓친 부분을 얻어라. 시선의 비대칭성을 염두에 둔다면 지는 것이 이김이다.

2. 반나절에 공든 탑을 세울 수 없다. 난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결여됐기 때문이다. 가령, ’07 역사화보집을 연말에 편찬하려 한다면 연초부터 자료를 수집해야 한다. 시간을 돌이켜 촬영을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공든 탑을 세우고자 하면, 10분 후와 10년 앞을 동시에 봐야 한다.

3. 경쟁의 승자는 목표를 달성할지언정 목적을 완수할 수 없다. 경주와 달리, 경쟁은 대상의 변동에 따라 진로 또한 변경되고 만다. 그저 무언가를 열심히 하여 누구보다 낫다는 것만으론 곤란하다. 기만에 빠져서 미궁에 빠지기 십상이다.

4. 요셉처럼 ‘지금 여기’에서 ‘주를 위해’ 주인/상관의 미덕을 갖춰라. 그들과 싸우지 말고, 그들의 마음을 얻자.

: 3:09 pm: bluemosesErudition

9일간의 피정을 맞이하다(’07.03.31~04.08).

이전 2년간의 반성(Feed-back)과 이후 2년간의 추급(Feed-forward)을 반추한다.

March 28, 2007: 1:40 am: bluemosesErudition

그 곳에 돌아가지 않겠다. 그 때의 모습으로 남겠다. 안녕.

March 27, 2007: 3:42 am: bluemosesErudition

1. 6시간 동안 악몽을 꾸며 이리저리 무언가를 생각했지만 정작 꿈 속의 그들에게 아무것도 제시할 수 없었다.

2. 특정 입장을 반박하는 그럴듯한 거대 담론만 머리 속에 담고 있었다. 각론 없는 총론은 무용론과 다름없다.

3. 몸살로 인해 그동안 놓쳤던 감사의 제목을 재발견했다. 하나님께 늘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

March 24, 2007: 1:21 pm: bluemosesErudition

1. ‘널 생각하면 멋있게 날 꾸며지고 싶어져. 아직 너의 사진에 무표정해지질 않아.’

2. 못난 중생들을 섬겨준다는 교만한 예수쟁이의 위선적 겸양은 수시로 탄로나는 천박한 무지에 스스로를 자학하며, 제 정체성을 포장하고 싶은 안타까움으로 학벌을 물감 삼아 초라한 자화상에 애써 덧칠을 하려 한다.

3. 언제나 주인공은 하나님, 당신임을 잊고 있었습니다. 가장 의존하던 것을 내려놓겠습니다. 삶의 목표가 단지 성공이라면, 저는 ‘가짜’입니다.

March 19, 2007: 10:03 pm: bluemosesErudition

“For even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Mark 10:45).”

: 9:45 pm: bluemosesErudition

해학(諧謔)은 익살스럽고도 품위가 넘치는 말과 행동을 의미한다. 

해학(解虐)은 사태를 파악하는 통찰의 정수로서 갈등을 초월한다.

March 18, 2007: 5:13 pm: bluemosesErudition

제대로 기반을 갖추기 위해 ‘교과서’와 ‘사전’ 그리고 ‘연구방법’을 충실히 정독/숙독한다.

“결과로 말해야지 진정성 따위는 필요없다.” 하나로 쌓아가라. ‘기회는 지금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