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March, 2008

March 25, 2008: 10:04 am: bluemosesErudition

마지막으로 지젝은 역시 마르크스를 ‘전유’함으로써 마무리를 지었다.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에게 프롤레타리아트는 ‘빼앗긴 존재’이고, 다시 표현하면 ‘실체 또는 본질 없는 주체’(subject without substances)라고 했다. …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더는 이대로 세상이 지속될 수 없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한데, 그게 뭔지는 나도 솔직하게 모른다.” 그리고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반세계화주의자들의 행사인) 세계사회포럼의 일각이 주장하는 ‘작은 지역 공동체의 회복’은 해법이 아니다. 작은 공동체를 회복하기는 너무 늦었다. 보편적이고 큰 싸움이 필요하다”고 부연했다. 내가 공감한 딱 두가지 대목 가운데 하나다. 다른 한 대목은 “포스트주의는 이론이 아니라 언론의 이름 붙여주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cf. Macro - praxis / micro - Community

– 출처 : 신기섭(’08.03.24). “지젝이라는 대중적인 현상”(全文).

March 17, 2008: 12:17 am: bluemosesErudition

Q : 간통제 폐지나 체벌 금지를 다룬 100분 토론에 나갔다. 민감한 주제에 왜 나서나.
A : 국가권력이 비대해지도록 방치해두면 언제든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내리칠 수 있다. … 이 지옥에서 내 부모님이 사시고, 내 친구가 살고 있다. 내 딸도 이 지옥에서 엄마 아빠가 살고 있지 않나. 여기를 천당으로 바꾸려는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건 용납이 되지만, 여기서 도망 나가는 짓은 하면 안 된다.

Q : 가슴 아픈 이별 노래도 쓸 수 있다는 얘긴가.
A : 물론이다. 20대에는 실제 경험이 주는 아우라가 강렬하기 때문에 그 영향 아래서 곡을 쓸 수가 있다. 실제 경험하고 멀어지는 나이가 되면, 경험이 끌어당기는 향수가 강해서 느낌이 오히려 생생해진다. 40대가 되니까 내가 청소년 시절에 첫 미팅 하던 거리에서 두근두근하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해진다(신해철, 080315).

: 12:06 am: bluemosesErudition

“근대소설을 ‘실패한 보물찾기’로 규정한 이는 헝가리 비평가 루카치였던가. 근대소설뿐만 아니라 장유정 대본의 등장인물도 하나같이 첫 목표를 이루지 못한다. 허나 그들은 보물을 찾아 떠난 여행길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깨달음이 꿀처럼 달 때 관객은 함박 웃고 깨달음이 약처럼 쓸 때 관객은 눈물 쏟는다. 장유정은 기막힌 반전을 통해 깨달음을 극대화한다. … [장유정은] 반전을 통해 등장인물에 대한 연민이 자라고 팜플렛에서 작가 이름을 확인하게 만든다. 나는 이것을 장유정식 ‘따듯한 반전‘이라 명명하고 싶다. 무엇에 대한 따듯함인가. 인간이 지닌 나약함을 향한 따듯함이다. 아내와 딸을 두고 돈 벌러 상경한 못난 아비 최병호, 사랑하기 두려워 먼저 연락을 끊고도 첫사랑을 찾으려는 여인 오나라, 적당히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며 지내다가 밀물처럼 찾아든 사랑에 혼란스러워하는 김찬일 강유경 부부,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안면몰수하고 싸우는 이석봉 이주봉 형제. 작가는 속물근성을 적나라하게 꼬집으면서도 그들이 꼭꼭 숨겨온 삶의 애환을 보듬어 안는다. 악행에 찌들어도 미워할 수 없는 존재, 그가 바로 인간이다(김탁환, 080315).”

March 16, 2008: 11:23 pm: bluemosesErudition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투자자를 모집하는 공모펀드(예: 뮤추얼 펀드)와 상반되는 개념으로, 비공개로 투자자를 모집해 저평가된 기업을 인수한 뒤 기업가치를 높인 다음 되파는 전략을 취한다. 공모펀드의 경우 펀드의 10% 이상을 한 주식에 투자할 수 없으나 사모펀드에는 이러한 제약이 없다. … 정부가 제시한 사모펀드 활성화의 당위성은 토종기업을 지키고 자본유출을 막는다는 것이었다. 즉, 한국의 토종기업을 해외 사모펀드에 빼앗기기에 앞서 토종 사모펀드가 인수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변양호 전 재경부 금융정보분석원장의 ‘보고(VOGO) 인베스트먼트’ 역시 이렇게 설립된 토종 사모펀드 중 하나이다(홍기빈, 2007: 25).”

: 8:39 pm: bluemosesErudition

지난 2년간 비축한 자료를 논문으로 전환한다.

: 1:12 am: bluemosesErudition

“일찍이 김광석은 노래했다. 또 하루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그렇게 말한 시인은 최승자다. 삼십 세에 대한 으리으리한 경고는 너무 흔하다. 스물아홉 가을, 나는 갓난아이에게 홍역 예방 접종을 맞히는 엄마의 심정으로 스스로를 다독였었다. 와라! 서른 살, 맞서 싸워주마. 절대 지지는 않을 테다. 그런 식의, 유치하지만 제법 비장한 각오도 했었다.”(13)

“후회하지는 않으련다. 혼자 금 밖에 남겨진 자의 절박함과 외로움으로 잠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대지 않겠다. 저지르는 일마다 하나하나 의미를 붙이고, 자책감에 부르르 몸을 떨고, 실수였다며 깊이 반성하고, 자기발전의 주춧돌로 삼고. 그런 것들이 성숙한 인간의 태도라면, 미안하지만, 어른 따위는 영원히 되고 싶지 않다. 성년의 날을 통과했다고 해서 꼭 어른으로 살아야 하는 법은 없을 것이다. 나는 차라리 미성년으로 남고 싶다. 책임과 의무, 그런 둔중한 무게의 단어들로부터 슬쩍 비껴나 있는 커다란 아이, 자발적 미성년.”(43)

“그렇다고, 결혼 제도 밖에 영원히 머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점심시간이 아니라 2교시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까먹는 것이 그 학급 구성원들의 암묵적 규칙이라면, 나 역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아이는 혼자 점심시간까지 기다려 독야청청 숟가락질을 하더하도 전혀 거리낌이 없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재인 역시 그럴 것이다. 그녀는 조바심치며 도시락 뚜껑을 연 것 뿐이다. 반찬 통에 담겨져 있던 개구리가 툭 튀어 나와 어느 쪽으로 도망가버릴지, 뚜껑을 열기 전에 어떻게 예상할 수 있겠는가.”(134)

“머리가 띵했다. 일평생 직업을 가지지 않겠다고 선언한 남자, 약육강식의 조직 시스템은 자신의 체질과 맞지 않는다고 확고부동하게 주장해론 남자, 남유준이 일을 하겠단다.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탄식을 억지로 삼켰다. … “일반 기업체에 신입사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나이는 다 지났더라. 이쪽은 경력 없어도 발 들이밀기가 수월할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네.”"(221)

“유희가 머리통을 쥐어뜯는 시늉을 했다. 나 역시 그렇다. 스무 살엔, 서른 살이 넘으면 모든 게 명확하고 분명해질 줄 알았었다. 그러나 그 반대다. 오히려 ‘인생이란 이런 거지’라고 확고하게 단정해왔던 부분들이 맥없이 흔들리는 느낌에 곤혹스레 맞닥뜨리곤 한다. 내부의 흔들림을 필사적으로 감추기 위하여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 수록 일부러 더 고집 센 척하고 더 큰 목소리로 우겨대는지도 모를 일이다.”(227) 

“가진 것 - 입가의 팔자주름, 알량한 통장 잔고, 깔고 앉은 원룸 전세금, 반 의절 상태인 부모, ‘한심하게 살기 대회’ 대표 선수 같은 친구들, 사랑에 관한 몇 가지 실속 없는 추억들. / 못 가진 것 - 남편, 아이, 직장. 겨우 세 가지가 부족할 뿐인데, 왜 이렇게 처참한지 모를 일이었다.”(336)

“때론 갈팡질팡하는  내 삶에 내비게이션이라도 달렸으면 싶다. “백미터 앞 급커브 구간입니다. 주의운행하세요.” 인공위성으로 자동차 위치를 내려다보며 도로 사정을 일러주는 내비게이션 시스템처럼, 내가 가야 할 길이 좌회전인지 우회전인지 누군가 대신 정해서 딱딱 가르쳐준다면 얼마나 좋을까?(53)” “그거 나는 왠지 무섭더라고요. 하늘에서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내려다보면서 왼쪽으로 가라, 오른쪽으로 가라 지정해준다는 게 말예요.”(347) “시동을 끄면서, 내비게이션은 달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늘에서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일일이 내려다보고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까무러칠 듯 무서우니까. 그 남자 ‘김영수’가 옆에 있었다면 동감의 미소를 보내주었을 것이다.”(427)

“그러나 점점 더 혼란스럽다. 나는 정말, 서른두 살의 나이인가? ‘서른두 살스러움’의 기준, ‘서른두 살적인 사고방식’의 기준은 대체 누가 정하는데? 한 개인이 일상의 지층을 뒤흔드는 커다란 사건에 처했을 때에 그런 소속 집단에 대한 선입견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소속 집단의 규범에 의지하여 머리가 빠개지도록 고민해봐야 답은 나오지 않는다. 나에게 나는, 우주 속의 유일한 개체. 새끼발가락에 티끌만 한 가시가 박힌대도 단독의 고통을 감내하며 작은 방 안을 홀로 뒹굴어야 한다.”(432)

“그러나 지금 여기, 맵고 달콤하고 뜨겁고 말캉한 떡을 묵묵히 씹어 삼키고 있는 나의 심장은 1초에 한 번씩 진지하게 뛰고 있다. … 서른두 살. 가진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다. 나를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내가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 우울한 자유일까, 자유로운 우울일까. 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440)

* 정이현(2006). 달콤한 나의 도시. 서울: 문학과지성사.

March 3, 2008: 1:59 am: bluemosesErudition

“중산층은 경제사회적 개념인 동시에 심리적인 개념이다. … 자신이 중산층에 속한다고 답한 사람이 6개월 만에 74%에서 28%로 급락할 수 있는가? 그럴 수도 있는 게 바로 한국의 중산층이다. … 실제로 2006년 한국종합사회조사에선 월소득이 500만원대인 사람 중 26.6%가 자신이 하위 계층이라고 답한 반면, 400만원대인 소득 계층에선 그 비율이 5.1%에 불과했으며, 100만원 미만 소득계층에선 61%가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평가했고, 36.5%만이 하위 계층이라고 인식한 것으로 나타났다.”

“삶의 만족감은 이웃과의 비교로 결정된다는 이른바 ‘이웃 효과’는 한국인 삶의 전 국면을 지배하고 있으며, 특히 상층지향성이 높은 동시에 하층으로의 전락을 두려워하는 중산층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 중산층 행태의 본질은 ‘키치’다. 키치란 19세기말 유럽의 급속한 산업화로 생겨난 중산층이 귀족의 예술적 취향을 흉내낸 데서 비롯된 개념이다. … 최근 국립국어원이 키치를 대신할 우리말 순화어로 ‘눈길끌기’를 선정한 건 바로 그 점을 겨냥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예술을 스스로 즐길 만한 감식안이 없기 때문에 예술을 남들의 눈길을 끄는 용도로 소비하는 것이다. … 스스로 즐기기보다는 남과의 구별짓기가 우선적인 목적인 까닭에 빚어지는 일이다. 와인, 고급예술 열풍은 웃어 넘길 수나 있지만, 그럴 수 없는 건 ‘나도주의(me-tooism)’로 인해 가족의 삶 자체가 피폐해지는 경우다.”

“대한민국에 대한 불만보다는 상류층에 편입하려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전 인구의 한 자릿수밖에 안 되는 상류층의 이해관계가 다수결의 원리로 관철되는 희한한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이는 마치 서울대를 개혁하자고 하면 이제 겨우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중산층 학부모다 자기 자식 서울대 보낼 생각에 서울대 개혁론에 반대하거나 시큰둥해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옳고 아름다운 거대담론과 더불어 생활밀착형 담론도 꽃을 피우면 좋겠다. 포로수용소에서의 탈출을 꿈꾸지만 아무런 길이 없다고 자포자기한 중산층이 많기 때문이다.”

– 강준만(한겨레21, 080228). “중산층은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구별짓기와 나도주의로 상류 가치를 지향하는 키치 왕국의 주민들.”

March 1, 2008: 7:00 pm: bluemosesErudition

“문제가 되는 것은 비판으로서의 비판[해석학적 순환]이 아니라, 사태를 들추어 내고 이해를 끌어내는 작업으로서의 비판[본질을 향해 육박해 들어가는 해석학적 순환]이다.”   cf. 돌아가는 여행

: 4:15 pm: bluemosesErudition

“자유란 관념이 아니라 욕망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인간의 욕망보다 강한 권력은 이 세상에 없는 모양입니다.”(p.236)

“광주항쟁은 1980년대에 이십대를 보낸 사람들을 거의 대부분 우연한 존재로 바꿔버렸다. 그걸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대학생들은 스스로 학습을 시작하고 조직을 만들었다. … 이제 마르크스가, 레닌이, 모택동이, 김일성이 닥치는 대로 읽히게 됐다. 누군가는 그들에게 이게 우연한 세계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했는데, 아무도 그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이전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책들이 증언하기 시작했다.”(p.347)

“그는 이런 문장을 외웠다. “물질이란 인간의 감각에 주어져 있으며 인간의 감각에서 독립해 존재하면서 인간의 감각에 의해 복사되고 촬영되고 묘사되는 객관적 실재를 표시하기 위한 철학적 범주다.” 그는 또 이런 문장을 외웠다. “세계에는 운동하는 물질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또 운동하는 물질은 공간과 시간 밖에서는 운동할 수가 없다. 세계는 하나이며 물질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세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대답이다.” 또 이런 문장을 외웠다. “물질세계는 발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서로 연관된 통합적 전체이기도 하다. 물질세계의 모든 대상들과 현상들은 자력으로 또는 따로따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 속에서 또는 다른 대상들 및 현상들과의 통일 속에서 발전한다. 이들의 각각은 다른 대상들과 현상들에 작용을 가하며, 스스로도 이 상호작용의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또 이런 문장을 외웠다. “사람만이, 오직 사람만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모든 것을 결정한다. 사람은 세계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자주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사회적 인간의 속성인 자주성을 지니고 자기 운명의 지배자로서의 지위를 규정한다.” … 그 어떤 폭압적인 체제도 자신의 존재를 쉽게 없앨 수는 없는데, 그 까닭은 자신의 운명이 의식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저 거대한 세계와 얽혀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p.353~354)

“폭력이 몸에 밴 사람은 폭력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바로 그 ‘인식하지 못함’이 그가 속한 세계를 폭력적으로 만든다. 그런 세계에서는 제아무리 비폭력을 주장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그들의 몸은 폭력보다 비폭력을 더 불편해한다.”(p.102)

“당시에는 미처 자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6월 항쟁이 있었던 1987년부터 분신정국이 펼쳐졌던 1991년까지 사 년에 걸쳐, 그동안의 한국사회를 완강하게 지탱해온 뭔가에 불길이 지펴지면서 그 불꽃이 화려하게 타올랐다가 장엄한 모습 그대로 몰락해갔다. 그게 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 그리하여 그들이 목도하게 된 것은 일찍이 황지우가 시 <이준태(1946년 서울生, 연세대 철학과 졸, 미국 시카고 주립대학 졸)의 근황>에서 쓴 것과 같이 “그리고 大腦와 性器 사이”의 세계였다. 대뇌와 성기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대뇌는 대뇌끼리, 성기는 성기끼리 서로 피곤할 정도로 싸우던 시절은 끝이 났다. “그리고 대뇌와 성기 사이”의 세계에서는 개인들이 저마다 한 시대의 몰락을 주관화하고 내면화시키면서 전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말은 곧 한 시대의 상처가 각 개인의 내면, 그러니까 대뇌와 성기 사이에서 치유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뜻했다. 그 시점부터 대외의 언어와 성기의 언어가 혼재하기 시작하다가 한동안은 성기의 언어만이 사회를 휩쓸었다. 이 사실은 1992년부터 라캉 유의 정신분석학이나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과 베르나르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따위의 영화가 크게 유행한데서도 잘 알 수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마광수 교수가 1991년 발표한 <즐거운 사라>로 구속된 것도,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라고 노래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 것도 바로 1992년의 일이었다. 1991년 5월 이전까지만 해도 대뇌의 언어로 말하던 사람들이 1992년부터 모두 성기의 언어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1991년 5월 이후의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내면 풍경이었다.”(p.47, 49)

“그제야 나는 그즈음 내가 공들여 지어온 집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반석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한낱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 순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자각은 그해 6월, 나를 향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세차게 밀려들던 우울(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나만의 지극히 개인적인 우울이 아니라 한 시대 전체가 느끼던 거대한 우울이었던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 그 우울은 너무나 컸다)로부터 나를 구해냈다. 나를 구한 건 “자기 자신이 되어라”라는 마지막 문장이었다. 인생은 자기 자신이 지배하는 것이다. 너의 인생을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라. 무엇보다도 네가 선출한 지도자에게는 맡기지 말라. 자기 자신이 되어라.”(p.123~124)

“베르크 씨가 내게 들려준 그 연극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발리케는 군수산업으로 돈을 번 무르크와 자신의 딸 안나를 결혼시키려고 애쓰던 중, 안나가 무르크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즉시 발리케는 두 사람의 약혼식을 준비하는데, 그즈음 스파르타쿠스단이 봉기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윽고 술집에서 열린 약혼식장에는 전쟁터에 나간 뒤로 사 년 동안 소식이 끊어졌던 안나의 약혼자 크라글러가 알제리에서 돌아온다. 크라글러는 안나에게 결혼해달라고 요구하지만, 안나는 이제 자신은 결혼할 수 없는 몸이라며 거절한다. 그러면서도 안나는 뱃속에 든 아이를 떼려고 술에 후추를 타서 마신다. 거리에서는 스파르타쿠스단을 진압하기 위해 군인들이 지나가는 가운데, 로자 룩셈부르크의 군중연설과 혁명 상황에 대해 전해들은 크라글러는 사람들을 이끌고 대열의 선두에 선다. 크라글러를 찾아 헤매던 안나는 사람들을 이끌고 거리를 달려가는 크라글러를 만나게 되고, 자신의 뱃속에 불륜의 핏덩이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결국 안나를 이해하게 된 크라글러는 동지들의 욕설과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둘만의 행복을 찾아 떠난다. 커다랗고 하얗고 넓은 침대로.”(p.371)

– 김연수(2007).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서울: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