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December, 2018

December 15, 2018: 11:59 am: bluemosesErudition

“1에서 1%를 더하면 1.01이고 1%를 빼면 0.99이다. 1.01과 0.99는 겨우 0.02차이다. 그러나 1.01을 365제곱하면 37.8이, 0.99를 365 제곱하면 0.026이 된다. 0.02라는 미미한 차이가 37.8(1453배)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하루에 해야 할 목표를 누군가는 1.01만큼 달성하고 누군가는 0.99만큼 달성했다고 생각해보자. 하루만 보면 별 차이 없지만, 1년이 지나면 절대 극복 불가능한 간극이 생긴다.”

“나a와 너b가 각자 노력하면 a제곱+b제곱의 결과를 얻을 수 있지만, a와 b가 협력해서 (a+b)를 제곱하면 a제곱+b제곱이라는 결과에 2ab라는 성과를 추가로 얻을 수 있다. 협력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 11:53 am: bluemosesErudition

신카이 마코토, 타이세이 건설 광고

December 13, 2018: 4:54 pm: bluemosesErudition

장면은 명백하다. 일단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화자의 진술은 ‘집’보다 ‘가정’이 자연스러운 중년의 모습을 구체화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오리를 보고 집에 있는 “내 자식들”을 떠올리는 장면은 화자와 그 동행이 사실은 자식까지 있는 부모이며, 심지어 ‘우리’ 자식이 아닌 ‘내’ 자식을 떠올리는 불륜 커플임을 드러내는 결정적 증거물이다. 요컨대 무대를 꾸미는 것은 “관리인과 어린 화자의 대립구도”도 “우리를 둘러싼 물리적 현실로서의 사회로부터 “최대한 멀리” 가 있는 소년(들)의” “독고다이식 화법”도 아니며, 오직 아슬아슬한 로맨스를 마무리하기 위해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두 중년이다. 그렇기에 “최대한 멀리 갈” 것이라는 천진한 발화는 “그때도 어떻게든 돌아왔”다는 닳고 닳은 중년의 현실감각에 의해 곧장 취소된다. 이 여정은 ‘현실’ 또는 ‘상징계’로부터의 도주를 전제하지 않는, 모험 없는 모험이다. 확실한 귀환을 전제로 하는 이 출정식에는 냉소도 무력감도 없다. 둘의 이탈은 ‘상징계’로부터 승리를 구가하기 위함이 아니라 즐기기 위함이고, 동시에 ‘상징계’를 유지하며 ‘상징계’ 내부에서 ‘실재계’의 향유를 얻길 바라는 이탈이다. 그러므로 ‘관리자’와 화자는 대립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이들은 모두 상징 질서의 공모자에 가깝다. 화자가 ‘관리자’와 반목한다면 그건 오직 두 연인이 ‘상징계’ 내부에서 ‘실재계’의 향유로 발목을 적시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 속에서 ‘소년’을 발견한 것은 시집이라는 단위에 ‘저항’이나 ‘냉소’와 같은 모종의 일관성을 부여하고 이를 기준으로 하나의 서사를 조직하는 관습적 독서 전략의 귀결이다. 이 중년들은 ‘상징계’를 향해 발칙한 저항을 전개하기엔 너무 늙었고, 그렇다고 ‘상징계’의 불가피성에 냉소적 태도를 품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이들에게 남은 것은 질서로의 귀환뿐이다.

다그치는 것처럼 보이는 ‘선생’의 모습은 사실 ‘헬렌’의 불안이 음각으로 파인 투사물이자 동시에 스스로 내면화한 대타자의 시선과 화자 자신의 욕망이 뒤섞인 혼합물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여기서 ‘헬렌’의 고통은 상징 질서의 엄혹한 권위로부터 도망칠 수 없기 때문도, 대타자의 억압이 맹위를 떨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시대가 복되지 못하기 때문이고, 대타자의 헐렁한 권위가 상징계의 균열을 덮지 못할 만큼 성기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바로크 시대를 이렇게 요약한다. “작가들은 자기가 너무 늦게 태어나서, 말할 만한 것들을 남들이 이미 모두 말해버렸으니, 그 말을 멋있게 다시 되뇌는 길밖에는 없다고 체념하면서 태평하게 제 직업에 종사했다.”

비애극Trauerspiel이라는 단어에 유희Spiel가 숨어 있는 것처럼, 김승일의 유희엔 “뜻 모를 아픔”이 몸을 숨기고 있다.

_ 민경환(2018). “바로크 놀이터의 겨울”, <문학과사회>, 31(2), 425~449.

December 12, 2018: 12:13 pm: bluemosesErudition

시인의 정체성을 만들어온 동네 언저리에 앉아 그는 우사인 볼트처럼 말이 빨랐다. 잠시 숨을 고르면 다시 달음박질쳤다. 그 리듬은 흘러나오는 카페의 음악과 같았다. 자신의 취향이 아니면 인상을 찡그리기도 했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는데 음악과 소음에는 예민해요.”

그는 “시는 느낌의 전달, 음악의 전달, 침묵의 질을 전달하고, 쓰여진 것보다 쓰여지지 않은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시집의 가장 강렬한 방점은 ‘시인의 피’ 연작에 찍힌다. 그가 생각한 시집 제목이기도 했다. ‘시인은 무엇이며 동시대성을 어떻게 가지는가’라는 질문에 시를 빌려 이렇게 답한다. “무대 위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입김이다. 그는 모든 장소에 흘러다닌다.”

제목에 쓰인 고래와 수증기를 비롯해 시어로 수집한 구름, 물거품, 입김, 움직이는 새 떼 등의 말은 ‘유동적’인 정서의 결을 만든다. “진짜 중요하고 실제적이고 현상적인 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게 아닌가요. 현상이지만 숨겨져 있는 입김처럼,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들처럼요.”

December 11, 2018: 9:11 pm: bluemosesErudition

“시가 가진 전통적 무게감을 벗어나 자신만의 목소리로 자기가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경향이 보인다”(김경주)

“언어의 밀도가 경쾌하고 느슨해졌으며 일상 대화체에 가까운 작품이 많아졌다”(김중일)

December 8, 2018: 5:33 pm: bluemosesErudition

7. “성경말씀에 승복하지 않는 악마를 퇴치하려면, 비웃고 업신여기는 것이 상책이다. 악마는 경멸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틴 루터), “오만한 영(靈), 악마는 …… 놀림감이 되는 것을 참지 못한다.”(토마스 모어)

16. 우리 악마들이 주간지를 비롯한 다양한 무기를 사용해서 상황을 역전시켰지. 그 덕분에 네가 만은 환자만 해도 어려서부터 수십 가지의 상충되는 철학들이 한꺼번에 머리 속에서 난장판을 벌이는 데 익숙해져 있는 게야. 그래서 어떤 교리를 보아도 ‘참’이냐 ‘거짓’이냐를 먼저 따지기보다는 ‘학문적’ㅇ냐 ‘실용적’이냐, ‘케케묵은’ 것이냐 ‘새로운’ 것이냐, ‘인습적’인 것이냐 ‘과감한’ 것이냐를 따지게 되어 있지. 그러니까 환자를 교회에서 멀리 떼어 놓기에 가장 좋은 협력자는 논증이 아니라 전문용어란 말이다.

28. 환자가 어머니의 영혼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란 게 워낙 조잡한데다가 틀리기 일쑤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가상의 인물을 놓고 기도한다고 봐야 한다. 네가 할 일은 이 가상의 인물을 진짜 어머니 - 아침 식탁에서 매일 잔소리를 해대는 노인네 - 로 부터 날마다 조금씩 더 멀어지게 만드는 거야.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가상의 어머니를 위해 기도할 때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이 실제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로 이어지지 못하도록 깊은 틈을 갈라 놓을 수가 있지. 내가 맡은 환자 중에는 아내나 아들의 ‘영혼’을 위해서는 열렬한 기도를 쏟아 놓다가도, 진짜 아내나 아들에게는 기도하던 그 자리에서 곧바로 욕설과 폭력을 서슴지 않는, 무척 길이 잘 든 인간들이 있었다.

70. 수치심을 파괴하는 데 농담보다 더 훌륭한 수단은 없지. 자기가 지불해야 할 것을 단순히 남에게 미루는 사람은 ‘치사한 인간’이 되지만, 졸지에 당한 친구들을 놀리면서 농담으로 자신의 성공을 으스대는 사람은 ‘재미있는 녀석’이 된다구. 단순히 비겁하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야. 하지만 우습게 과장하고 괴상한 몸짓을 해 가며 으스대면, 비겁함도 재밋거리로 둔갑시킬 수가 있지. 잔인성도 마찬가지다. 자기의 잔인성을 노련한 농담으로 포장해 버릴 수만 있자면 전혀 수치심을 느낄 필요가 없어. 그러니까 인간을 지옥으로 떨어뜨리려고 할 때, ‘매사를 농담으로 처리할 수만 있다면 동료들에게 비난은커녕 경탄까지 받아가며 내가 원하는 것들을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야말로 수천 마디 음담패설이나 신성모독보다 훨씬 더 쓸모 있는 게야.

71. 경박한 인간들은 늘상 농담이 이미 만들어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거든. 사실은 그 누구도 농담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서 말이지. 그러면서도 심각한 주제를 놓고 토론할 때 자기는 이미 거기에서 우스운 부분을 찾아냈다는 냄새를 피우는 게야. 이런 상태를 오래 끌 수만 있다면 경박함이 습관으로 굳어져서, 마치 갑옷처럼 인간의 온몸을 둘러싸게 된다. 내가 아는 한 이건 원수의 공격을 막아 내기에 최고로 좋은 철갑이야. 더구나 경박함은 다른 웃음의 근원들과 달리 위험요소가 전혀 없지. 기쁨과 한참 떨어져 있는데다가 지성의 날을 벼리는 대신 무디게 만들며, 그렇다고 함께 웃는 사람들 사이에 애정을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니거든.

79~80. 그 작자는 이 조그만 버러지들을 진짜로 좋아하기 때문에 한 마리 한 마리의 차이에 터무니없이 큰 가치를 부여한다는 걸 명심해야지. 원수가 자아를 버리라는 건 아집으로 소리치고 주장하기를 그만두라는 뜻에 불과하다. 그래서 인간들이 아집을 버리고 나면 진짜 각자의 개성을 전부 돌려준다구. 원수는 인간이 온전히 그의 것이 될 때, 그 어느 때보다 더 진정한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큰소리친다(불행히도 이건 원수의 진심이지).

83~86. 너는 환자가 겸손의 진정한 목적을 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겸손이란 자기 자신을 아예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성격에 대해 특정한 형태의 의견(즉 낮은 평가)을 갖는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라구. (중략) 원수는 인간이 ‘나의 가치’라는 주제에 마음을 두지 않게 하려고 총력을 기울일 게다. 그는 인간이 자신을 별 볼일 없는 건축가나 시인으로 폄하하려고 애쓰느라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 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위대한 건축가나 위대한 시인으로 생각한 다음 그에 대해 잊어버리는 편을 더 좋아할 거라구. 따라서 네가 환자에게 허영심이나 거짓 겸손을 불어넣으려 들라치면, 원수 편에서 즉각 ‘사람이 자기 재능에 대한 의견을 피력해야 할 입장에 처한다는 건 그리 흔치 않은 일’이라는 점을 분명히 일깨우며 반격을 개시할 게다. 명예의 전당에서 자신의 서열이 정확히 몇 번째쯤 되는지 굳이 생각해 놓지 않아도 능력을 최대한 계발하는 데엔 지장이 없다는 거지. 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환자가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95~96. 그 목사의 견해는 너무나 광범위해서 종종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지. 하루는 공산주의자에 가까운 말을 하는가 하면, 다음 날엔 신정주의적 파시즘에서 멀지 않은 말을 해 대니 왜 안 헷갈리겠어. 하루는 스콜라 철학자가 되었다가 다음 날엔 인간 이성을 통째로 부인해 버리기도 하고, 하루는 정치에 푹 빠졌다가 다음 날엔 세상 나라는 똑같이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고 단언하거든. 우리 눈에야 이런 상반된 생각의 연결 고리가 바로 증오심이라는 사실이 훤히 보이지. 스파이크 목사는 부모와 친구들이 놀라고 슬퍼하고 당황스러워하고 수치심을 느끼게끔 잘 계산해 놓은 말이 아닌 한, 설교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인간이다. 그는 자기 부모와 친구들이 수용할 만한 설교란 누구나 읊을 수 있는 맥빠진 시(詩)나 같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 목사한테는 앞날이 창창한 부정직의 낌새도 있다. 우리는 요즘 “최근에 매리튼인가 누군가 하는 사람 책에서 읽은 것 같은데”라고 해야 할 말을 “교회의 가르침은”이라고 말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중이야. 하지만 치명적인 결함도 한 가지 있다. 그의 믿음만큼은 진짜라는 것, 바로 이 점이 모든 걸 망칠 수도 있어.

122~123. 이제 너도 알아챘겠지만, 제 마음대로 쓸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시간을 느닷없이 빼앗겨 버리는 것만큼 화내기 쉬운 상황은 없다. 뜻하지 않은 손님이 왔다거나(한적한 저녁시간을 보내길 고대했는데), 친구의 아내가 마구 수다를 떤다거나(친구와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하는 작은 일들이 환자의 절제심을 무너뜨리지. 이 일 자체만 놓고 본다면야 네 환자도 이런 사소한 결례를 참지 못할 만큼 무자비하거나 나태한 인간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화를 내는 이유는 자기 시간은 그야말로 자기 것인데 도둑 맞아 버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러니 너는 열심을 다해 ‘내 시간은 나의 것’이라는 그 기묘한 전제가 환자의 마음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꼭 틀어막아야 한다. 마치 자신이 하루 24시간의 합법적인 소유자로서 매일의 삶을 시작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라구.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은 자기 재산에서 억지로 떼어 주어야 하는 부담스런 세금으로 여기게 하고, 종교적 의무들에 할애하는 시간은 너그러운 기부금으로 여기게 하거라. 단, 이런 차액들을 제하기 전의 전체 시간은 ‘어떤 불가해한 의미에서 내가 타고난 개인적 권리’라는 믿음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 인간은 시간 중에서 단 한 순간도 만들어 내거나 붙들어 둘 수 없다. 시간이란 순전히 선물로 주어진 것이지. 시간이 저희들 것이라면 해나 달도 저희들 소지품이게?

129. 그 집과 그 집 정원은 하나의 거대한 외설이야. 어떤 인간 작가가 천국을 묘사한 내용과 메쓰거울 정도로 닮아 있지. “오직 생명만 있는 곳, 그리하여 음악 아닌 것은 모두 침묵인 곳.”

152~154. 형식적이고 율법주의적이고 명목뿐인 ‘비이기주의’가 하나의 규칙 - 감정적 자원은 이미 고갈되었는데 영적인 자원은 아직 확장되지 못한 탓에 지키지 못하게 된 규칙 - 으로 일단 자리만 잡는다면, 그야말로 유쾌하기 짝이 없는 결과들이 줄줄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두 사람이 함께 뭔가를 하려고 의견을 나눌 때마다, A는 A대로 B는 B대로 각자 자기 바람은 제쳐 둔 채 상대방의 뜻을 지레짐작해서 편들어 주는 게 의무처럼 되어 버리거든. 그런데 문제는 상대방이 뭘 진짜 바라는지 알아 낼 수 없을 때가 자주 있다는 거야. 운이 좋으면 둘 다 전혀 바라지 않던 일을 해 놓고도 자기 의(義)에 취해서 만족하며, 자신의 비이기주의에 합당한 특별 대우를 은근히 기대할 뿐 아니라 상대방이 자기의 희생을 너무 간단히 받아들인다는 불만까지 슬쩍 품게 할 수 있지. 일이 이쯤 되면 ‘아량 싸움 망상증’이라고 부를 만한 공작에도 도전해 볼 수 있다. (중략) 만약 처음부터 각자 자기 뜻을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면 이성과 예의라는 테두리를 지킬 수 있었겠지. 그러나 이 의견 충돌은 제 뜻을 고집하느라 생긴 게 아니라 거꾸로 상대편의 뜻을 고집하느라 생긴 것이거든. 이렇게 자신들이 실천하고 있는, 또는 적어도 변명으로 삼을 수 있는 명목상의 형식적인 ‘비이기주의’의 그늘에 가려 버린 형편이니, 실상 이 모든 분노는 좌절된 자기 의와 고집과 지난 10년 간 쌓여 온 불만에서 나온 거라는 사실을 알아챌 리가 있나. 물론 쌍방 모두 상대편의 비이기주의가 싸구려에 불과하다는 점과 그로 인해 자신이 그릇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점은 아무 민감하게 느끼고 있지. 그러면서도 멍청하게시리 정작 자기는 아무 잘못 없이 억울하게 이용당했다고 느끼거든. 사실 이 정도의 부정직성이야 인간에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만해. 어떤 분별 있는 인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비이기주의가 얼마나 많은 약감을 낳는지 안다면, 설교 단상에서 그것을 그렇게 자주 권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런 부류의 여자였다. 그런 헌신을 받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쫓기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는 말도 했지.

170. 겁에 질린 사람은 공포의 참담함을 상쇄하기 위해 증오라는 보상물을 애용하는 법이다. 따라서 두려움이 강할수록 증오도 심해지게 마련이지. 증오는 수치심에도 훌륭한 해독제 노릇을 해준다.

191. 하나님 외에 영원하고 자존적인 존재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과 반대가 되는 존재도 있을 수 없다. 그 어떤 존재도 하나님의 완전한 선에 대적하는 ‘완전한 악’을 얻을 수 없다. 어떤 존재에게서 온갖 종류의 선(지성, 의지, 기억력, 에너지, 존재 그 자체)을 전부 제거해 버린다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94. 성경에 따르면 천사의 방문은 언제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천사들은 “두려워 말라”는 말부터 해야 했다. 그런데 빅토리아 시대에 만들어진 천사들은 마치 “오냐, 오냐”라고 말할 듯한 인상을 준다. … 가장 좋은 것은 단테의 상징이다. 그가 묘사하는 천사들 앞에 우리는 경외감으로 엎드리게 된다. 존 러스킨이 제대로 지적했듯이, 단테가 묘사하는 악마들의 사나움과 악의와 음란함은 밀턴의 악마들보다 훨씬 더 실제에 가깝다. 장엄한 풍모에 훌륭한 시까지 구사하는 밀턴의 악마들은 해롭기 그지없으며, 그가 묘사한 천사들은 호모와 라파엘에게 지나치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진짜 위험한 이미지는 괴테의 메피스토펠레스이다. <파우스트>에서 집요하고도 병적으로 자아에 집착 - 이것은 지옥의 표지이다 - 하는 쪽은 악마가 아니라 파우스트이다. 유머 있고 세련되며 지각 있고 융통성 있는 메피스토펠레스는 악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환상을 강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194~195. 보잘것없는 사람도 때로는 거장이 저지른 단 하나의 실수를 피할 수 있는 법이므로, 나는 악마의 상징을 선택할 때 적어도 괴테가 범했던 잘못은 피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유머는 균형감각과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능력에서 나오는 법이다. 그 밖의 특징이라면 교만 때문에 죄를 지은 이 존재들에게 얼마든지 부여해줄 수 있겠지만, 이 특징만큼은 부여해서는 안 된다. 체스터튼의 말대로, 사탄은 심각함(force of gravity) 때문에 실패했다.

196~197. 나는 이 상징 덕분에 지상에 있는 지옥의 유사물로서, 두려움과 탐욕으로만 똘똘 뭉친 관료 사회를 그려낼 수 있었다. 겉으로는 통상적으로 서로 정중하게 대한다. 상관을 무례하게 대하는 것은 분명한 자살 행위이며, 동료를 무례하게 대하는 것은 방심한 틈을 타 그이 허를 찌를 기회를 놓치게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전 조직체를 움직이는 원리는 ‘먹느냐 먹히느냐’이다. 모두가 자기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망신을 당하고 좌천되고 파멸하기를 바란다. 모두가 기밀문서의 전문가이며, 동지인 척하다가 등 뒤에서 칼 찌르는 일에 능숙하다. 겉으로는 깍듯이 예의를 지키고 존경의 마음을 표현하며 서로의 업적을 ‘치하’하지만 이것은 허울에 불과하다. 가끔씩 그 허울이 찢어지면, 서로에 대한 광포한 적개심이 본색을 드러내며 터져 나온다. 이 상징은 악마들이 ‘악’ 그 자체를 사심 없이 추구한다는 터무니없는 환상을 제거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내 상징에서는 허깨비가 허용되지 않는다. 악한 천사는 악한 인간처럼 실리밖에 모르는 존재이다. 그들은 두 가지 동기로 행동한다. 첫째는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다. 전체주의 국자에 고문실이 있듯이, 내가 묘사하는 지옥에도 ‘무능한 악마를 위한 교도소’ 같은 더 깊은 지옥이 있다. 둘째 동기는 일종의 굶주림이다. 나는 악마들이 영적인 의미에서 서로를 잡아먹을 수 있으며, 우리 인간도 잡아먹을 수 있는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인간들의 삶 속에서도 같은 인간을 완전히 제 것으로 소화시키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지배의 열망을 보곤 한다. 그들은 상대방의 지적인 삶과 정서적인 삶 전체를 단지 자신의 연장선상에 두고자 한다. 즉 자기 자신뿐 아니라 상대방을 통해 자기의 증오심을 발산하며, 자기의 불만을 터뜨리고, 자기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려 드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열정을 펼칠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열정을 억눌러 버린다. 그리고 혹시라도 여기에 저항하는 사람은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

_ C. S. 루이스, 김선형(역),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홍성사, 2000.

December 6, 2018: 10:39 am: bluemosesErudition

“Be watchful, stand firm in the faith, act like men, be strong. Let all that you do be done in love.”

December 5, 2018: 1:37 am: bluemosesErudition

황금 맨부커상 수상작. 마이클 온다치의 “잉글리쉬 페이션트”

: 1:29 am: bluemosesErudition

김박사 넷, 스튜디오 샤

December 4, 2018: 12:11 pm: bluemosesErudition

“서비스가 활성화되면 24시간 운영되는 매장에서 언제든 주문을 받고 즉시 배송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현되면서 유통의 개념을 바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