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August, 2018

August 30, 2018: 11:52 pm: bluemosesErudition

현상학적 환원 _

“판단중지, 괄호치기, 배제 등의 개념은 현상학적 환원을 표현하기에 적절하지 않음. 부정적이며 소극적임. 환원은 어떤 태도를 취하면서 그 태도 속에서 드러날 수 있는 새로운 사태를 보여주는 적극적인 수단임”

태도 변경. 대상의 본질을 향한 조응. 어떠한 사태를 그 자체로 수용하기 위한 관점의 전환. 대상을 대상의 본질에 맞게 파악하기 위한 일차적인 방법적 조치. “어떤 특정한 유형의 사태들은 어떤 특정한 유형의 태도에서 경험되는 것이며, 따라서 어떤 특정한 유형의 사태들로 귀환한다 함은 그에 대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특정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의미함”

: 11:43 pm: bluemosesErudition

소명. 합당하게 사는 것, 사명. 복음을 전하는 것

: 11:36 pm: bluemosesErudition

상호주관적 명증성. 간주관성. 많은 주관(主觀) 사이에서 서로 공통적인 것이 인정되는 성질

: 10:33 am: bluemosesErudition

“단어를 단어처럼 느끼게 해주는 것”(로만 야콥슨)

August 29, 2018: 11:08 am: bluemosesErudition

“Wait for the Lord; be strong, and let your heart take courage; wait for the Lord!”(Psalms 27:14)

August 28, 2018: 11:02 am: bluemosesErudition

판단할지라도 말하지 않겠다.

August 27, 2018: 10:52 am: bluemosesErudition

조 디마지오의 헌화

: 1:28 am: bluemosesErudition

4. “좋은 시는 좋은 독자를 만나야 비로소 그 좋음을 완성한다는 생각이 든다.”(심보선)

11. “나는 너 없이 살 수 없다고는 말 못하겠다. 이렇게 살아 있으면서.”(조지프 브로드스키, <두 번째 크리스마스>)

14.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은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박준, <환절기>)

19. “매혹을 묘사한다는 것은, 결국 ‘난 매혹되었어’라는 말을 초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금이 간 레코드마냥 그 결정적인 말밖에 되풀이할 수 없는 언어의 맨 마지막에 이르면…”(롤랑 바르크, <사랑의 단상>)

50. 롤랑 바르트는 말했어요.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93. 에밀 시오랑은 말했습니다. “인간은 재앙을 분비한다.”

99. 칸트는 음악에 대한 불평이 대단했습니다. 그의 유명한 책인 <판단력 비판>에서 음악은 매우 세련되지 못한 예술이라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이유는 음악이 사람들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이웃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었어요. 회화와 같은 시각예술은 그 인상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면 눈만 돌리면 되지만 음악은 듣고자 하지 않는 사람의 자유까지 방해한다나요. 누군가 향수를 뿌린 손수건을 호주머니에서 꺼내면 주변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냄새를 맡아야 하는 것처럼 음악은 감상을 강요한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칸트는 옆집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철학적 사색을 방해받아 분개하는 날이 많았다는 일화도 있어요.

133. 에리히 아우어바흐는 <미메시스>라는 책에서 호메로스가 그린 그리스의 영웅들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매일 아침이 마치 그들 삶의 첫날인 듯 일어나는 이들.”

149. 키에르케고르가 말했어요.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을 고귀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그것은 그것을 가진 사람의 삶 전체에 어떤 의무를 부여하지만, 물론 그 의미는 그 사람 자신만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처해 있는 환경에 대한 모든 헛된 관심으로부터 그를 구한다.”

171. 『맹자』 「양혜왕」편에는 아주 유명한 일화가 하나 실려 있습니다. 당시에는 종을 만들면 신성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려고 ‘흔종(釁鍾)’하는 풍습이 있었대요. 짐승을 죽여 그 피를 종에 바르는 것입니다. 어느 날 흔종을 위해 소가 구슬피 울며 끌려가는 것을 본 왕은 신하에게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명합니다. 소나 양이나 죄 없이 죽기는 마찬가지인데 정말 이상한 명령이죠. 그러나 이상하지 않습니다. 본 것과 보지 않은 것의 커다란 차이, 보고 나서는 차마 어찌할 수 없는 마음 때문이지요.

211. 카프카가 어렵다고 불평하는 학생들에게는 열다섯 살부터 지독한 책벌레였던다던 그의 편지를 읽어주기도 합니다. “한 권의 책, 그것은 우리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와 같아야 한다.” 그런 충격적인 일격을 당하면, 이 삶을 처음부터 써내려갈 수 있을까요? 누군가는 다시 쓸 수 없어서 인생은 소설보다 훨씬 더 어려운 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다시 쓸 수 있어 삶도 소설처럼 심오하고 아름답다고 믿는 시인에게 저는 한 표!

231. 보들레르는 말했습니다. “건장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틀간 먹지 않고 지낼 수 있다. 그러나 시 없이는 절대로!”

247. 권혁웅 시인이 『몬스터 멜랑콜리아』라는 책에서 사랑하는 두 사람에 관해 한 말이 떠오릅니다. “엿듣는 사람이 없을 때에도 둘은 귓속말을 주고받을 것이다. 비밀의 참된 비밀은 그 형식에 있지 내용에 있지 않다.”

249. 철학자 레비나스는 우리가 타인의 얼굴과 마주하는 순간 윤리적 사건이 발생한다고 말했습니다. 너무나 연약하고 부드러워서 고통을 주는 얼굴이 있다는 거예요. 아무런 보호막도, 기득권도 없는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의 얼굴이 던지는 호소에 우리는 상처받고 박해당한다고 합니다.

259. 크리스티앙 보뱅은 말하네요. “스무 살에, 우리는 세상의 중심에서 춤춘다. 서른 살에, 우리는 원 안을 떠돈다. 쉰 살에, 우리는 안쪽으로든 바깥쪽으로든 쳐다보지 않고 원 주위를 걸어 다닌다. 이후에는 중요하지도 않다. 아이들과 노인들의 특권. 우리는 투명인간이다.”(<다가올 여인La Femme à venir>)

268. “내가 너를 / 그 모든 성공과 실패보다 더 사랑한 것은, / 너와 함께 있으면 / 누르스름한 흰 빛이 하얗게 되기 때문이었다.”(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칠 조심>)

272. 괴테는 1820년 로베라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입니다. 누구나 한번은 따듯한 감정의 천국에서 추방되기 때문이죠.”

_ 진은영, <詩時하다>, 예담, 2016.

: 1:03 am: bluemosesErudition

“마르케스는 늘 새벽에 일어나 ‘손이 식기 전에’ 글을 쓴다고 했다.”

August 26, 2018: 4:18 pm: bluemosesErudition

기도와 통곡, 하나님 앞에서 울다, “기도를 들었고 눈물을 보았다”(왕하 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