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ur moi, j’avoue qu’aussitôt que la religion chrétienne découvre ce principe : que la nature des hommes est corrompue et déchue de Dieu, cela ouvre les yeux à voir partout le caractère de cette vérité. Car la nature est telle, qu’elle marque partout un Dieu perdu, et dans l’homme et hors de l’homme. Et une nature corrompue.” _ Pascal, Pensées, §708.
“나로서는 기독교가 “인간들의 본성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이 원리를 알려주자마자, 이것은 곳곳에서 이 진리의 성격을 알 수 있도록 내 눈을 열어 주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왜냐하면 자연은 사실이 그러하여 인간의 내부에서나 외부에서나 어느 곳에서나 상실한 하나님을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락한 본성을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_ 파스칼, 김형길(옮김), <<팡세>>, 서울대출판부.
“[152] 모든 존재를 삼켜 버리는 무의 심연으로서 순수한 개념 즉 무한성은 [유한한 것의] 무한한 고통을 순수하게 최고 이념의 계기로 나타내야 하는데, 그렇다고 그 계기 이상의 것으로 나타내어서는 안 된다. 이 무한한 고통은 이전에는 다만 문화 속에서 역사적으로 존재했을 뿐이며, “신 자신이 죽었다”는 감정으로 존재하였다. 최근의 종교는 이런 감정에 의존하고 있다. (경험적으로 언표되기는 하였지만, 파스칼Pascal의 다음 표현들이 뜻하는 것도 말하자면 이와 같은 감정이다. “La nature est telle, qu’elle marque partout un Dieu perdu, et dans l’homme et hors de l’homme.”) 그리고 순수한 개념 즉 무한성은 [이런 감정을 최고 이념의 계기로 삼음으로써] 경험적인 존재의 희생을 지시하는 도덕적인 명령이나 형식적 추상의 개념이었던 것에 철학적인 실존을 부여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순수한 개념, 즉 무한성은 철학에 절대적 자유의 이념과 더불어 절대적인 수난을 회복시켜야 한다. 말하자면, 이전에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그리스도의 수난의 날 대신에 사변적인 그리스도 수난의 날을 재건하고, 그리스도 수난의 날 자체를 전체의 진리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가혹함 속에서 사변적으로 복구해야 하는 것이다. 독단적인 철학들과 자연 종교들의 매우 명랑하고 근거에 훨씬 구애받지 않으며 좀 더 개별적인 모양들은 사라져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최고의 총체성은 오로지 이런 가혹한 버림받음[의 의식]으로부터만 아주 진지하게, 그리고 가장 깊은 바닥에서부터 동시에 모든 것을 아우르면서, 자기 형태의 가장 명랑한 자유로 상승하면서 부활할 수 있고 부활해야만 한다.” _ 헤겔, 황설중(옮김), <<믿음과 지식Glauben und Wissen>>, 아카넷.
“Unsere Betrachtung ist insofern eine Theodizee, eine Rechtfertigung Gottes, welche Leibniz metaphysisch auf seine Weise in noch unbestimmten, abstrakten Kategorien versucht hat, so daß das Übel in der Welt begriffen, der denkende Geist mit dem Bösen versöhnt werden sollte. In der Tat liegt nirgend eine größere Aufforderung zu solcher versöhnenden Erkenntnis als in der Weltgeschichte. Diese Aussöhnung kann nur durch die Erkenntnis des Affirmativen erreicht werden, in welchem jenes Negative zu einem Untergeordneten und Überwundenen verschwindet, durch das Bewußtsein, teils was in Wahrheit der Endzweck der Welt sei, teils daß derselbe in ihr verwirklicht worden sei, und nicht das Böse neben ihm sich letzlich geltend gemacht habe.” _ Hegel, 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 S. 28 (Theorie Werkausgabe Werke, Bd. 12)
“우리의 고찰은 그런 한에 있어서 神義論, 辯神論이거니와, 이는 Leibniz가 형이상학적으로 자신의 방식으로 아직은 무규정적인 추상적인 범주로 시도했던, 그에 따라 악이 세계 속에서 포착되고 사유하는 정신이 악과 화해할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사실상 세계사 이외의 어디에도 그러한 화해하는 인식에 대한 요구보다 더 큰 요구는 없다. 이러한 화해는 저 부정적인 것을 종속적인 것과 극복된 것으로 소멸시키는 긍정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만, 한편으로는 참으로 무엇이 세계의 궁극목적인가, 한편으로는 궁극목적이 세계에서 실현되고 악은 결국 궁극목적과 나란히 타당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의식을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다.”
* 무한자와 유한자의 화해, 신앙과 지식의 사변적 통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