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내가 왜’ 이 책을 읽는가를 스스로에게 묻지 않으면 독서는 시간낭비입니다.”
외화빈질을 삼가기로 결심하다.
“‘도대체 내가 왜’ 이 책을 읽는가를 스스로에게 묻지 않으면 독서는 시간낭비입니다.”
외화빈질을 삼가기로 결심하다.
1.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상태에 들어가지 않고 새로운 야만상태에 빠지는가.” “아도르노는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다’라는 테제와 ‘계몽은 신화로 되돌아 간다’라는 테제를 결합함으로써 자연지배의 논리와 문명의 논리를 동일하게 파악한다.”
2. “아도르노는 고통(Leiden)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인간의 역사를 관통해 보고자 한다. … 아도르노는 고통의 원역사를 재구성하는 주도개념을 자연지배에서 찾는다. 아도르노에게 인간의 역사는 자연지배의 역사인 동시에 자연지배의 논리를 인간의 전 영역에 구현함으로써 보편적 고통의 경험을 감당하는 역사다.” … “그렇다면 내적 자연의 지배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외적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인간이 합리적 사고와 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인간의 내적 욕구와 욕망에 대한 억제와 통제를 의미한다.”
3. “<역사와 계급의식>의 독해를 통해 아도르노는 사물화 문제를 자본주의의 핵심문제로 인식하게 된다.” “모든 관계가 교환법칙에 따라 매개되고 … 사회적 총체성이 작동하는 사회에서 … 개인이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떠한 자기보존(Selbsthaltung)도 할 수 없다. 노동 분업에 의해 전일화된 사회적 지배에서 벗어날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다시 말해,] 사회의 억압적 성격으로 인해 ‘자기 주도적 독립성을 허용하는 사회적 공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4. 아도르노가 제안하는 비동일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 비동일성은 동일성을 지양하거나 대체하는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유하는 존재에게 동일성 사고는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아도르노는 “사고한다는 것은 동일화하는 것이다”라는 헤겔의 주장을 수용한다. 이는 사유에 있어 동일성 계기를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불가피한 동일성의 논리적 강압을 분쇄하기 위해서 동일성의 관점에서 비동일성을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비동일성의 관점에서 동일성을” 고찰해야 한다. … “아도르노가 비동일성을 제안한 이유는 결국 동일성의 논리적 강압을 해체하면서 개별적인 것, 다양한 것의 공간을 열어주고 화해를 요구하기 위함이다. … 이 비동일성에 대한 일관된 의식이 바로 동일성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인 동시에 동일성을 꿰뚫고 비동일성이 존재한다는 의식의 활동으로서 부정변증법의 작동방식이다.”
5. “아도르노에게 부정변증법은 ‘개념을 비동일적인 것으로 이끌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사고모델이다. … 부정변증법적 사고모델은 대상을 인식할 때 개념의 운동인 동일성을 따르지 않고 대상을 구도(Konstellation) 속에서 파악하려는 대상 인식의 과정, 사고의 과정을 말한다. 대상 그 자체를 파악하려면 구도의 관계를 읽어내야만 ‘대상 자체의 특별한 것’을 읽어낼 수 있다.”
6. “아도르노에게 고통은 비논증적 형식을 통해서만 그 흔적을 읽어낼 수 있다. 예술의 중요성이 여기서 부각된다. … 예술은 그 자신의 현실 부정성과 고통스런 현실을 동일시함으로써 구체적이고 체험적으로 고통을 표현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술은 비개념적으로 고통을 드러내는 언어다. … 아도르노가 ‘예술작품을 무의식적 역사서술’이라고 말하는 것도, 예술이 지닌 고통의 비개념적 표현을 함축한다.” … “아도르노의 관점은 루카치식의 당파성을 강조하는 예술이론, 사실주의 예술, 브레히트의 문학작품, 한스 아이슬러의 민중선전가요 등이 사회적 진리내용을 작품 내재적으로 충실히 형상화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절하한다. 예술의 실천적 영향력은 구호와 웅변에 있는 것이 아니며 ’사물화할 수 없는 의식의 변화를 통해서 실천적인 영향력’을 갖는 것이다.”
7. “동일성 사고가 인식대상에 대한 인식주관의 지배계기를 함축한다면 미메시스적 태도는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의 친화관계, 화해의 계기를 함축한다.” … “미메시스는 자연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동일성 사고의 반대개념이며 … 양화된 외적 자연과 억압된 내적 자연을 기억해 내고, 주객 분리 이전의 인간이 자연을 경험하는 태도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는 개념이다. … 이 점에서 미메시스는 대상의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적 성격, 수단이 아닌 목적적 성격을 실천하는 인식적 태도다.” … “아도르노가 말하는 미메시는 신비한 어떤 것, 혹은 이성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아도르노에게 미메시는 개념적 사고 자체의 한 계기로 ’합리성을 비판하는 합리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합리성을 비판하는 합리성은 개념을 통해서가 아닌 미메시스적 표현을 통한 합리성의 표현, 즉 미메시스적[대상을 물화하지 않고, 사태 자체를 경험하게 하는] 합리성을 의미한다.”
* 아도르노는 [’야만상태’를 초래한] 물화의 근원을 자연지배에서 연유한 동일성 사고로 파악하여, 동일성 속 비동일성을 회복하기 위해 미메시스적 태도를 제안한다. 그리고 ‘고통’을 ’화해’로 전환시킬 계기이자 단초로서 예술[작품]을 거론한다. 그러나 야우스가 비판한 바대로 “예술경험이 수용자의 이해, 해석, 비판, 평가라는 작품과 관객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아도르노의 작품미학은 [’근대문학의 종언’과 같은 탈예술화는 차치물론하더라도] 예술의 자율성이 쌓은 성벽으로 인해 대중의 의식변화라는 실효성을 상실하고 만다.
“우리나라 박사 과정에 있는 후배들의 논문을 가끔 볼 때가 있다. 정말 미안하지만, 서베이 논문 이상은 아닌 경우가 많다. 간략한 테제 위에 세우든지 아니면 티끌 모아 태산 전략이든지 공부를 시작할 때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은 다 필요없는 것이라고 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미 남들이 알고 있는 것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고, [독자적] 공부를 통해서 찾아내거나 깨달은 것만이 비로소 자신의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출발을 해야 한 발이라도 나가게 된다. 그러나 그게 두렵기는 하다.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것처럼. 그렇지만 그런 일들을 몇 번 겪고 나야 비로소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이 정말로 뭐였는지를 알게 된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 그것은 남들이 이미 한 것인데, 그걸 쓸 필요가 있는가?’ 이 질문은 가혹한 질문이기는 한데, 이걸 받아들여야 비로소 독립한 한 명의 박사가 되거나 연구자가 된다. 그게 안되면 평생 ‘시다바리’다(우석훈).”
1. 연구문제
“문제는 오히려 거기에 있습니다. 프루동은 경제적 계급 대립을 해소하면, 그리고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하면 국가는 소멸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국가 그 자체가 자립성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것을 그는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사고도 계승했습니다. 그가 일시적으로 국가권력을 잡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통해 자본주의 경제와 계급 사회를 지양한다는 블랑키의 전략을 승인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즉 그가 국가권력 탈취를 지양했던 것은 국가주의적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바꾸려고 한다면 국가의 힘이 필요하고, 국가에 의해 자본주의 경제와 계급 사회를 지양하면 국가는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마르크스의 결함은 국가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의 자립성을 보지 않은 아나키즘에 있는 것입니다(25). …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어디까지나 자본=네이션=국가라는 매듭을 벗어나는 방법입니다(51).”
2. 국가의 기원과 자립성
“미개사회=공동체가 국가로 전환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그 안에서의 호수적 교환(친족구조)이 아니며 전쟁도 아닙니다. 먼저 바깥 국가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조건 및 수렵과 채집이 가능한 자연조건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58). … 실제 생산력이 오르고 잉여생산이 생겼기 때문에 국가가 형성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국가에 의해 관개에 기초한 집단적 농업 그리고 장시간 노동의 강제가 있고, 그 결과 생산력이 급격히 향상되었다고 말해야 합니다(59). … 국가의 성립을 공동체나 사회에서 보는 견해는 사실상 국가를 공동체나 사회로 환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관점은 마르크스주의자에서도 지배적입니다. 예를 들어 엥겔스는 국가를 계급 사회에서 지배계급이 지배를 하기 위한 기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도 국가가 공동체나 사회 속에서 생겨난다는 관점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를 그 내부에서 폐기할 수 있다는 사고로 인도됩니다. 즉 경제적인 계급을 폐기한다면 국가는 소멸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국가는 바깥 국가에 대해 존재하는 것이고 국가의 자립성은 그야말로 여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63~64). … 정리해보면 세계사는 다음과 같이 볼 수 있습니다. 중앙집권적 제국이 먼저 서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성립하고, 그 바깥(아주변)에서는 중핵 문명이나 제도를 받아들여가면서도 중심부의 집권적 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고전고대적인 도시국가와 제국, 그 아주변에 봉건적이라고 불리는 것이 발달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머지않아 중앙집권적 국가가 형성되었습니다. 그것이 상비군과 관료기구를 갖춘 절대주의 국가인데,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아시아적 국가가 이미 이룬 수준을 따라잡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75~76).”
3. 보편종교와 세계제국
“고대국가에서 종교는 알튀세르의 표현을 따르자면 그야말로 ‘이데올로기로서의 국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서는 통용되지 않습니다. 신에게 기도하더라도 국가는 전쟁에 패하며, 패하면 신도 패하는 것입니다. 신의 힘은 국가의 힘에 비례합니다. 이처럼 종교의 보편화는 국가의 보편화 즉 세계제국의 형성에 수반되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니체는 ‘세계제국으로의 진행은 항상 또 세계신으로의 진행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도 일신교의 출현을 세계제국이 다수의 부족이나 민족의 신들을 넘어서는 [유일]신을 갖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 즉 보편종교는 현실적으로 세계제국의 지배수단이 되고, 또 그 영토의 범위를 넘지 않는 것입니다(102). … 그런데 보편종교는 특별히 초월적인 인격신을 불가결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인격신을 부정하고 무의 장소를 강조한] 불교도 보편종교입니다. 이를 생각한다면 시사적인 것은 마르크스의 가치형태론입니다. 마르크스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것은 일반적 등가형태(화폐형태)이지 그곳에 위치하는 사물이 아닙니다. 금은 금이기 때문에 화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 등가형태라는 장소에 놓이기 때문에 화폐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초월적인 것은 신이 아니라 신이 놓인 장소입니다(106~107).”
4. 화폐경제와 절대왕정
“서유럽에서 이런 제국의 분해가 명료하게 되는 것은 절대주의 국가의 성립에서 입니다(164) … 그것은 근본적으로 화폐경제가 침투한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농노가 부역이나 연공을 돈으로 내게 될 경우, 영주-농노라는 봉건적 관계는 지주-소작인이라는 관계로 변형됩니다. 화폐경제의 침투는 이처럼 실질적으로 봉건적(경제외적) 강제를 무화시킵니다. 다른 한편 그와 같은 봉건제후를 억압한 왕은 영주들이 받아온 봉건지대를 독점하고 그것을 국가에 대한 조세로 변형시킵니다. 이와 같은 주권국가가 각지에서 생겨나게 될 때 서유럽의 세계제국은 해체되었다고 해도 좋습니다(165). 마르크스는 상품교환이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78).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품교환이 국가의 보호가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품교환은 상호계약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런 이행을 강요하는 힘은 국가에 있습니다(82). 앞서 서술한 것처럼,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는 생산물 교환보다도 약탈 쪽이 선행합니다. 때문에 상품교환이 성립하는 것은 약탈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에 한합니다(78). 교환이 성립하는 것은 약탈이 단념되는 장소에서 뿐입니다(82). 도시가 자립하고 상업이 발전한 것은 문명의 주변에 있으며 집권적인 국가를 가지지 않았던 서유럽의 봉건제에서 입니다(96). … 도시의 자립이란 국가나 교회의 권력과는 이질적인 힘이 자립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공동체나 국가를 넘어서서 통용되는 화폐의 힘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확대되어감에 따라 봉건제는 붕괴합니다. 그 결과 생긴 것이 절대주의 왕권국가 입니다. 왕은 [봉건제 당시에] 동격으로 나란히 존재했던 다수의 봉건적 제후를 제압하고 집권적인 체제를 구축했는데, 그때 도시의 부르주아와 결탁하여 봉건적 특권들을 폐기했습니다. 이때야 비로소 상품교환=화폐경제의 원리가 국가에 의해 승인된 것입니다(97).”
5. 사회계약과 민족국가
“그런데 국가는 정부와는 다른 것이고, 국민의 의지로부터 독립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124). 사회계약론에 의한 국가론은 국가를 내부에서 보는 것이며 국가와 정부를 혼동하는 것입니다(125). 예를 들어 혁명은 종래의 국가기구를 폐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바로 바깥으로부터의 군사적 간섭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혁명의 방위를 위해 종래의 군-관료기구에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종래의 국가기구가 보존되고 재강화되게 됩니다. 국가를 그 내부만으로 보는 사고는 국가를 지양하기는커녕 오히려 국가를 강화시킬 뿐입니다(134). 마르크스가 생각하기에 대표하는 자와 대표되는 자[들]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거기에 근대국가를 특징짓는 보통선거에 의한 대표제(의회)의 특질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계급들이 자신들의 대표에 등을 돌리고 보나파르트에게서 그들의 대표자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135). 이리하여 1848년 혁명의 시점에서 나폴레옹의 조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루이 보나파르트가 서로 대립하는 모든 계급-당파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136).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가 모든 계급에 대해 시원스럽게 증여함으로써 권위를 얻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보나파르트는 모든 계급에 대해 가부장적인 역할을 연기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계급에게서 빼앗아오지 않고는 어느 계급에도 베풀 수 없다.’ 보나파르트는 약탈한 것을 재분배하고 있는 것인데도 그것이 증여로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모든 계급에게 증여하는 초월자, 즉 황제로서 표상되었습니다(137). [즉,] 각 계층의 요구를 각각 어느 정도 만족시켜주면서 프랑스를 네이션=스테이트로서 통합했습니다(189). 그러나 이 과정은 국가기구에 의한 약탈-재분배라는 메커니즘이 증여-답례라는 호수의 표상 하에서 기능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137). [이처럼] 네이션이란 상품경교환경제에 의해 해체되어 있던 공동체의 ‘[공상이 아닌]상상적’ 회복에 다름 아닙니다(171).”
6. 어소시에이션이즘과 세계공화국
“어소시에이션이즘은 상품교환 원리가 존재하는 도시적 공간에서 국가나 공동체의 구속을 거부함과 동시에 공동체에 있던 호수성을 고차원적으로 회복하려는 운동입니다. 그것은 앞서 서술한 것처럼 ‘자유의 호수성(상호성)’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즉 칸트적으로 말하면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목적으로 다루는’ 사회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칸트가 이와 같은 생각을 보편종교 ‘비판’을 통해 얻었다는 것입니다(183~184). [물론,] 칸트는 종교를 승인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가 도덕적 법칙(자유의 상호성)을 개시하는 한에서 입니다. 그는 그와 같은 종교를 역사적인 종교에 대하여 순수이성종교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자에 기초하여 ‘세계시민적인 도덕적 공동체’가 실현된다면, 역사적인 종교 제도 또는 성직자 제도는 폐기될 것이고 주장합니다. 말하자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언급한] ‘신의 나라’가 실현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칸트는 이런 세계시민적인 도덕적 공동체는 정치적-경제적 기반이 밑바탕에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는 그것을 매우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칸트가 말하는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목적으로서 다루라’는 도덕법칙은 자본주의에서는 실현불가능합니다. 화폐와 상품(자본과 임노동)의 비대칭성이 존재하는 한, 그것에 놓인 개인은 부득이하게 타자를 수단으로만 다루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국가에 의한 통제나 부의 재분배에 의해 자본주의가 야기한 계급적 격차를 해소하려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계급격차를 야기하는 시스템 그 자체를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185). 그것은 … 애초에 부의 격차가 생기지 않는 교환시스템을 실현하는 것입니다(186). 그 점에서 프루동이 사회주의자가 일반적으로 부정한 경쟁을 긍정한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191). 프루동은 사유를 반대함과 동시에 많은 사회주의자가 주창하는 공유(국유)도 반대했습니다. 그가 사유와 공유라는 안티노미를 넘어서, 그 어느 쪽도 아닌 소유형태로서 발견한 것이 [자유의] 호수성(상호성)입니다(192). [’독일의 프루동’인 포이어바흐와 마찬가지로] 청년 헤겔파 중 한명인 마르크스도 사회주의에 관하여 처음부터 프루동의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고는 전 생애에 걸쳐 바뀌지 않았습니다. 공산당 선언에서도 그는 공산주의는 ‘자유로운 어소시에이션’의 실현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로 프루동파에 의해 이루어진 파리코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연합한 협동조합조직 단체들을 조정하고, 그리하여 그것을 단체들의 컨트롤하에 두어 자본제 생산의 숙명인 부단한 무정부 상태와 주변적인 변동을 끝내게 한다면, 여러분 그것은 공산주의’ 가능한 공산주의가 아니겠습니까?(194) 마르크스는 국가에 의해 협동조합을 육성하는 것이 아니라, 협동조합의 어소시에이션이 국가를 대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196). 그러나 그것에 의해 국가가 지양되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197). 왜 국가를 그 내부에서 지양할 수 없을까요? 그것은 국가가 그 외부와 관계함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입니다(199). 여기서 열쇠가 되는 것은 … 무시되어 왔던 칸트의 ‘세계공화국’이라는 이념입니다. 이것은 국가들이 주권을 양도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입니다(203).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구성적 이념이 아닌 규제적 이념에 의거] 각국에서 군사적 주권을 서서히 국제연합에 양도하도록 하여, 그것을 통해 국제연합을 강화-재편성하는 것입니다. … 각국에서 이와 같이 주권의 방기가 이루어지는 것 외에 국가를 지양하는 방법은 없습니다(225).”
7. 추기
가라타니 고진은 시종일관 자본=네이션=국가를 보로메오의 매듭이라 목청만 높일 뿐, 그것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돼 있는지 <세계공화국으로>에서도 논증하지 않고 있다. 또한 다소 김새는 결말이 ‘어떠한 방식으로 묶여있는지도 모르는 매듭의 결박을, 어떻게 지구적 차원에서 끊어내야할지’ 답답함을 가중시킨다. 그러나 ‘긴급하고 절실한 문제’에 대한 노학자의 부단한 이동은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한다.
“Each one of here today will at one time in our lives look upon a loved one who is in need and ask the same question: We are willing help, but what, if anything, is needed? For it is true we can seldom help those closest to us. Either we don’t know what part of ourselves to give or, more often than not, the part we have to give is not wanted. And so it is those we live with and should know who elude us. But we can still love them - we can love completely without complete understanding(Rev. Maclean).”
<<무인 곽원갑>> 역시 예외가 아니다. 정무문 계열의 영화들은 ‘동양병부’로 놀림받던 상처입은 중화주의의 형해화된 반제투쟁을 고취할 뿐이다. 동서 제국주의의 각축장에서 정의를 표방하는 영웅에게 눈물짓는 소아병은 딱 질색이다.
“제일 무서운 사람들은 매일 한 권씩 책을 읽는 엔지니어들이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실험 중인 경우가 많다. 실험실에서 한 권씩 읽어대는 엔지니어들은 당할 재간이 없다. 1주일만에 만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고, 한 달만에 만나면 알아보기가 어렵다. 아니 저 사람이 한 달 전에 나에게 그런 촌스러운 질문을 했던 사람이란 말인가?”
“그보다 더 무서운 사람들은 매일 책 한 권씩 읽는 고등학생들이다. 그 질문에는 당해낼 도리가 없는 데다가, 기억력은 또 어찌나 좋은지. 잘못된 대답을 해줬다가는 한 달 후에 곤경을 치룰 각오를 해야 한다. … 언젠가는 놀라운 사람이 되어서 나의 앞에 나타날 것인데, 그 때 왜 나에게 거짓말 했느냐는 당혹스러운 순간을 맞지 않기 위해서는 도망가는게 최고다(우석훈).”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읽으면 너의 마음이 열릴 것이다.’ 나의 스승 로스트로포비치 선생님의 부인 갈리나가 해준 말이다. 그때 난 열두살이었다.” “나도 내가 느낄 수 있는 만큼만 느끼고 이해하듯이, 어린이도 나름대로 어떤 느낌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런 명작들은 독자의 그릇 크기에 관계없이 어떤 충격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그런 충격을 통해 나의 그릇이 성장하고, 그 책을 다시 읽거나 다른 책을 읽었을 때 더 큰 감동을 받는 것이다.”
“내용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단어 공부도 열심히 했고, 문장의 형태부터 표현력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많은 영어의 비밀을 자연스럽게 흡수했다. …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어휘와 표현은 언어 자체의 폭에 비해 너무나도 좁다. 표현력이 좁은 만큼 우리의 생각도 단순해지는 건 아닐까. 책을 통해 언어의 풍요로움을 접한다면 우리의 시각이 더욱 넓어지고 성장하리라 믿는다. 또 이런 과정을 통해 인생을 풍요롭게 사는 지름길을 찾게 되리라 믿는다(장한나).”
1. “인간의 자기 소외인 사유재산의 적극적 지양으로서, 그리고 따라서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적 본질의 현실적 획득으로서 코뮤니즘. 그러므로 사회적, 다시 말해서 인간적 인간으로서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서의 완전한, 의식적인, 그리고 지금까지의 발전의 부 전체 내부에서 생성된 귀환하는 것으로서 코뮤니즘(p.127).”
2. 사유재산의 진정한 의미는 사적 소유 자체의 법적 형식에 내재하는 사회적 분할에서 찾아야 한다. 소외의 귀결인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 즉 사회의 사사화는 사유재산의 적극적 지양, 곧 인간적 본질의 실질적 전유를 통해서만 부정될 수 있다. 역사의 해결된 수수께끼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가는 현실적 운동이다.
3. “진보는 사회적 생산성의 인간적 내용이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미래(코뮤니즘)의 관점에서만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