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심이 늦추어졌다.
Do not love the worldly things
Malachi 3:10 ESV
Bring the full tithe into the storehouse, that there may be food in my house. And thereby put me to the test, says the Lord of hosts, if I will not open the windows of heaven for you and pour down for you a blessing until there is no more need.
Hebrews 13:5-6 ESV
Keep your life free from love of money, and be content with what you have, for he has said, “I will never leave you nor forsake you.” So we can confidently say, “The Lord is my helper; I will not fear; what can man do to me?”
1John 2:15-16 ESV
Do not love the world or the things in the world. If anyone loves the world, the love of the Father is not in him. For all that is in the world—the desires of the flesh and the desires of the eyes and pride of life—is not from the Father but is from the world.
“<삶의 격>에는 ‘난쟁이 멀리 던지기’라는 충격적인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독일의 한 마을에서는 난쟁이를 멀리 던지는 사람이 게임에서 이기는 야만적인 축제 문화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책의 저자가 난쟁이에게 직접 말을 거는 장면이었다. 그는 난쟁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당신의 존엄이 송두리째 내던져지는 지금의 상황을 바꿔야 하지 않겠느냐’고 질문한다. 그러자 난쟁이는 ‘이 일을 함으로써 내 밥벌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소중한 것 아니냐고 맞받아친다. 그는 딱 봐도 지식인 티가 물씬 나는 작가에게 항변한다. ‘당신들에게는 많은 기회가 있겠지요. 뭐든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일자리가 생길 수 있겠지요. 하지만 나 같은 난쟁이는 그럴 수가 없다’라고. … 실제로 이와 비슷한 사례에 관해 독일 법원의 판결이 있었다. 난쟁이는 인권침해가 아니라는 판결이 나오길 바랐지만, 판사는 ‘인권침해다’라고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이 상황에서 난쟁이는 ‘일자리는 잃었더라도 존엄은 지켰다’고 말해야 하는가. 판사로서는 ‘어쩔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명의 난쟁이’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권침해가 ‘아니다’라는 결론으로 가버렸다면, 비슷한 모든 일을 법이 용인하는 결과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난쟁이 멀리 던지기가 ‘합법적이다’라고 결론이 나버리면, 법원이 타인의 아픔과 장애를 이용해 돈을 버는 모든 행위들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셈이 된다.”(정여울)
“한국에서 자유는 ‘리버티’(Liberty)가 아니라 ‘프리덤’(Freedom)에 편중되어 있다. 리버티와 프리덤은 똑같이 ‘자유’라 번역되지만 실은 다른 말이다.한국어엔 리버티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리버티가 프리덤과 구분되어 이해되거나 시민의식 속에 제대로 뿌리내릴 기회도 없었다. 프리덤은 어떤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상태, 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그러나 리버티는 사회 성원들이 서로에게 배분한 책임감을 수반한 자유다. 루소, 밀, 로크 등 근대적 민주주의를 설계한 사람들의 공통된 화두였던 그 자유다. 프리덤은 내 자유와 다른 사람의 자유가 부딪치고 침해될 수 있다. 그러나 리버티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공존하는 자유다. 리버티는 시민의 교양과 닿아 있다.”(김규항)
“글을 읽어 보면 저 돈 벌려고 썼구나. 아니면 정말 여기에 자기 몸을 다, 자기의 온 정신을 던져 가지고 자기를 완전히 내던져서 새로운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구나. 그럼으로써 자기의 진을 다 빼버렸구나. 그런 게 보이는 그런 작가가 있고 또 그렇거든요.”(정과리)
나는 이번에 출간된 <<종의 기원>>을 이런 절차를 거쳐 읽었다. 예전에는 그저 고전이라 읽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읽었다. 인간의 정치적 삶과 그것이 영위되는 공동체에 대한 40주 강의를 준비하면서 그러한 것과 대비되는 자연적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고, 그러던 차에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던 것이다. 이처럼 고전은 특정 국면의 문제의식을 해명하기 위해 곧바로 참조할 수 있는 믿음직한 텍스트이다. 이번의 독서를 통해서 무엇을 깨달았는가? 인간의 정치적 삶은 생물학적 퓌시스와는 다른 차원과 영역에서 전개된다는 것, 그 삶은 노모스에 근거한 ‘의무’를 정초하는 과정 자체에서 의의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정평있는 표준도서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것이다. 어쨌든 찰스 길리스피는 내가 어렴풋이 깨달은 것을 다음과 같이 집약한다: ”만약 우리가 세계를 기술하는 과학의 본성을 잘 분별하여, 그것이 서술적일 뿐이지 규범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과학과 종교 사이의 양자 택일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과학은 자연에 관한 것이지 의무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는 인격에 관한 것, 인간의 인격과 신의 인격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생물학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진화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과학은 인간이 진화의 소산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따위를 발견한 것은 아니다. 원리적으로 과학은 (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자연 선택이란 이름 아래서 작동하는 무의미한 우연을 허용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인간이란 자연적 존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던 사람들 자신이었다.”
_ 강유원, 2015. 1. 29.
찬비 내리고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
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
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
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
저리도 눈부신가요
몹시 앓은 듯한 이 예감은
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
향기 같은 것인가요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
_ 나희덕,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비,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