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May, 2008

May 28, 2008: 2:08 am: bluemosesErudition

“대중들은 지금 거리에서 정당이나 조직, 시민단체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고립된 채 외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 평소에 정치라는 것 모르고 살던 분들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분들입니다. 정당이라면, 그들의 분노를 합법적이고 합리적으로 표출할 방법을 제시해야 합니다. 거리에서 그들이 내는 항의의 외침이 결코 외로운 것이 아니며, 제도권 정당이나 단체나 조직들이 시민들을 지켜주는 방호복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어야 합니다. … [일단] 집회나 시위가 평화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공식적인 행동지침을 정해 시민들에게 숙지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좌절한 시민들이 자해와 같은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도록, 승리에 대한 희망을 주고, 흥분한 시민들이 과격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냉정한 분노를 주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아가 시민들은 이런 경우가 처음일 겁니다. 연행됐을 경우 어떻게 행동하고, 어디에 연락을 해야 하는지 숙지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진보신당의 ‘시민지킴이 변호인단의 대표 전화 하나를 시민들에게 알려주고, 앞면에는 변호인단 전화번호, 뒷면에는 연행시 행동지침을 간단히 적은 명함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눠줄 필요가 있습니다.”(全文)

저들의 무력(武力)을 무력(無力)하게 방관하고 있는 나. “분노를 합법적이고 합리적으로 표출할 방법”에 대한 무지(無知)로 인해.

May 27, 2008: 3:25 pm: bluemosesErudition

촛불집회와 가두시위에서 어떤 이들은 ‘희망’을 표하고, 또 어떤 이들은 ‘혼란’을 우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극단의 시대로의 회귀를 점친다. 민주주의는 지선이 아닌 절차이기 때문이다. 다만, 상이한 관점에서 ‘탈정치화’에 대한 다음의 자문자답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번에 그들[20대]이 시큰둥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바람과 참여에 정치권이 얼마나 무관심한지를 느꼈고, 그리하여 급속하게 냉소주의로 돌아섰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교육받는 대상에서 세상을 바꾸는 주체로 나선 10대의 가슴에 촛불의 기억은 오랫동안 지우기 힘든 화인으로 남을 것이다.”

May 26, 2008: 12:18 am: bluemosesErudition

“Hukum harus ganas kepada siapa saja yang terlibat korupsi tanpa memandang status atau jabatan.”

‘필연적 우연’으로 1년만에 인니어를 접했다. 퇴화된 날개의 풍장(風葬)을 방치하지 말라.

May 24, 2008: 2:33 pm: bluemosesErudition

“[’혁명을 연기하는 배우’라고 조롱받는] 지젝은 흔히 ‘슬로베니아 라캉주의 헤겔주의자’라고 불리지만 거기에 ‘마르크스’와 ‘대중문화’가 이론적 틀로 더해진다.”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기는 너무도 쉽지만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패러독스라고 지적하면서, 지젝은 그럼에도 우리가 유토피아를 발명해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한다. …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란 무엇인가?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유토피아, 곧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와는 무관하다. 유토피아는 어원 그대로 ‘자리가 없는’ 공간의 건설이다. 왜 자리가 없는가? 기존의 사회적 좌표계 내에서는 자리가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인 제스처의 사례로 지젝이 자주 드는 것은 1917년의 레닌이다. 레닌주의의 핵심은 자유주의적 ‘선택의 자유’ 대신에 ‘선택 자체를 선택’하는 데 있다.”

“… 우리가 당면하게 된 선택지는 사적 소유(사유재산)와 사적 소유의 사회화(국유화) 사이의 낡은 마르크스주의적 선택이 아니라 ‘위계적 탈소유 사회’와 ‘평등한 탈소유 사회’ 사이의 선택이다. 여기서 선택은 물론 자명하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이다. 지젝은 다시 레닌적 제스처를 끌어온다. 그가 보기에 레닌주의의 핵심적 교훈은, 당이라는 조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정치는 ‘정치 없는 정치’, 말로만 하는 정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비판은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는 것과 다름없는 ‘신사회운동’에도 가해진다. 과연 폴리페서(정치교수)들처럼 체제에 편승하거나 페미니즘에서부터 생태주의와 반인종주의에 이르는 신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 말고는 ‘사회적 개입’의 방법이 따로 없는 것일까? 지젝이 보기에 이러한 운동의 한계는 보편성이 결여된 ‘단일 이슈 운동’이라는 데 있다. 곧 사회적 총체성과 연관돼 있지 않다는 것이며, 중도좌파와 좌파 자유주의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다. 백포도주냐 적포도주냐 하는 선택은 ‘근본적인’ 선택이 아니다.”(원문)

* 이현우가 언급한 “접속 가능성”은 “소유”를 통해 결정된다. 그는 지젝을 따라 견강부회적 형식 미학에 갇혀 ‘자유가 소유의 함수’임을 의도적으로 간과했다. 반문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두 번째 요소이며, 그것을 통해서만 인터넷은 해방적 잠재력을 전개할 수 있게 된다.”에서의] “소비에트 권력” 은 이미 확보됐는가? 정신분석에 물든 적색의 편에서 녹색을 폄하하고 ‘슬랩스틱 훈계’를 일삼는 지젝, 그러나 정작 자신은 해방을 선취한 채 ‘혁명 없는 혁명’을 운운하는 지젝을, 우리는 여전히 ‘혁명을 연기하는 배우’에 빗댈 수 있겠다.

“프로이트의 고백처럼 외상의 환상성을 깨달아도 신경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 화폐의 물신적 힘은 그것에 대한 믿음에서 생긴다는 걸 알아도 대안적인 교환 방법을 찾지 못하면 화폐 물신주의는 계속되며, 자본의 잉여가치가 노동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도 자본 권력을 대체할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체를 구성할 욕망과 능력이 없으면 자본가에게 좀더 많은 지분을 요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 박정수(원문)

 

“프로이트는 볼셰비키 혁명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적이었다. 라캉이 서유럽의 68혁명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 정신분석이 혁명에 대해 회의적인 이유는 주체 편에서의 변화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라캉의 가르침에 따라서, 향유를 정치의 핵심적 요인으로 제출하는 지젝의 제스처를 우리가 함께 떠맡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동시에 우리는 민주주의나 여타의 대안적 정치 체계에 대한 논의보다 훨씬 중차대한 과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감각을 획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안적인 구체적 정치 체계에 대한 지젝의 집요한 침묵에서 내가 읽고 싶은 진리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문명을 구성하는 일체의 것을 재발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 이성민(원문)

 

참고 : 한겨레 “우리시대 지식논쟁”(’07. 8. 31. ~ ‘08. 5. 16.) 목록

May 23, 2008: 11:36 pm: bluemosesErudition

동력을 잃거나 방향을 상실하면 늘 그랬듯, 고향을 찾았다. 탁한 시야를 닦아내며, 의미가 되어 준 그들에게 감사한다. 공부로 삶을 바꿀 수 있는 ‘유예기간’이 이제 403일 남았다.

: 10:37 pm: bluemosesErudition

“애도란 슬픔의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그것을 충실히 표현하고, 잃은 대상을 잘 떠나 보낸 뒤, 그것을 내면화시키며 성장하는 총체적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 한 인간의 정신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특별한 대상과 맺는 애착 경험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그 특별한 대상(사람뿐 아니라 조국·자유·이상·직위 등)을 잃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애도하느냐에 따라서도 한 사람의 건강과 성장이 좌우된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공동체의 집단 무의식 속에 깃든 박탈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건강과 성숙도가 결정된다.”(김형경, 한겨레 080523)

May 17, 2008: 5:18 pm: bluemosesErudition

“이명박 후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명박은 디테일이 없다. 하나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분석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간다고 해보자. 문 두 개 열고 가면 쉬울텐데, 제일 빠른 거리로 벽을 부수면서 가는 스타일이다. 대가리를 박아가면서 가는 스타일이다. 경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 그 사람은 뭐든지 숨기고 돌려 하는 것을 좋아했다. … 뭐든지 이면계약으로 한다. 현대에서 회사 만들 때, 수시로 1억원씩 돈 넣고 지점장에게 돈 좀 주고 빼고 넣고 100번 해서 자본금 100억원 만들었다.”(출처)

*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10:16)

May 13, 2008: 11:36 pm: bluemosesErudition
1. “노무현 정권의 가장 큰 죄악은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서 ‘가치에의 추구’를 앗아가 버렸다는 것일 게다. 이명박 씨는 5년 전만 같아도 대통령 후보로서 파멸하기 충분한 도덕적 결함들을 가졌다. 그러나 그 결함들은 노무현 정권 5년을 통해 더 이상 결함이 아니게 되었다. 2007년의 한국인들은 이명박을 도덕적으로 용서한 게 아니라 이명박의 도덕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 프레임을 깨트리지 않는 한 어떤 ‘서민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매우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정책들’도 소용이 없다. 서민 대중들이 아예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의 프레임에 매몰된 가장 바보스러운 사례는 지난 대선에서 권영길 씨가 내건 ‘서민의 지갑을 채워드립니다’였다.) 프레임을 깨트리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오늘 한국인들이 경제적 유능함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그걸 개탄할 게 아니라 현실로 인정하되 그놈의 경제적 유능함이 계급으로 전혀 다르게 갈린다는 사실을 되새겨주는 것이다. 부자들에겐 홍정욱이 노회찬보다 경제적으로 유능한 게 사실이지만, 서민대중들에겐 노회찬이 홍정욱보다 훨씬 더 유능하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것이다.”(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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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는 지금 가치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돈의 가치관과 사람의 가치관. … 올바르기 때문에 정의를 좇기 위해서 고통과 손해를 감수하자는 게 아니다. 진정 더 잘살기 위해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 생각을 바꾸자는 것이다.”(원문)  +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