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une, 2017

June 30, 2017: 4:31 pm: bluemosesErudition

196. 이론적으로 객관적 해석학의 ‘의미의 객관성’ 이론은 미드의 사회학적 의미 이론과 피아제의 발생적 구조주의에 크게 기대고 있다. 미드는 개인들의 주관성들이 교차하고 상호작용하는, 그래서 개인들이 주관적으로 의도하거나 해석한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의미의 장’(field of meaning)을 이론화한 바 있다. 그러나 미드는 그와 동시에 개인들의 주관성을 초월해서 스스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정신적 실체를 가정하는 데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미드 자신이 ‘의미의 객관성’을 여러 곳에서 명시적으로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미 이론은 사실상 객관/주관의 이분법을 해체시키는 것이었다. … 방법론적 측면에서 ‘객관적’이라는 단어는 더욱 불행한 선택이었다. 객관적 해석학이 해석의 객관성을 강조하는 것은 이해의 존재론적 연관성에 대한 현상학과 해석학의 통찰이 너무나 빈번히 상대주의의 근거로 간주되는 상황에 대한 항의의 표현이다. 이들은 이러한 풍토에 반대하여, 연구자의 선이해와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어 텍스트의 언어와 대화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객관적’이라는 개념은 마치 이들이 실증주의 인식론의 의미에서 연구자와 행위자의 주관성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진리 명제가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201. 구조 해석학은 행위 이론의 차원에서 도입한 규칙 개념을 의미 이론의 차원에서 잠재적 의미 구조의 이론으로 체계화했다. 여기에서 해석의 목표는 개인 행위자가 주관적으로 의도한 의미, 또는 타인의 행위에 대한 주관적인 의미 해석으로 축소될 수 없는, 사회적 수준의 의미 구조를 해명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기어츠는 문화의 공공적(public) 성격을 강조한 바 있다. “문화는 공공적이다. 왜냐하면 의미는 공공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문화는 사회적으로 확립된 의미 구조로 구성된다. 사람들이 [윙크와 같은] 신호를 보내어 공모를 하고 거기에 참여하거나 모욕감을 느끼고 그에 응답하는 등의 행동을 할 때, 그들은 바로 그 의미 구조의 맥락에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Geertz, 1973: 12~13).

204. 순차적 분석(Sequenzanalise)은 구조 해석학의 분석 방법의 중핵이다. 이것은 연구자가 텍스트 전체에 대한 해석적 결론을 먼저 내리고 이에 기초하여 텍스트 요소들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상호작용의 시간적 전개를 따라 한 단계 한 단계 정밀히 분석하여 최종적으로 이 모든 단계들을 관통하는 텍스트 전체의 의미 구조를 재구성하는 방법이다. 구조 해석은 행위자들의 상호작용 ‘과정’을 추적하는 순차적 분석이 그 상호작용을 통해 실현되는 의미의 ‘구조’를 재구성하는 최적의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구조의 재생산은 그 자체가 순차적으로 전개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분석 사례의 내외적 현실의 변화에 의해 영향받지만,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구조는 계속 유지되며 사례의 자율성은 보존된다. 이러한 순차적 질서가 보여주는 것은, 상호작용의 의미 연관성이 구성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행위자들에 의해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선택된다는 사실이다”(Oevermann, 1981: 50). 여기에서 구조는 구체적 행위 저편에서 스스로를 재생산하면서 행위자를 움직이는 실체가 아니라, 상호작용의 시간적 연쇄를 거치면서 실현되거나 혹은 변형되는 행위의 질서로서 이해된다.

223-224. 구조 해석학의 목표는 행위자들이 기능적 상호의존성을 갖는 행위 규칙과 의미 체계 내에서 잘 조정된 상호작용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구조 해석학의 관심은 행위자들의 의미 세계와 사회적 관계에 내재한 긴장과 병리, 억압의 체제와 저항의 맹아를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역동성의 인식에 기초해서 미래의 사회변동을 예측하는 것이다. … 구조 해석학적 의미 재구성은 그 최종 단계인 일반화 단계에 이르러 실증주의적 법칙성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미래에 대한 예측과 실천적 메세지를 얻게 된다. 여기에서 예측이란 관찰된 대상에서 발견된 어떤 법칙이 미래에 다른 대상에서도 작용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된 대상이 내포하고 있는 긴장과 위기의 요소들이 미래에 어떤 종류의 사회변동을 추동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발견과 예측은 그 자체가 불확정적 역사 과정에 대한 실천적 개입이다. 그것의 실천적 함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행위자들은 명시적 의미 해석과 잠재적 의미 구조의 불일치, 즉 지배적이고 제도화된 행위 양식과 그에 내포된 일탈적, 병리적, 저항적 잠재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와 모순은 “통계적 빈도분석에서는 ‘예외적 측정치’ 또는 형식적ㆍ통계적인 ‘정상성’의 외부에 놓여 있는 현상으로서 시야에서 벗어나게 되는 데 반해, [구조 해석학의] 사례 재구성에서는 전면에 부각될 수 있다”(Oevermann, 1996: 18~19; Wagner, 2001: 116에서 재인용).

224. 구조 해석학에서 ‘위기’는 정상성의 외부에 있는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그 내부에, 언제나 그 내부에 있는 어떤 것이다. “우리가 행위하고 있는 중에는 행위의 결정 구조가 위기를 내포하고 있음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익숙해져 있는 일상들을 통해 행위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들은 원래 어떤 위기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발전되었으며, 이후 행위자들의 삶 속에서 보전되고 일상화되어 온 것들이다. 우리가 결정의 상황과 불확실성에 대해 의식하게 되는 것은 오직 우리의 확신과 일상들이 놀랍게도 좌절되고 말았을 때, 혹은 처음부터 새로운 뭔가를 찾아내야만 할 때, 즉 우리가 명백히 어떤 위기에 처해있을 때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적 행위의 관점과는 매우 다르게, 순차적 분석에게는 일상이 아니라 위기가 일반적인 사례이며, 위기가 아니라 일상이 예외적인 사례다. 일상은 열려 있는 위기 상황을 봉합함을 의미하며, 그 반대로 위기는 닫혀 있는 일상을 개방시킴을 뜻한다는 사실에서 그것은 분명해진다”(Oevermann, 2002: 10).

: 11:01 am: bluemosesErudition

For to set the mind on the flesh is death, but to set the mind on the Spirit is life and peace. For the mind that is set on the flesh is hostile to God, for it does not submit to God’s law; indeed, it cannot. Those who are in the flesh cannot please God.

: 1:23 am: bluemosesErudition

“I have just passed on from believing in God to definitely believing in Christ - in Christianity … My long night talk with Dyson and Tolkien had a good deal to do with it.”(C. S. Lewis)

: 1:15 am: bluemosesErudition

“다시 봄이 오기 전 약속 하나만 해주겠니 /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아직, 있다)

: 12:59 am: bluemosesErudition

“While Northern Israel suffered disorder in the midst of revolution and apostasy, Southern Judah enjoyed an era of security. After the 41-year reign of Asa, Jehoshaphat son of Asa became king and reigned 25 years. Jehoshaphat lived before God, and once again led Judah toward a golden era. Meanwhile, in Northern Israel, Ahab’s son Ahaziah became king and incurred God’s wrath by walking in the way of his father Ahab, the way of his mother Jezebel, and the way of Jeroboam.”

“Their relationship with God was the only standard by which their lives were measured. Our lives today must also be judged by no other standard than that of our relationship with God.”

June 29, 2017: 10:57 pm: bluemosesErudition

10대 암송, 20대 문예, 30대 노무 ··· 연령에 적합한, 그리고 더 원숙한

: 1:20 am: bluemosesErudition

내일부터 장마전선이 북상한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 12:46 am: bluemosesErudition

초/중/고/대/원, 그 부단한 등정. 분석에서 해부로의 혼의 상승. 문제의식(eros), 탐구활동(synousia), 학습성과(philosopia). 지에 대한 사랑.

June 28, 2017: 11:51 pm: bluemosesErudition

1980년 11월 16일 일요일 아침. 파리 시내 울름가에 위치한 프랑스 최고 명문 고등사범학교 교수 아파트에서 루이 알튀세르는 부인 엘렌느의 목을 마사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는 열 살이나 위인 부인의 몸이 굳어지는 것을 발견한다. 그가 마사지를 하던 순간과 “내가 엘렌느를 죽였다”고 깨달은 순간 사이에는 의식의 空洞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곧장 셍트안느병원으로 실려간 것은 부인의 시신이 아니라 알튀세르 자신이었다. 그의 정신과 담당의사 르네 디아킨은 그 순간 그가 정신착란 상태였으므로 그에게 살인책임이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사법적으로 무죄판결을 받은 알튀세르는 그후 1990년 가을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 ‘살아 있는 죽은 자’였다. 법적 권리가 없어지고 어떠한 문서에 서명할 권리마저 빼앗겼다. 그러던 그가 사후 1년6개월 만에 입을 열었다. 의료기록의 비밀보장 때문에 재판이 끝난 후에도 일반에 공개되지 않던 그의 얘기가 그가 구술해놓은 원고에 의해 자서전으로 출판된 것이다. 파리의 전통 깊은 출판사 스톡과 4만~5만장에 이르는 알튀세르의 모든 문서를 기증받아 보관하던 현대출판기념연구소(IMEC)가 공동으로 출판한 이 책은 프랑스가 낳은 금세기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알튀세르 바람을 프랑스에서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다. 출간된 지 한달도 못돼 평론가들은 이 책이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 《마르크스를 위하여》보다 더 오래 남을 것으로 평가한다.

드골의 어록에서 제목을 따온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오래 전부터 그의 이론과 이론적 배경, 즉 그의 삶을 연구하던 얀 물리에 부탕의 요청에 따라 알튀세르는 자신의 인생을 구술했다. 또 이 자서전의 출간을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직접 서문까지 썼다. “나는 그 자체로서는 관심도 끌지 못할 내 인생의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모든 심리적 지각이 그러하듯이 나의 고뇌에 환영적으로 투영되어 내가 지각하고 느낀 대로만을 이야기 하겠다. … 단지 나에게 일어났던, 아직도 끝나지 않은 미궁의 미스터리를 좀더 잘 보려는 의도에서일 뿐이다.”

알튀세르가 처음 정신과 치료를 받은 때는 그가 30세였던 1948년경이다. “이 여성을 보호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느껴 열렬히 사랑한 부인 엘렌느 리트만 레고티엥. 그와 처음 사랑의 행위를 나눈 직후부터 그는 죽을 때까지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 그의 병명은 ‘조기 심신 상실’과 ‘극심한 우울증’. 평생 동안 전기충격 요법을 받고, 신경 안정제와 우울증 치료제를 복용했다. 때로는 몇 주 또는 몇 달 동안 정신병동에 격리되기도 했다. 그 원인을 이 자서전은 바로 원초적인 데서 찾는다.

1918년 알자스에서 이주해온 알튀세르와 베르제 두 가문은 알제에서 인연을 맺는다. 자기가 죽도록 사랑한 연인을 1차 대전으로 잃은 신부가 연인의 큰형과 결혼한 것이다. 아들에게 연인의 이름을 그대로 붙여준 어머니는 아들에게서 연인의 환영을 본다. 무일푼이었다가 큰 은행의 대표가 돼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된 아버지 역시 어린 알튀세르에게는 ‘자연적 본능’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지 못했다. 성녀 같은 어머니는 그에게 모든 육체적 접촉을 금지시켰다.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체제의 가장 억압적인 형태는 가정과 학교”라고 그는 되풀이 말했다. 그는 ‘자연적 본능’에 억압 받은 자기가 ‘이상’만을 향해 줄달음 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술회했다. 그가 2차대전 때 독일군 포로가 돼 수용소에서 열렬한 공산주의자에게 쉽게 매료된 것도 이같은 ‘이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 11:36 pm: bluemosesErudition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영원히 살 자식을 만드는 일이 <향연>의 사랑이다.”

_ 2010년 1월 7일 / 하얀 케임브리지에서 / 강철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