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mple, powerful, solution”
1953년 6월에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 동독의 노동자들이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동독 정부의 대답이 걸작이다. “정부는 인민들에게 실망했다.” 브레히트의 냉소는 더 걸작이다. “차라리 인민을 다시 뽑아라.” - 신형철(한겨레21, 080612)
“6월 17일 인민봉기가 일어난 뒤 / 작가연맹 서기장은 스탈린가(街)에서 / 전단을 나누어주도록 했다. / 그 전단에는, 인민들이 어리석게도 / 정부의 신뢰를 잃어 버렸으니 / 이것은 오직 2배의 노동을 통해서만 / 되찾을 수 있다고 씌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 정부가 인민을 해산하여 버리고 / 다른 인민을 선출하는 것이 / 더욱 간단하지 않을까?”(<해결방법> 전문)
고려대 사회학과 김지윤 학생의 ‘대학생 시국토론회’ 발언을 계기로 만난 동명의 영화(감독 Robert Benton, 주연 Anthony Hopkins) “휴먼 스테인”
“너 불안해서 어떻게 살려고 그러니?”
“[인종차별 시비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알아요. 오빠가 흑인이었다는 것을 밝혔다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오빠는 사실을 밝힐 수가 없었을 거예요.”
* ‘진실’을 넘어선 ‘순결’의 무게를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어떤 피해도 입지 않은 채 소문을 잡으려면 애초에 그 소문을 믿는 사람이 없도록 적극적으로 자신의 평판을 관리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보호받을 수 있다.” - <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50가지 비밀> 中
“결론적으로 나는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습득해야만 했다. 학자로서 이론에 충실하거나, 예술가로서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용기를 배우지 않는 한, 나는 더욱 기능적이고 전문적인 역량을 갖춰야만 했다. 법을 알아야 했고, 숫자를 알아야 했다. 사회인으로서 나를 개발해야 했으며,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이가 되기 위해 다시 한 번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이상과 능력의 격차를 최소화해야 했다. 어떤 경우에도 이상을 낮출 필요는 없었다. 단지 나의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야 했을 뿐이다.”(홍정욱, 2003: 274)
18대 국회의원(노원-병)이 된 홍정욱의 글을 새삼 꺼내 읽었다. 이로써 3번째다. 93년, 03년, 08년. 궁리/존양/역행을 함양하는데 있어, 그의 글 초판은 ‘존양’의 측면에서 중학생인 나의 학업을 독려했고, 대학원 시절 접한 개정증보판은 ‘궁리’의 측면에서 지적 자극을 선사했다. 그리고 30대에 들어선 지금 “7막 7장”의 홍정욱은 ‘역행’의 측면에서 - 리더십을 빙자한 자기계발서 마냥 - 꿈에 이르는 기예를 제시한다. 여러 모로 유익했다. 그러나 더 이상 ‘개인’이 아닌 ‘사회인’으로서 얻을 것이 없기에 또한 그의 야망이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지 않음이 자명하기에 재독(再讀)할 이유는 없겠다.
“일본에서도 최근 내 ‘예측’을 배반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고바야시 다키지의 소설 <게잡이 배>(蟹工船)가 올해 2월께부터 갑자기 팔리기 시작해 책을 낸 출판사도 대폭 증쇄를 했다고 한다. 세계 대공황이 일어난 해인 1929년에 쓴 대표작 <게잡이 배>에서 그는 소련령 캄차카 영해를 침범해 게를 잡고 배 위에서 가공해 통조림으로 만드는 게잡이 배를 무대로 지옥 같은 혹사와 학대를 당하며 일하는 민중의 모습을 그렸다. 그 폭력은 회사의 이윤과 대일본제국 국책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된다. 이런 상황을 참아내기 어려웠던 노동자들은 결국 자연발생적으로 들고 일어나 스트라이크에 돌입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보호해 주리라 믿고 있던 일본 해군의 탄압에 직면한다. 여기에 묘사되고 있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가 그 본원적 축적기에 저지른 비인간적 착취의 진실이다. 이러한 진실을 그렸다는 이유로 작가 고바야시는 치안유지법과 불경죄로 검거된 뒤 일단 석방돼 지하생활을 시작했으나 1933년 2월20일 내통자의 밀고로 다시 체포당해 바로 그날 경찰의 모진 고문 끝에 학살당한다. 중국의 문호 루쉰은 고바야시 다키지의 죽음을 기려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일본과 중국의 대중은 원래 형제다. 자산계급은 대중을 속이고 그 피로 경계선을 그었다. 그리고 계속 긋고 있다. 하지만 무산계급과 그 선도자들은 피로 그것을 씻어낸다. 동지 고바야시의 죽음은 그것을 실증하는 한 예다.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굳건히 동지 고바야시의 핏길을 따라 전진하고 손을 맞잡을 것이다.”
지금 그 고바야시의 <게잡이 배>가 일본 젊은이들에게 읽히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일본에서는 ‘빈곤’이라는 단어 자체가 실감을 동반하지 않는 사어가 돼 있었다. 고바야시 다키지 따위를 읽는 것은 연구자나 기인들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은 ‘빈곤’이 다시금 절실한 실감 속에 거론되는 사회가 됐다. 젊은이들이 <게잡이 배>를 읽는 것은 거기에 묘사된 비인간적인 착취의 세계에 자신들을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움직임을 과대평가해선 안 될 것이다. 경험도 조직도 없는 고립된 비정규직인 그들은 점점 출구 없는 게잡이 배 밑바닥으로 내몰리고 있다.”(서경식)
2008년 5월, 홍성사 출간. “오늘 더 사랑해”
‘화보’를 훑어보며 치밀어 오르던 반감은 소리없이 잦아들었고 이내 환희로 변해갔다. 현실태와 무관한 지나치게 밝은 풍요는 빈축을 사기에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유토피아 안에서 살아가는 그네들은, 디스토피아 속에서 죽어가는 저희들이 망각한 타인에 대한 감성을, ‘매력’이란 이름으로 복원하고 있었다. 상술한 책에서 유지태가 언급하듯, “진정한 전도는 … 예수님을 믿는 가정이 행복하게 자신의 삶을 사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타인에게 귀감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사랑을 전하는 것은 남에게 자신의 것을 종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타인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며 삶을 행복하게 영위할 줄 아는 것이다.” 수억원을 호가하는 골프회원권이 난무하는 시대, 최저생계비에 못미치는 비정규직이 배회하는 사회를 구름잡듯 거머쥔 채 맑스와 라캉 같은 허다한 인명을 들먹이며 세태를 비판함으로써 우월감을 느낄 뿐 정작 제 호주머니에 있는 동전 하나 선뜻 내밀지 못했다. 오히려 인격의 이중성을 감추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것이 연단되지 않은 미덕’이라며 어디선가 주워삼킨 구절 하나를 - ‘부자들의 나눔’을 폄하하는 무기로 삼아 -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내뱉었다. 논어에 따르면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소인에서 군자로의 도야는 자기에서 세상으로, 다시 말해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순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이타적으로 확장된다. <오늘 더 사랑해>에서 ‘션’과 ‘혜영’이 보여준 ‘홀트’와 ‘컴패션’, 그리고 ‘밥퍼’ 등의 공동체 활동과 ‘AISEC 만원의 행복’ 강연 등은 허풍선의 가식적 바람을 빼기에 충분했다. 이재철 목사의 출판 기획이 시의적절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혜영이를 공주처럼 생각하고 공주처럼 대해 주며 산다. 공주의 남편인 나는 왕자가 된다. 나는 우리 딸 하음이도 공주처럼 생각하고 공주처럼 대해 주며 산다. 공주의 아빠인 나는 왕이 된다. 공주가 되고 싶으면 남편을 왕자로 대하고, 왕자가 되고 싶으면 아내를 공주로 대하고,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고 대해 주면 나도 그만큼 귀해지는 것 같다.”(136쪽) - Blessing!
Americanism : Universal Exceptionalism
일부 사립대에 이어 서울대마저 교수임용과 승진 심사에서 ‘톰슨’사라는 미국 민간기업이 만든 ‘사회과학인용지수(SSCI)’ 논문 게재 실적을 요구하는 규정을 마련 중이다. 백창재 교수(서울대 정치학과)는 “창피하고 비극적”이라고 했다. “SSCI 실적을 쌓으려면 한글로 써야 적합한 논문조차 영어로 써야 하는데, 해외 학자들은 왜 그러는지 전혀 이해를 못합니다.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SSCI 실적을 요구하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아마 지구상에서 유일한 나라가 아닐까 합니다.”
인생의 의미를 구약은 ‘향락’(전2:24)에서, 신약은 ‘공의’(마6:33)에서 발견한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나는 후자를 붙잡겠다. 예수의 제자로서. 주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앞두고 ‘목표는 있으나 목적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My prayer is not that take them out of the world but that you protect them from the evil one. … Sanctify them by the truth; your word is truth. … Holy Father, protect them by the power of your name - the name you gave me - so that they may be one as we are one..”(John 17: 15, 17, 11) 제자는 세상을 외면하고 공전하는 이가 아니다. 세상 속에서 진리 곧 말씀을 붙들고 구별된 삶을 살아가며, 홀로 할 수 없으니 연합하기를 힘쓰는 자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아멘.
역사적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각각 제사장과 왕에 빗댄다면, 언행은 선지자의 그것과 유사하다. 예수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죽었으나, 선지자로 살았다. 신분/지위와 그에 상응하는 권능/영향력의 측면에서 오늘날 제사장의 역할을 목회자와 신학자가 담당한다면, 왕의 역할은 ‘장로’ 정치인과 기업인이 수행하고 있다. 그들이 생산-유통하는 교계의 주류 담론에, 나는 한편으로 수긍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외면하였다. 다시 말해, 숭고한 제사장을 추앙하면서 타락한 왕을 조롱하였다. 서준식이 그리하였듯, 예수와 맑스를 동시에 - 맑시스트가 아닌 크리스챤으로서 - 구현하기 원했다. 그러나 나의 사상은 시나브로 소수파의 주류 담론에 포획되고 화석화됨으로써 예상치 못한 시공 가운데 돌출하는 선지자의 목소리를 배제하기에 이르렀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일각에서 에센파로 추정하는] 세례요한을 거부한(눅7:30) 것과 동일한 행태를 취한 것이다. 물론, 플로리다 부흥(Florida outpouring)의 명사이자, 제2의 베니 힌으로 거론되는 토드 벤틀리(Todd Bentley)에 대한 의구심은 여전하다. 다만, 니고데모의 자세를 견지할 필요성을 되새긴다. 이러한 점에서 존 맥아더(John MacArthur)의 글은 필독할 가치가 있다.
Anesthesia awareness, or “unintended intra-operative awareness”
01. “수술 중 각성. 전신마취 수술 시 외형적으로는 정상적인 마취상태로 보이지만 환자의식이 깨어나서 수술의 전 과정을 그대로 경험하는 현상. 수술 중 각성이 발생한 환자는 수술의 고통을 고스란히 경험한다. 하지만 근이완제를 투여받은 상태이므로 자신이 깨어있다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도 표현하지 못한다. - 몸에 들어가는 마취제는 신경마취제와 근육마취제가 있는데, 이중 신경마취제에 이상이 생겨 수술 도중 환자가 깨어나 그 고통을 그대로 느낄때 ‘수술 중 각성’을 경험한다 - 이런 끔찍한 경험은 당사자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장애를 일으켜서 절반 이상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를 겪는다.” 참고 : ‘리턴’
02. 환상으로부터의 탈주가 부정의 끝에서 되찾는 긍정, 즉 ‘능동적/완성된 니힐리즘’으로 귀결되기 위해서는 주체가 제기하는 ‘비판의 무기’ 너머 물질이 제시하는 ‘무기의 비판’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의식화는 구도자의 “수술 중 각성”을 야기해 ‘초인’을 제안한 니체마냥 ‘광인’으로 여생을 소진케 한다.
* 모피어스는 다음과 같이 네오를 맞이한다. “실재계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