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해야 할까. 앎이 삶에 육화될 때 공생애는 가능하다.
* “너희는 그를 알지(ginosko) 못하되 나는 아노니(oida).” - 요 8:55 (cf. 고전 8:1~3)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해야 할까. 앎이 삶에 육화될 때 공생애는 가능하다.
* “너희는 그를 알지(ginosko) 못하되 나는 아노니(oida).” - 요 8:55 (cf. 고전 8:1~3)
“So whatev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1 Corinthians 10:31)
“If I have the prophecy and can fathom all mysteries and all knowledge, and if I have a faith that can move mountains but have not love, I am nothing.”(1 Corinthians 13:2)
* 주 안에서 타자를 이롭게 하지 못하는 말과 행동, 감정과 생각은 내친다. “민중의 가랑이 아래로 기어라.” - 주의 영광과 형제 사랑으로(080130).
“경제구조나 교육제도의 비리 같은 건 누구나 감지할 수 있다. 어쨌거나 공론장 속에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의 이름으로, 엄마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일들은 당사자도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철저하게 사적인 행위로 치부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그것은 ‘늪’이다. 모성과 사랑이 아니라, 연민과 집착으로 온몸이 잠겨버리고마는 늪! 청춘을 들끓게 하는 폭풍을 삼켜버리는 늪!(고미숙, 경향 080128)”
‘엄마의 늪’은 ‘잠행적 정상상태’의 전범(典範)이라 할만하다.
직급은 업무에서의 권한과 책임이다. 직급을 신분으로 착각하는 자에게 항변은 고사하고 눈치만 살핀다면, 그는 노예와 다를 바 없다.
대안의 부재를 탓하며 일궈낸 ‘유권자의 복수’는 “정상적인 민주적 선거 경쟁”에 휩쓸려 ‘자해적 징치’로 귀결된 노예 근성의 표출이다.
인본주의에 속박된 노예(slave)는 신본주의에 귀속된 종(doulos)의 ‘의존적 자유’를 이해할 수 없다. “의존은 주체를 무력화하는 행위가 아니라 활력화하는 행위이다(정연순, 2006: 40).”
“너는 지적 능력이라는 게 네가 머리에 넣어둔 정보의 총량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그건 매우 지적이지 못한 생각이야.”
1648년 전-후에 촉발된 신[혹은 절대자]에 대한 회의는 종교에서 정치로, 교황에서 국왕으로의 중심 이동을 초래하여 ‘근대 국가’의 탄생을 견인한다. 제3의 신분과 결탁한 근대 국가는 합법적으로 독점한 폭력을 기반으로 이윤 추구에 적합한 정치-경제적 토대를 형성하는데, 그 결과 이전 사회에 배태된 인격적 관계는 ‘자유’와 ‘과학’ 그리고 ‘혁명’이라는 미명 하에 “계산 가능한” 물질적 관계로 치환된다. 따라서 ‘30년 전쟁’ 이전까지 진리의 토대였던 신적 로고스는 인간의 생존으로 대체되고, 공리주의(utilitarianism)가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기존의 “반도덕”은 점차 “비도덕”으로 전환된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유물론은 눈앞에 놓여 있는 객관을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것, 그리고 그 대상을 인간의 감성적 활동이라고 하는 실천을 통해서 나의 것으로 만들고 새로운 것을 형성해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강유원, 2008).”
* 포이어바흐가 종교적 자기 소외라는 사실을 제시했을 뿐이라고, 마르크스는 비판한다. 종교적 의존의 진정한 기초인 세속적 세계의 소외적 상황에 대한 해명을 전개하지 않은 것이다. 그에 따라 마르크스는 종교적 소외 상황을 특정한 국면의 사회적 상황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를 폐기하기 위해서는 종교를 낳아놓고 유지하는 세속적 기초를 “그 모순에 있어서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실천적으로 혁명화”되고 “실천적으로 파괴되어야 한다.” 포이어바흐는 종교의 비밀을 밝혔다. 즉, 종교의 세속적 기초라는 상황을 ‘해석’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속적 기초까지도 ‘변화’시켜야 한다. ‘비판이라는 무기(즉, 이론)’는 ‘무기에 의한 비판(즉, 실천)’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보수나 진보를 논하기 이전에 우리는 모두, 특히 교육자라는 자리에 있는 이들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보편적 가치들이 있다. 그중에서 으뜸가는 것은 ‘배려’를 보여주는 것이다. 제자가 끓어오르는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해 과격한 짓을 저질렀다 해도 그를 아끼는 마음으로 용서하고 책임 있는 어른의 자세를 솔선수범해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산 교육이 아닌가? 배려심 있는 보수는 진보에게도 소중한 도덕적 귀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고려대 당국은 출교생들에게 사실상 무자비한 전면전 — 고려대 당국은 “출교 대상자들이 전원 자본주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려는 민주노동당 당원”이라며 항소장을 제출했다 — 을 선포했다. 과연 이를 지켜보는 학생들은 무엇을 배우며 어떤 가치를 학습할 수 있는가? 고대 당국자들이여, 제자들 앞에서 진정 부끄럽지 않은가?”(박노자, 한겨레 080116)
* “저희 선생을 믿을 수가 없고, 존경이 가지 않아서 진심으로 배우지 않을 때에는, 설사 배운다 해도 지식이나 기능이지 인간을 배우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성내운, 1976: 23).” 고대 사태는 대학마저 인격적 관계가 소실되어 물질적 관계가 전면화되고 있음을 예시한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에 따르면, 로망스는 현실적 모순에 대한 상상적 해결책으로, 어떻게 나의 적이 ‘악’으로 인식될 수 있을까 하는 강압적 질문에 대한 상징적 대답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 ‘개혁 로망스’의 세계에서 한국의 모든 사회문제는 수구세력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공세 속에서 탄생했다고 이해된다. 그들이 ‘대중의 우매함’을 말할 때 그 ‘우매함’은 별스런 지성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저 단순한 도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우매함’을 의미한다(한윤형, 씨네21 080118).”
* 선악 구도의 음모론은 명쾌하여 파급력이 강하나, 사태를 왜곡시켜, 중심적 사회갈등과 지배적 정치담론의 불일치에 따른 ‘탈정치’를 초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