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September, 2008

September 29, 2008: 3:56 pm: bluemosesErudition

“실제로 종부세 대상자는 1~2%밖에 안 되지만, 각종 여론조사에서 종부세 완화에 대한 찬성률은 20~30%에 이른다.”(출처)

September 28, 2008: 5:24 pm: bluemosesErudition

“동물의 세계에는 악과 도착증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자신의 파괴충동을 선에 대한 이상으로 탈바꿈시켜서 최악의 짓거리들을 저지를 수 있죠. 동물은 결코 나치주의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잔인한 동물이라 해도 악을 즐기지는 않으니까요. 악을 즐기려면 악에 대한 의식을 가져야만 합니다.” - Elisabeth Roudinesco

“인간이 자신의 의사대로 행동하는 이유를 전혀 모르더라도 그들이 집단적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How One Thing Leads to Another)에 대해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 Phillip Ball

“오체투지란 신체의 다섯부분 즉 양팔꿈치, 양무릎 그리고 이마를 땅에 완전히 대는 자세입니다.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낮아지는 자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겸손을 의미하며, 마음을 비운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 문규현 신부, 수경 스님

“현실사회주의가 패망한 건 그게 사회주의라서가 아니라 전제정이었기 때문이다. … 만일 현실사회주의라는 거대한 왼쪽으로 당기는 힘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 나라들엔 복지라는 게 애당초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고, 이른바 ‘사민주의’라는 사회주의가 부분 이식된 자본주의 시스템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에서 이른바 사민주의자를 자처하며 ‘사회주의의 폐기’를 주장하는 바보들은 그 맥락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한국의 사민주의(민노당, 진보신당 등)가 여전히 기를 못 펴는 가장 큰 이유는 우파의 공격이나 모략 때문이 아니라, 사회주의 세력이 지나치게 약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그 바보들이 소망하는 대로 한국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사라져버린다면, 다시 말해서 사민주의가 한국에서 가장 극좌 세력이 된다면 한국에서 사민주의가 실현될 가능성은 ‘0’이 되는 것이다. 아마 ‘유시민 대통령’ 정도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일 것이다. 이념이란 본디 자기보다 왼쪽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오른쪽은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법이다. 제 이념이 현실이 되길 바라는 사람이 가져야할 가장 합리적인 태도는, 나보다 왼쪽에 있는 사람들을 진정 존중하고 나보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을 진정 혐오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바보들은 존중해야 할 사람들은 혐오하고 혐오해야 할 사람들에겐 보기 불편할 만큼 관대하(거나 유착되어 있)다. 그러면서 만날 제가 세상에서 제일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좌파란다.” - 김규항

* 심각하고 결의에 찬 뺑뺑이(lazy repertoire)는 길티 플레져로 전락했다.

September 23, 2008: 3:09 pm: bluemosesErudition

“무서운 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저지르고도 그걸 잘했다고 하며 같은 잘못을 계속 반복하는 거다. 일본을 욕할 때는 독일의 사례(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사회적 반성)를 들먹이면서 왜 우리는 그렇지 않은가. 일본과 우리의 차이는 일본이 자기반성을 안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힘이 있고 우리는 힘이 없다는 거다. … 비록 의분(義憤)이라 할지라도 분노에 매몰되어 애정을 상실하면 그것은 또 하나의 광기에 지나지 않는다. 세태를 냉소적으로 비아냥거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너무나도 쉬운 반응이다. 화나면 화내는 거다.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내는지는 알 바 아니고. 불의에 대한 항거가 분노에 그친다면 그것은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다.” - 정의로운 역사의식을 지닌 남민. 남민 덕분에 ‘회복적 정의’를 머리가 아닌 마음에 담게 되었다. 남민과 함께 역사 공부할 학생들이 부럽다. ㅎㅎ

* 이상과 대안을 꿈꿀 것을 권하는 데 있어 역사 교육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여러분이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모른다면, 여러분은 마치 어제 갓 태어난 것과 같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제 갓 태어났다면, 확성기와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우리는 이라크를 폭격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대통령에게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어느 정도 역사를 알고 있다면 ‘잠깐만요, 이 문제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보죠’라고 말할 것입니다. … 비록 역사가 어떤 특수한 상황에 담긴 진실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려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여러분에게 경계하고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은 가르쳐줍니다.”

September 22, 2008: 12:11 am: bluemosesErudition

“이미 지난해부터 ‘골디록스의 종언’은 경제 전문가 사이에서 오르내렸다. 골디록스란 영국의 전래동화 <골디록스와 곰 세 마리>(Goldilocks and the three bears)에 등장하는 소녀의 이름에서 따왔다. 동화에서 골디록스는 곰이 끓인 세 가지의 수프,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 적당한 것 가운데 적당한 수프를 먹고 기뻐하는데, 이 적당한 것을 경제 상태에 비유한 것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고용을 창출하는 경제성장을 하면서도 물가 압력의 우려가 없는 상태, 즉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호황을 뜻한다. 호황인데 뜨겁지 않다니, 얼마나 환상적인가.

지난 10여 년간 세계 경제는 성장률과 물가가 상충(trade-off) 관계에 있다는, 상식이 되다시피 한 경제학 이론을 보기 좋게 뒤집어왔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세계는 정반대의 상황에 빨려 들어갔다. 경기가 둔화하는 조짐이 뚜렷한데도 인플레가 고개를 든 것이다. 이런 기막힌 상황을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지난 4월 ‘얼음(성장 둔화)과 불(인플레이션)의 결합’이라고 묘사했다. 칸 총재는 “골디록스가 이제 없다”라고도 선언했다. 지난해까지도 세계는 이른바 ‘R(Recession)의 공포’에 떨었으나 이제는 더 무섭다는 ‘I(Inflation)의 공포’에 떤다. 고성장·저물가 시대의 종언을 가져온 것은 석유와 식량을 비롯한 원자재 값의 앙등이다.” -  장영희(시사인 39호, 080608) 

* 저금리로 조장된 경제[지표] 성장, 그리고 이른바 세계화에 힘입어 다투어 공급되던 염가 상품. 세 마리의 곰(FRB-WTO-Wall street)이 끓여준 고성장-저물가의 정크푸드 죽만 퍼먹다 영양실조에 동맥경화까지 겹친 美소녀 골디록스는 공적자금 7천억불 없이는 유동성 저하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다.

September 20, 2008: 11:53 pm: bluemosesErudition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늘 혼자서 보냈다. 그건 내가 비사교적이기 때문이 아니고, 예술가가 창조자로서 작업하기 위해 머리를 쓰기 바란다면 자아 규제 ― 바로 사회로부터 자신을 절단시키는 한 방식 ― 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한 작품을 산출하고자 하는 예술가라면 누구나 사회 생활면에서 다소 뒤떨어진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 Glenn Gould

“그는 쓰고 또 썼으며 밤에도 계속 썼다. 항상 음악을 들으면서 였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곧 바하였다. 또는 모차르트였다. 그는 쓰고 다시 쓰고 했다. 이미 쓴 글을 정확한 단어로 바꾸고 끊임없이 다시 손질을 했다. 왼쪽에는 다시 손보아야 할 원고더미, 오른쪽에는 이미 손을 본 원고더미…” - Michel Foucault

September 5, 2008: 11:01 pm: bluemosesErudition

* 또 다른 문이 열렸다.

1. 김광수 : http://cafe.daum.net/kseriforum

2. 김명석 : http://www.nownhere.com/mannam/

3. 박만섭 : http://econ.korea.ac.kr/new2/prof/prof.php?profid=mspark

4. 윤견수 : http://publica.cjnu.ac.kr/

5. 최정규 : http://bh.knu.ac.kr/~jkchoi/Site/Welcome.html

September 4, 2008: 8:15 pm: bluemosesErudition

* 몇 차례의 회식 자리에서 나눈 잡설과 사견, 그리고 가필

01. 성선설이든 성악설이든 ‘인격’의 개선 가능성이야말로 교육의 존재이유이다. ‘휴먼리소스의 레벨업’은 수월하게 이윤을 창출할지는 모르나 정의롭게 평화를 실현할 수는 없다.

02. 춘추전국시대 오백년을 토대로 쌓아올린 제자백가는 ‘리더십’의 보고이다. 최명 교수의 <춘추전국의 정치사상>을 정독할 필요가 있겠다.

03. 취향에도 품계가 있고, 품계는 안목에서 비롯된다. 다만 비등한 안목(氣)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성품(質)에 따라 취향은 다양할 수 있다. 주희에 따르면, “마음의 기(氣)가 맑은 사람은 지혜롭고, 흐린 사람은 어리석다. 질(質)이 순수한 사람은 현명하고, 잡된 사람은 불초하다. 기(氣)의 청탁(淸濁)은 앎에 관계되고, 질(質)의 수박(粹駁)은 행위에 관계된다. 기질에 따라 본성을 실현하는데 차이가 나고, 그것이 사람의 개성을 좌우하게 된다. 요컨대 사람마다 개성이 다른 것은 인의예지의 본성이 기질의 차이에 따라 발현되는 모습이 다른 데서 기인한다.”

04. 인사란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 간에 존경을 표하는 것이다.

05. 입력은 주관적으로, 출력은 객관적으로.

06. 그것이 진리라는 확신과 더불어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거든 말을 아껴라.

07. 너는 지위/실력/인격/신앙 순으로 나를 평가하나, 그는 신앙/인격/실력/지위 순으로 나를 세워간다.

08. 빠져나갈 구멍을 남겨두지 않으면 돌아서서 할퀸다. 상대의 일리를 수긍하고 쟁점 위로 올라서라. 마치 뜀틀 하듯.

09. 인간의 법으로 신의 법을 재단한 ‘아이히만’의 변명, “공의를 위해서라면 살인할 수 있다.”

10.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곧 주권의 양도이다.

11. 약점에 자신감을 저당 잡히지 말라.

12. 개인적 인격과 사회적 인격을 혼동해선 안 된다. 가령 “시공사 사장에게는 소중한 아버지일 텐데, 그렇게 막말을 해서 되겠어.”

13. 대중은 불편케 하면 불평한다. 불평마저 억누르면 내부로 곪든가 외부로 터진다.

14. “몇 십 년이 흐르고 내 생각이 변한 뒤에 다시 들어도 녹음에 남아있는 해석만으로도 감동이 전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시간과 장소에 제한받지 않고 많은 사람들과 나의 음악을 나눌 수 있는 통로는 녹음뿐이다.” 장한나의 칼럼을 읽고 ‘키팅’ 선생님이 떠올랐다.

15. 언론에서 다루지 않으면 대중에게는 아무 일도 없다. 지난 8월 29일부로 조, 중, 동, 매경, 한경, 문화일보는 다음포털에 기사제공을 중지했다.

16. 안단테 칸타빌레. 천천히 노래하듯이.

17. 아무리 상관없다고 부인할지라도 ‘중력’의 법칙 마냥 어쩔 수 없이 종속될 수밖에 없는 ‘구원’의 문제

18. 성공적인 대담의 관건은 상대방의 마음이 닫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19. 실종신고 - 배려, 사망신고 - 애정. 왜 나는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 없는가.

20. 인상 혹은 성향 비판은 미성숙한 성숙의 한탄이거나 성숙한 미성숙의 치기이다.

21. 위선에 목숨을 다하면 진심이 될까?

22. 험담하지 말자. 이것 또한 순결과 결부된다.

23. 팔월의 마지막 날, 매미의 울음은 멈췄고 나는 어른이 됐다. 늘 동일한 길이를 유지했던 점선은 두 개의 점이 됐다. 하나는 마음이 없었고 다른 하나는 여력이 없었다. 김샌 맥주를 한 잔 들이 킨 셈이다.

24. 현지화는 ‘상이한 문화적 배경으로 인한 소구력 감소’(cultural discount)를 만회하기 위한 노력이다. 문제는 ‘무엇이 그리고 어디까지가 본질이냐’이다.

25. 회개해도 다짐해도 변화되지 않을 때 무의식적 기제를 조명하고 변화에 대한 열망과 함께 치유를 도우시는, 성령

26. 칭의는 상태가 아닌 신분의 변화이다.

27. 감정적 소통의 결렬로, 매일 만나도 소원한 사람에게는 무신경으로 화답하라.

28.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자발적 순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권위에서 나오며 그 권위는 진리와 거룩에서 나온다. (신8:2~3, 벧전3:15~16, 딤후2:15, 마10:6, 민12:3)

29. 습기(지지)를 얻지 못한 태풍(정책)은 상륙(실행) 후 소멸하고 만다.

30. 존양 없는 궁리는 맹목적이고, 궁리 없는 존양은 공허하다. 그리고 양자 모두 패악을 내포한다. 예를 들면, 이라크전과 가미카제가 그러하다.

31. 환상을 각성한 자아 곧 주체는 재차 현실로 도피하거나 환상의 전복을 기도한다. 후자의 경우 선결과제로 자아부인이 요구된다. 네오처럼.

32. 상상계와 상징계의 간극으로 환상이 균열될 때 실재계로부터 주체가 출현하여 현실에 개입함으로써 환상을 보수한다.

33. 적극적으로 평판을 관리하라. 나의 이미지는 네가 가진 나의 모든 것이다.

34. 금융의 시대가 저물고 실물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가치투자라는 이름으로.

35. 궁리와 존양을 함께 제고할 수 있는 방편, 음악. ‘음악에도 이치가 있다.’

36. 의리의 재발견. 올바름과 이로움의 일치. 논어 이인편에 따르면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37. “헤겔은 <<역사철학 강의>>에서 ‘하인의 눈에는 영웅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위대한 영웅이라 칭하는 사람이라도 일상 생활을 공유하는 하인에게는 그 사람의 영웅적 면모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38. 감정의 기복으로 표리부동한 자에게는 냉담하라.

39. 정의 없는 힘은 위험하지만 힘없는 정의도 곤란하다.

40. 극한의 피해의식을 집단적 프라이드로 승화시킨 참호 속 동지회

41. ‘안보보수’와 ‘시장보수’

42. 초라해지면, 영합층은 흩어지나 비토층은 뭉친다.

43.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무엇을 진실로 생각하느냐이다.

44. 구심점 없는 조직은 지리멸렬해진다.

45. 파킨슨의 법칙 : 업무증감과 상관없이 관료행정의 비대화에 따른 부하배증

46.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지성이란 실은 혐오를 기반으로 한다. 왜냐하면 지성이란 지식의 축적도 실천의 조합도 아닌 ‘세계에 반응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김수영이 말했듯, 여느 사람들이 제 앞의 문제에만 반응할 때 지성을 가진 사람은 세계의 문제에 반응한다. … 나는 베른하르트에게서 지성의 한 정점을 본다. 그는 우파로 하여금 제 속물성을 자인하게 하며, 좌파로 하여금 제 이상의 결핍을 보완하게 한다.”

47. 어떠한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은 이데올로기이다. 이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48. 정당과 괴리된 시민사회는 정치적 소외 혹은 포섭적 배제가 구축한 사이비-공공영역이다.

49. 그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50. 현실사회주의 붕괴 원인 : 수요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생산이 저조했던 이유, 노동력과 노동의사를 노동으로 전환시키지 못한 이유, 시장개방이 국영체제의 해법으로 등장한 이유

51. 데일 카네기의 저술은 ‘역행’에 도움이 된다. 다만 뿌리 뽑힌 ‘파란 수국’은 냉담히 시들 뿐.

52. 라틴어로 ‘나쁜(mal) 공기(ari)’라는 뜻을 지닌 말라리아는 모기를 통해 감염된다. 그러고 보면 알렉산더 대왕도 모기에 물려 죽은 셈이다.

53. 재물을 나누지 않으면 마음이 나뉜다.

54. 부정화법이 입에 밴 사람에게는 뭐든 간결하게 답변한 후 질문을 던지거나 자리를 피하라. 상대방에게서 최선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 능력, 그것이 바로 인격이다.

55. 혼전순결은 문자 그대로 육체의 과거로 인해 미안해하거나 민망해하지 않는 것이다.

56. 셀프-리더십은 형용모순이다. 그냥 ‘자기 관리’라고 하는 것이 낫다.

57. 기존의 무언가를 바꾸고자 할 때 다음의 두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시행착오 과정. 둘째, 관련기관 실태.

58. 이익은 집중시키고 비용은 분산시켜라 - 인플레이션. 역은 곤란하다 - 실업.

59. 성취심리 강의에서 ‘슬럼프 극복’ 방안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60. 부의 가치란 곧 기회비용의 크기이다.

61. “결정적인 것은 그것에 포함되는 요소가 아니라 그 요소들의 혼합 비율이다.”

62. “정치와 권력 속에서 인간성은 훼손되고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스러운 정치 행위 속에서 인간은 보람을 느끼고 성숙해간다.” - “그래야 한다, 그것이 본래 정치다.”

63. 상대적 합리성에 의해 ‘공평에 대한 인식’이 학습된다.

64.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의 자유‘란 ‘목줄에 이끌려 산책 나온 강아지의 자유’와 다를 바 없다고? 글쎄 그건 ‘근대의 자유’를 너무 낭만적으로 해석한 것에서 비롯된 비아냥이 아닐까. 근대의 자유는 관념이 아닌 욕망의 함수이며, 이는 개인의 소유권에 토대한 궁극의 객관적 실체인 국가에 의해 옹호되었으나, 지구화 시대를 맞이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국’을 기반으로 존재하는] 초국적 기업을 필두로 그 뿌리를 국경 너머까지 뻗어 자양분을 획책하기에 이르렀을 뿐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의 ‘자유’는 주머니 속의 송곳 마냥 자신을 비호해준 국가 마저 뚫고 나온 셈이고, 마치 금에 의해 보장되지 않는 달러처럼 활개치고 있을 따름이다. 자유라는 기표에 온갖 숭고한 기의를 쑤셔넣지 말자. 관건은 ‘자유로운 인간이 무엇을 하기 원하는가’이다.

65. ‘저렇게 변한 건 지독하지 못해서야.’ 폭력성을 차치한다면, ‘자원하지 않은 변화’의 시비는 명분의 적부에 달려 있을 텐데, 그렇다면 문제는 그 명분이 폭력성을 간과할 만큼 정당한가에 있다. 왈쩌의 주장대로, ‘정당한 전쟁’은 성립 가능한가.

* 결론 : 적당히 아는 것은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