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October, 2007

October 21, 2007: 9:11 pm: bluemosesErudition

  그[도올]는 철학에서의 리얼리즘이 “중세보편논쟁에서 개체적 실재성을 주장한 유명론자들(Nominalists)과 반대 입장에 선 매우 보수적인 사상”이라고 한다. 이게 뭔 소리인가? 내가 알기로 유명론은 보편적인 존재가 하나의 명칭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인식론의 학설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식론에서 거론되는 한, 학설 이론의 보수성/진보성을 논하는 것은 황당무계한 태도이다. 왜 이런 오류를 버젓이 써놓은 것일까. 독자 중에 철학개론 한 쪽 들여다본 이도 없을 거라 생각한 걸까(미디어 오늘, 071017).

  “보편자가 실재한다는 측을 ‘보편-실재론(realism)’이라 하는데 거기에는 두 견해가 있다. 하나는 그것이 객관적으로 개물에 ‘선행’해서 실재한다는 초월적 실재론이며(플라톤, 안셀무스), 다른 하나는 그것이 개물들 가운데 ‘공통’하는 개념으로 있다는 내재적 실재론이다(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명목론(nominalism)은 보편자의 개념 내 실재성을 극단화하여 보편은 개물 뒤에 있는 하나의 ‘이름’일 뿐이라고 한다(스코투스, 오캄). … [예를 들어,] 보편-실재론자에게 인간성은 하나의 실재이지만, 명목론자에게는 실재하는 것은 개개의 인간들 뿐인 것이다(<<철학의 제문제>>에서 일부 발췌).”

: 2:21 am: bluemosesErudition

  “이들이 부리는 지식과 정보의 총량은, 그리고 그 앎에 떠밀리는 생각과 느낌의 포물선은 이들 나이 때의 나에게 견주어서는 물론이고 지금의 나에게 견주어서도 한결 크고 아리땁다. 나이는 한 사람의 지적, 정서적, 윤리적 성숙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알겠다. 나는 이들보다 두 배는 더 산 듯싶다. 다행이다. 나이 차가 이만큼 크지 않았다면, 나는 질투심 때문에 이들의 글을 읽기 힘들었을 테니.” 암기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October 16, 2007: 11:18 pm: bluemosesErudition

관리자  [명사] 타인의 노동에 기생하면서 군림하려 드는 자  ≒ 부서장

October 14, 2007: 2:26 am: bluemosesErudition

“암기는 공부의 씨앗(核)이다. 씨앗 자체는 미약하나, 씨앗이 없으면 그 다음도 없다.” 맞다!

“흐릿한 연필심이 비상한 기억력보다 오래 간다. 정리하지 않으면 증발해 버린다.” 맞다!

* 1)정리하여 암기한 뒤, 2)’노트북’과 ’웹’에 항목별로 저장하고, 3)출력하여 3공 파일에 철한다.

October 13, 2007: 8:37 pm: bluemosesErudition

  그(녀)와의 대면은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의 초라한 외피를 확인하고선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했다. 성심성의를 다한 말과 행동은 싸늘한 홀대에 내쳐져 알량한 자존심과 함께 무기력하게 땅에 떨어지기 일쑤였다. 하염없이 고역을 치렀다. 두찬과 다를 바 없는 통념으로 버무려진 담화에 애써 경청의 몸짓을 취했고, 호응도 표했으며, 드문드문 의사도 피력했다. 그러나 안쓰러운 분투도 결국 ‘쓰던 안경 벗어주기’나 ‘식은 양배추국 데워 주기’ 중 하나로 그쳤다. 대화하고 있었으나 소통할 수 없었다. 자기 깜냥으로 획득한 사회경제적 비교우위나 호가호위를 통한 자기권능화가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고 진의를 헤아릴 필요성마저 폐기시킨 듯했다. 분통을 삭이기 힘겨웠다. 세상 물정 모르는 서생이나 현실을 공전하는 몽상가로 취급되는 것은 무지의 소치나 대안의 부재 아니면 정신의 착란 때문이니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괴뢰 마냥 그들의 비위에 맞게 스스로를 방기하는 나의 추태를 용납하기 어려웠다. 속인을 현혹할만한 권세를 갖추지 않은 과거가 한탄스러워 설핏 가슴이 먹먹했다. 그리고 이내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지 못하는 현재가 애처로워 자괴감에 몸서리쳤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라 자위하나 마음의 생채기는 쉽사리 아물지 않는다. 일단, 한 가지만 명확히 해두자. 피차 지금의 모습을 견지한다면, 우연이 아니고서는 재회하지 않는 것이 낫다.

October 10, 2007: 10:48 am: bluemosesErudition

  한미 FTA 체결에 이어, 유력한 대선 후보의 이른바 ‘교육 자율화’ 발표로 인해 ‘이민’은 심각히 고려할 문제가 되었다. 유심히 지켜 보아야 한다. 어떠한 심성적 논리를 토대로 국민들이 자결()하여 자결()하는지. 현재는 파시즘이 ‘생성’될 수 없다. 이미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파시즘을 정의할 때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연상하는 것은 보수색 짙은 중년의 치정(癡情)을 극단적 사도마조히즘으로 조망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더불어 민족주의는 모든 계급에 호소하는 동원 기제에 불과하니, 보다 적합한 대체물이 등장할 경우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볼 수 없다. 따라서 물질적 재생산이 곤란한 자본주의 체제 위기 속에서, 좌/우파 어느 쪽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정치적 지형 가운데, ‘모든 계급에 호소하는’ 이데올로기에 의거한 대중의 자발적 동의를 통해, 기존의 소유관계를 폭력적으로 고착하는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997년부터 2009년[FTA 발효와 파급효과 그리고 新정권의 행보 고려]에 이르는 인민의 심성 변화 과정을 파악해야 한다.

October 9, 2007: 2:58 am: bluemosesErudition

원칙과 근거가 명확하지 않으면, 궤변에 휩쓸려 주장을 관철시킬 수 없다.

: 2:35 am: bluemosesErudition

  ‘구원 없는 행위는 공허하고, 행위 없는 구원은 맹목적이다.’ 양자의 이율배반을 해결할 실마리는 ‘믿음’에 내재된 이중 가치 체계(double value system)에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복음, 곧 신적 권능에 의거하여 구원을 이뤄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를 상품의 가치실현에 비유하면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모든 인간[물건]이 신자[상품]는 아니며, 모든 신자[상품]가 구원[교환가치]을 얻지는 못한다. 인간[물건]은 오직 믿음[생산]으로 복음[사용가치]을 시인해야만 신자[상품]가 된다. 그러나 신자[상품]가 성령[화폐]을 좇는 행위[유통] 속에서 삶의 주인이 변경되는 자기부인[판매 즉, 목숨을 건 도약]을 성취하지 못할 경우, 썩어 없어질 육신[재고]에 머물어 ”죽음[폐기]에 이르는 병”을 얻게 된다. 이처럼 복음[사용가치]이 전제되지 않을 시 구원[교환가치]은 가능하지 않거니와 구원[교환가치]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믿음에 따른 복음[사용가치]의 수용은 무익해진다. 따라서 구원 이후에만 믿음의 진위가 밝혀진다는 점에서 [가치평가에 대비되는] 기독 예정(론)은 사후적 관점의 고백(론)이라고 할 수 있다.

* 자기부인은 일생에 거쳐 수행되는 성화의 결과이다. 예수를 ‘주인’으로 시인하는 것과 예수가 ‘주인’으로 좌정하는 것은 다르다.

October 8, 2007: 1:11 am: bluemosesErudition

“‘1년 9개월 후’ 맞닥뜨릴 문제를 타개하고자 추급하여 시행하는 과제는 다음과 같다.”

October 6, 2007: 2:24 pm: bluemosesErudition

“He doesn’t mind skipping stages essential to the development of mastery

 if he can just go out and hack around with fellow hack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