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부종합전형(이하 학종)의 임종은 기묘하다. 그 부고(訃告)가 임종에 앞서 정부에 의해 회람되었기 때문이다. ‘고교교육 기여대학 지원사업’의 매서운 부정. 어미가 자식을 죽인 학종의 부고에는 ‘공정성’이 시퍼렇게 새겨져 있고, 공정성은 ‘불신’을 대변한다.
“깜깜이 전형, 금수저 전형”으로 환언되는 불신. “깜깜이 전형”은 대학을, “금수저 전형”은 고교를 겨눈다. 고교와 대학을 향한 불신은 어떻게 점화되어 학종을 불태웠을까.
불신은 먼저 기득권의 불만에서 피어 올랐다. 수능 대비 ‘자녀의 몫’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학종. 수능 모집인원을 확대하면 합격자의 특구 쏠림은 자명함에도, 능력주의를 유감 없이 향유하지 못한 기득권의 불만은 점차 증오로 자라났다.
그렇다. 불신을 조장한 근원은 다름 아닌 기득권의 증오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보수언론의 논조가 한겨레 따위의 자칭 진보언론에까지 번진 걸까.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IMF 이후 20여 년 간 운동장은 가파르게 기울어졌다. 학종이 ‘가파른 운동장의 평형’에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태에 무지한 (혹은 선동에 동요된) 자칭 진보언론은 앞뒤 맥락 없이 대입을 상회하는 운동장의 기울기를 질타하였다. 타당한 대응은 이내 소실되고 편향은 거세져 갔다. “깜깜이”는 중의적인 조어였던 셈이다. 이것은 대학을 향한 비난이자 사회를 덮은 맹목이었다.
둘째, 학종은 “교사의 도움 없이 좋은 학생을 선발할 수 없”음을 천명하고 교사의 권위를 세워 학교교육을 돕는 전형이(었)다. 그러나 적잖은 교사가 맹목에 휩쓸려 학종을 오해하였고, 편의에 따라 ‘추천서’를 하찮게 여겼으며 때로는 ‘학생부’ 기록을 어딘가에 양도하였다. 게다가 수능이 불특정 다수와 경쟁하게 했다면, 학종은 특정 소수를 의식케 하였다. 모든 아이가 우리 모두의 아이는 아니었다. “금수저”는 민낯이었기에 분개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렇게 학종은 임종을 앞두고 있다. 학종의 공백을 점하고자 여러 세력이 ‘정책연구’란 명목으로 각축을 벌인다. 애석한 일이다. 학종의 종언과 함께, 이제 학생들은 하나 둘씩 학교의 울타리를 넘어설 것이다. 교실의 경계가 흐릿해져 지구가 학교인 시대, 대입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학종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