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석은 “EBS 다큐의 너무 저렴한 문제의식”을 혼쭐낸다. 학습의 동기(개천의 용)에서 교육의 목적(숨겨진 재능이 없는 사회)으로, 회개하고 정진할 것을 권고한다.
김한중 PD의 댓글은 설웁다. 본인의 열심만 혼신인 듯 부둥켜 안고, 작위적 연출을 견인하는 선택적 인지는 깨닫지 못한다. 세금으로 제작한 다큐. 계몽의 옷을 입힌 선동. 공익은 어렵더라도 교훈이라도 얻길 바란다.
서천석은 “EBS 다큐의 너무 저렴한 문제의식”을 혼쭐낸다. 학습의 동기(개천의 용)에서 교육의 목적(숨겨진 재능이 없는 사회)으로, 회개하고 정진할 것을 권고한다.
김한중 PD의 댓글은 설웁다. 본인의 열심만 혼신인 듯 부둥켜 안고, 작위적 연출을 견인하는 선택적 인지는 깨닫지 못한다. 세금으로 제작한 다큐. 계몽의 옷을 입힌 선동. 공익은 어렵더라도 교훈이라도 얻길 바란다.
첫 권의 첫 시.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_ 최승자, 「일찌기 나는」(『이 時代의 사랑』, 문학과지성 사 1981)
시, “나는 이렇게 들었다” “그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다. 시인은 우주가 불러주는 감정을 대필하는 사람일 뿐이다.”
1984년 최승자는 두 번째 시집 <즐거운 일기>를 출간하였다. ‘Y를 위하여’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오 개새끼 / 못 잊어!”
하이데거에 따르면, 시 짓기란 “낱말에 의한 존재의 수립”이고, 횔덜린은 “신들의 흔적을 죽은 자들에게로 가져오는”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다.
“사유함과 시 지음 사이에는, 이 둘이 모두 언어에 헌신하며 언어를 위해 애쓰고 자신을 아낌 없이 소모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숨겨진 친밀함이 편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또한 갈라진 틈이 있다. 왜냐하면 이 둘은 <가장 멀리 떨어진 산 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