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November, 2009

November 25, 2009: 6:44 pm: bluemosesErudition

“대학원 교육은 학생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도록 계획되고 진행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대학원 교육의 결과, 학생은 충분한 논의의 가치가 있는 연구 문제를 발굴하고, 논리적으로 하자가 없는 새로운 방법론으로 문제 해결 방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 1:40 pm: bluemosesErudition

“MB 정권의 감세 정책이 부자들을 위한 정책이라고 70퍼센트 넘는 국민이 동의하면서도, 정작 부자 감세 정책에 50퍼센트 넘는 국민이 동의한다. 부자들은 수백만 원의 세금이 줄어들지만, 본인들은 고작 5만 원을 덜 낼 뿐인데도 말이다. 이러한 존재를 거스르는 의식의 배반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것은 “내가 얼마를 내든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어차피 없다”고 보고, 소득을 보전하며 “현재의 처지가 아니라 ‘사장, 빌딩 소유주, 종부세 대상자’라는 미래의 입장에 자신을 투사하기 때문”이다.

: 1:12 pm: bluemosesErudition

“불안한 삶을 채워 주는 들러리 역으로 전락한 기복신앙적 믿음.”

November 24, 2009: 7:12 pm: bluemosesErudition

1) 축복과 저주는 분리 불가능하다.
2)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갈등과 혼란의 주범이다.
3) 출세주의와 분열주의는 일란성 쌍둥이다.

: 6:49 pm: bluemosesErudition

과소경쟁을 보호하고자 진보를 외치는 이들은 -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주축이 된 민주노총의 행태에서 알 수 있듯 - 과잉경쟁을 강변하는 보수와 결탁하여 헐벗은 대중(Homo Sacer)를 양산하고 있다. 작금의 현실에서 ‘보수인가, 진보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김종엽이 지적한 것처럼 경쟁의 이중 구조 내에서 결성된 ‘보수와 진보의 유착’을 염두에 둔다면, 대중은 “좌우가 아닌 엘리트와 투쟁해야 한다(강준만).” “지금 대한민국에서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사상이나 이념을 따지지 않고 벌이는 패싸움입니다. 양 진영의 꼭대기에 있는 극소수 엘리트들의 밥그릇 전쟁입니다(변희재).”

: 5:25 pm: bluemosesErudition

오오누키 에미코의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를 희곡으로 각색하자. 도전적 질문에 대한 육화된 답변이 전제되어야, 혁명을 연기하는 경험적 사유실험이 가능하다. 

November 23, 2009: 3:48 pm: bluemosesErudition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November 13, 2009: 2:42 pm: bluemosesErudition

영적 주도권을 지닌, 강인한 가장이 될 것. “영적 초원의 숫사자가 되어라.”

November 11, 2009: 7:17 pm: bluemosesErudition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당연한 것이 당연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기도 없이는 이유 없이 멀어지고, 이유 없이 쇠락한다. 은총이 아닌 세속의 시류 속에 영혼을 내어 맡기기 때문이다. 그렇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당연한 것이 당연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 7:08 pm: bluemosesErudition

사역에 함몰되는 이에게. ‘남은 힘으로 사랑하지 말고, 십일조를 떼어놓듯 소중한 이들을 먼저 사랑하자.’ 사랑의 동심원적 확장을 견지하지 않으면, 결국 사명도 무너진다. 그런 식의 사랑은 삶의 원천을 당연시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홀대하며, 하염없이 외연의 [경계가 아닌] 위계를 올라서기 때문이다. 사명이 야망으로 변질되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자.’(마6:33) 위계에서 경계로 나아가자. 이것이 바로, 은송림이 지향하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