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존 라일(2005). 배용덕 옮김, <휫필드와 웨슬리>, 부흥과개혁사.
2. 밥 로스(2005). 구지원 옮김, <그림으로 읽는 스펄전 전기>, 부흥과개혁사.
3. 홍은혜(2010). <은혜의 항해>, 토기장이. “원일다락방의 시작 · 기적의 공동체”
4. 손창남(2008). <족자비안 나이트>, 죠이선교회.
1. 존 라일(2005). 배용덕 옮김, <휫필드와 웨슬리>, 부흥과개혁사.
2. 밥 로스(2005). 구지원 옮김, <그림으로 읽는 스펄전 전기>, 부흥과개혁사.
3. 홍은혜(2010). <은혜의 항해>, 토기장이. “원일다락방의 시작 · 기적의 공동체”
4. 손창남(2008). <족자비안 나이트>, 죠이선교회.
The Reification of Love is impossible
“Five hundred twenty-five thousand six hundred minutes / How do you measure - measure a year? / In daylights - In sunsets / In midnights - In cups of coffee / In inches - In miles / In laughter - In strife … In truths that she learned / Or in times that he cried / In bridges he burned /Or the way that she died” _ Seasons of love, Musical RENT
* “오십이만오천육백분의 귀한 시간들, 어떻게 재요, 일년의 시간”
1. 플라톤이 제안한 ‘국가’는 무엇인가? 국가의 기원은 ‘필요’이다. 다시 말해 비자족적 인간의 연계가 국가의 발단이다.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사회가 최소한도의 국가이고, 부차적인 필요인 욕망이 염증처럼 부어 오른 사회가 호사스런 국가이다. 욕망은 왜 생성되는가? 보편이 아닌 특수가 질서를 위계로 변질시키기 때문이다(참고: 고전12:26, 31).
2. 국가는 ‘필요를 넘어선’ 상태(kallipolis)에 도달할 수 있을까? 훌륭한 체제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그것은 각자의 발전이 모두의 발전의 토대가 되는 조화를 기반으로 하며, 이러한 조화가 플라톤이 규정한 正義이다. 체제의 조화는 영성의 조화에 근간한다. 필요는 체제를, 체제는 영성을, 영성은 교육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체제는 영혼의 전환에 의거한다. 이것이 교육의 과제이다.
3. 관건은 영혼의 전환을 도모하는 교육이다. 그것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자신의 부단한 進步와 부단한 不認. 자기가 있는 동시에 자기가 없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체제와 영성의 조합인 ‘마음의 체제’는 비판과 대안의 접점인 ‘끝의 시작’이며, 자아의 위계에서 자아의 경계로 마음의 체제를 변혁하는 교육의 요체는 ‘사랑’이라 할 수 있다(참고: 마22:36~40, 고전13:7, 10).
1. “버블제트라면 대개 기뢰에 의한 충격입니다. 만약에 수평에서 어떤 폭발을 했고 그것이 수면에 작용을 한다면 그것은 수중충격파라고 이야기하지 버블제트라고 이야기하지 않거든요. 어뢰라고 한다면 수평충격파인데, 그것만 갖고는 배가 두 동강이 나지 않죠. 역시 어뢰라고 하는 것은 … 폭발물질에 접촉을 해야 되는 겁니다.” 물론 “절단면의 위, 아래[가] X자 모양으로 나와 있고, 그것을 버블제트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라고 한다면 옆에서 치고 있는 어뢰에 의한 측면파괴라기 보다는 기뢰에 의한 수직폭발에 가깝다는 거죠.” 그러나 “사망자나 실종자 상태, 또 생존자 상태를 보면 말이죠. 과연 이게 과연 강한 폭발물에 의한 거냐, 하는 데 여전히 의구심은 남아요. 격실이 튼튼하다고 하지만 오히려 수병들한테는 충격이 더 강하게 전달됐을 거고요. 또 2차 세계대전 사례를 연구한 1990년대 자료가 있습니다. 미국 해군대학교에서 나온 자료인데요. 그것을 보더라도 실종자, 사망자, 부상자가 동시에 다 발생을 해야 되고, 또 내장이나 장기 동공파열 등이 있어야 되고, 선체에서 튕겨져 나간 수병이 있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천안함의 경우에 보면 함미에서는 전원 익사하고 함수에서는 대부분 경상이라 말입니다. 현장 해상에서는 사망자는 없고, 산화자로 분류된 분은 실종자에 가깝고, 이런 것을 보면 역시 폭발물 충격의 특성과는 좀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박선원)
2. 천안함 침몰 원인은 무언가에 의한 수직상승이다. 보수 진영의 ‘피격’ 성토에 맞서 진보 측은 ‘좌초’를 강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침몰의 원인은 거품과 암초 둘 중 하나인가? 박선원은 전자의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한다. 그럼 후자인가? 이 또한 가능성이 미미하다. “무언가”는 무엇이었을까? 제2의 통킹만 사건으로 귀결될 바에는 차라리 영구미제로 기억되길 바란다. 열상감시화면 은폐(’10. 3. 26.), 함미 늑장 탐색(’10. 3. 27. ~ 3. 29.), 중어뢰의 비접촉 폭발 충격파bubble jet로 인한 침몰 추정(’10. 4. 16), 황장엽 암살조 체포(’10. 4. 21.).
1. 교실붕괴를 몸소 체험하였다. 첫 만남 부터 선생을 계약제 노예처럼 대하려 드는 아이들이 있다. 금전으로 인격을 조롱하는 어느 여중생에게. “실력만 없는 줄 알았더니 예의도 없구나. 선생이 가르칠 수 없는 학생이니, 수업료 받고 나가라. 애초 인격적 유대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금전관계가 가능했을 거라 여기나.”
2. 공교육 정상화를 사수하는 이들과 사교육의 우위를 내세우는 이들 사이에서, 양지와 음지 가운데 한 발씩 걸친 나는 내적 모순 - 하나의 ‘앞면’과 ‘뒷면’인 둘은 한쪽을 ‘정상화’할수록 다른 한쪽이 ‘공고화’된다 - 을 지양하는 변증법이 무용한 영역도 있음을 깨닫는다.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하더라도 근대의 학교는 ‘선발’로 환원되는 한 그런 존재인 것이다.
3. 경제학자 Bowles와 Gintis에 대한 교육사회학계의 비판이 적지 않지만, 학벌이 취업의 발판인 이상 ‘경제와 교육’은 주종관계의 형태를 유지하기 마련이다. 그들은 ‘본질’이 아닌 ‘현상’을 기술하였던 것이다. 경제학자가 교육부총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국가에서 교육경제학이 아닌 ‘사회의 교육’을 거론하는 것은 논외 밖이다. 애처로운 대안이다.
1. “조선은 문치주의 사회였다. 학맥을 통해 정치세력을 형성했고, 그 사상과 이념에 따라 정책과 노선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 정책과 노선을 통해 백성들의 삶 속에서 검증을 받고, 그 검증을 통해 권력을 차지하느냐 못하느냐가 결정되던 시대였다.” “그동안 사람들은 조선시대에 ‘봉건’이라는 굴레를 씌웠다. 신분적 억압, 부자유, 남녀차별 등 계몽주의 서사가 덧칠한 ‘과거’, ‘전통’의 다른 이름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인식을 벗어날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오항녕, 2010)
2. 위 “주장에 따르면 사람들은 조선시대를 계몽주의의 서사로써 덧칠했다. 그 결과 조선시대는 신분적 억압, 부자유, 남녀차별이라는 것들로써 특징지어졌다. 달리 생각해보면, 조선시대에 신분적 억압, 부자유, 남녀차별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사태를 왜곡한, 계몽주의적 서사의 덧칠인 것이다. 그렇다면 강명관의 <<열녀의 탄생>>에 등장하는, 시부모의 병을 낫게 하려고 허벅지 살을 베어내 끓여먹이고 국가의 표창을 받은 열녀의 행실과 그것을 장려한 것은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성리학적 이상이 넘쳐 흐르는 고귀한 사회의 충실한 성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자기의 육신을 희생함으로써 잃어버린 나를 되찾아가는 행위’라고 해야 하는가.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억압기제”아닐까. 억압기제는 근대 계몽주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체제’는 필연적으로 억압기제를 파생시킨다.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체제는 “이념형 조직”을 운용한다. 어쨌든 저자는 조선시대의 실상을 왜곡하면서 계몽주의 서사가 잘못 덧씌운 것을 입증하기 앞서 강명관의 <<열녀의 탄생>>이 조선시대사에 대한 왜곡임을 입증해야 할 듯하다. “이 책에서 독자가 읽게 되는 저자의 착상과 연구노트, 특히 현대적 논의와 관련된 부분은 ‘혹세무민’의 우려가 있는 ‘迂闊한 소리’이므로 철저히 간과해야 할 것이다.”
3. “<곁에 두는 세계사>를 보니 1670년과 1671년 조선에서는 ‘경신 대기근’이 발생했군요.”(gaudium)
4. “서울대 이태진 교수는 조선왕조가 대기근을 타개하기 위해 매관매직을 하여 일반 백성들을 구제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른바 ‘17세기 행성충동설’인데요. 지난번 석학 강좌 때 그리 얘기하더군요. 이태진 교수 주장은, 흔히 조선의 멸망 원인으로 지목되는 매관매직이나 부정부패가, 실제로는 행성충돌로 인한 피해에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이었는데, 일제 식민사학이 이를 왜곡시켰다는 것입니다.”(cogitaum)
5. “왕만 공명첩을 팔아먹은게 아니라 세도 가문도 팔아먹었는데(이들이 더 팔아먹었겠지만) 이게 과연 ‘훌륭한 수단’인지 의심해보진 않는 모양이군.”(gaudium)
6. “18세기 영조와 정조의 시대가 조선의 문예부흥기요, 문화적 성세(盛世)라고 호들갑스럽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 그렇긴 하지만 이 시기 사대부 문화의 현상적 융성은 어디까지나 사대부 ‘문화 틀’ 속에서의 발전이요 변용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발전이란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명청대(明淸代) 중국 문화나 예술의 아류적 수용에 가까운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언진의 작품 <호동거실>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이러한 호들갑에서 벗어나 “18세기 조선 사대부 문화의 허상과 취약점, 그 국한성을 읽어 내는 하나의 중요한 시좌(視座)를 확보하게 된다.” 체제내화된 사대부들의 텍스트만 읽을 때에는 감지할 수 없는 반역성 - 근대성이 아니다 - 을 발견함으로써 시대에 대한 균형잡힌 통찰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7. “조선시대 말(末)을 한번 떠올려 보자. 1800년에 정조가 죽었다. 정조를 놓고 애상 띤 어조로 이런 말 하는 사람들이 있다. … 다산 정약용은 자신의 책 <<목민심서>>에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를 실으면서 그 사연까지 적어두었다. 그 시는 1803년에 강진에서 지은 것이다. 한 백성의 집에서 아이를 낳은 지 3일 만에 그 아이가 군적에 올랐는데, 그 집에서 군포를 내지 못하자 관에서 군포 대신 소를 빼앗아 갔다. 이 일을 당한 아이의 아버지는 칼로 자신의 남근을 잘라 버리면서 ‘이 물건 때문에 고생’이라 했으며, 그 아내가 그 남근을 들고 관가에 가서 호소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 정조 때는 태평성대였는데 죽은 지 고작 3년 만에 나라가 콩가루 된 걸로 봐야 하는가. 아니다. 그전부터 나라는 콩가루였다. 조선시대 각 신분계층 구성 인구 비율 통계가 그걸 말해준다. 1600년대 말 대구 지역을 예로 보자. 양반이 9.2퍼센트, 양민이 53.7퍼센트, 노비가 37.1퍼센트였다. 이 비율이 약 100년쯤 지나 1780년대쯤 오면 양반 37.5퍼센트, 양민 57.5퍼센트, 노비 5퍼센트가 되고, 1850년대 철종 때쯤 오면 양반 70.3퍼센트, 양민 28.2퍼센트, 노비 1.5퍼센트가 된다. 조선시대 말의 양반이 인구의 70퍼센트가 넘는 것이다. 영정조라는 현명하신 왕들도 이 도도한 양반 증가의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기를 쓰고 양반이 되려 했는가.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는 병역의무도 납세의무도 없었다. 인구의 30퍼센트가 70퍼센트를 먹여 살리는 나라가 정상인가. 고종이 도장 찍으며 자기 소유의 나라를 넘기며 제 잇속을 챙겼을 때 과연 30퍼센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면 21세기 한국은 다른가. 흔히 하는 말로 20대 80의 사회에서 80이 20의 특권층을 먹여 살리고 있으니 그나마 낫다고 할 것인가. 그런데 정말로 알 수 없는 것은 왜 이 대다수의 80퍼센트는 20퍼센트의 못된 버릇을 배우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억울하면 이를 갈아 부치며 세상을 갈아엎을 결심을 하지 않고 출세할 생각만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왜 그런가.”
8. “1829년에 순조 즉위 30주년 경하연을 베푸는데 흉년으로 함경, 경상, 충청, 전라도에 기민이 259만 5천명이나 발생한건 뭘로 설명하나? 참고로 184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그때 조선 인구가 670만 1,629명. 그러니 259만여명이 기민이었다면 나라가 절단나는 수준이었다고 할밖에.”(gaudium)
9. 정조 사후 양반 수의 폭증과 함께 ‘하드리버그 = 조선’이 연상된다. “물적 토대”가 허술한 “통치 이념”은 정당화 명분일 뿐, 견고한 윤리를 존속시키지 못한다.
A. “조선을 보면 참으로 싸가지 있는 나라같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건 왜 그런 싸가지 있는 나라의 왕족과 정승들이 나라를 팔아먹었을까 하는 것이다.”(gaudium)
B. “그들이 ‘싸가지’를 강조하여 얻고자 한 것을 나라를 팔아먹음으로써 얻을 수 있었기에 그리했으리라 생각합니다.”(cogitaum)
C. “통치이념을 팽개친 순간 [차마 표출하지 못했던] 돈독이 화악 올랐다고 봐야겠군.”(gaudium)
* ‘조선’과 ‘동독’은 각각 이념과 체제의 한계를 보여주는 실례이다.
내면의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해서 존재의 변화를 도모하는 자(Homo Educa)는, 영혼의 전환이 개인의 힘으로 불가능하고 공동체에서 살아감으로써만 성취 가능하기에 그것을 더불어 지향하는 공동체(Community of Praxis)를 추구한다. 일례로 恩送林을 들 수 있다.
“철학자들이 나라들에 있어서 군왕들로서 다스리거나, 아니면 현재 이른바 군왕 또는 ‘최고 권력자’들로 불리는 이들이 ‘진실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을 하게(지혜를 사랑하게)’ 되지 않는 한, 그리하여 이제 즉 정치권력과 철학이 한데 합쳐지는 한편으로, 다양한 성향들이 지금처럼 그 둘 중의 어느 한쪽으로 따로따로 향해가는 상태가 강제적으로나마 저지되지 않는 한, 여보게나 글라우콘, 나라들에 있어서, 아니 내 생각으로는 인류에게 있어서도 ‘나쁜 것들의 종식’은 없다네.”(473c-d)
“소크라테스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런 말씀을, 그런 주장을 털어놓으셨는데, 일단 그런 말씀을 하셨으니, 선생님께서는 각오하고 계셔야 합니다. 그야말로 많은 그리고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이를테면 일제히 웃통을 벗어던지고서는 맨 앞으로 저마다 닥치는 대로 무기를 들고서 놀랄 짓들을 저지를 양으로 힘껏 달려올 것이라는 걸 말씀입니다.”(473e)
“만일에 우리가 자네가 말하는 그 사람들을 어떻게든 피해 볼 작정이라면, 철학자들이 통치를 해야만 된다고 우리가 감히 주장하고 있는 그 철학자들이란 어떤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인지를 그들한테 정의해 주어야만 될 것 같으이.”(474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