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November, 2010

November 29, 2010: 11:54 pm: bluemosesErudition

‘표준점수’는 통계학적으로 정규분포를 만들고 개개의 경우가 표준편차상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보여주는 차원없는 수치이다.

* Z점수 = 원점수 - 평균 / 표준편차

: 11:42 pm: bluemosesErudition

투자의 이자 탄력성(Investment/Saving) - 투기의 이자 탄력성(Liquidity preference/Money supply)

* 화폐의 근간, 이자

: 12:06 pm: bluemosesErudition

1. 푸코에 대한 몇 가지 오해

“푸코 자신이 (후기)구조주의자라는 명칭을 강력히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 푸코의 사유를 광의의 의미로라도 ‘구조주의적’이라 칭할 수 있는 시기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1960년대 말까지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오해는 푸코를 이른바 포스트 모더니스트로서 바라보는 관점이다. 푸코는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말을 자신의 저작 혹은 대담에 걸쳐 단 한 차례도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현대의 영도(零度)인] 근대와 근대성을 중시하는 사상가로서 그러한 문제틀을 명백히 거부하고 있다.” “푸코의 권력지식론은 … 일반적으로 상정되는 이른바 억압/해방의 가설을 명백히 거부 혹은 제한한다.”

2. 푸코 수용의 몇 가지 과제

“푸코 사상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번역본의 확립이 시급하다.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그의 저술들 중 국내에 번역된 것은 어림잡아 보아도 프랑스 현지 저술 분량 전체의 1/3도 되지 않는다. 여기에 번역의 질이라는 문제까지 더 해진다면,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푸코가 사용한 개념들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 주요 개념어 사전의 발간, 그리고 이제까지 국내에서 저술되거나 번역된 푸코 관련 연구서ㆍ논문 등을 망라한 서지 및 일람표의 작성ㆍ발간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허경, 고려대 철학연구소)

: 3:26 am: bluemosesErudition

Even if I knew the world would end tomorrow, I would continue to plant my apple trees.” That is the statement of faith traditionally attributed to Martin Luther. Some skeptic recently challenged the world of scholarship to demonstrate exactly where Luther had ever made such a declaration, and nobody could find an exact source. … It does not greatly matter, for the statement itself is one of abiding hope and abiding truth.

: 2:46 am: bluemosesErudition

본 서한집은 배영진 목사가 2005년 5월부터 2010년 9월까지 주보의 지면을 빌려 하늘문 성도들에게 전한 글들을 ‘성화의 견인’이라는 주제 하에 엄선하여 엮은 것이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존 오웬(John Owen)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목회자를 세우신 것은 성도들이 그를 통하여 참으로 신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참으로 신자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지표이자 여정으로서, 성화(聖化)의 완곡한 정의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화는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The Letters of Jonathan」에 면면히 배어 있는 애통이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서 신자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단지 주님을 앙망하십시오. 그러한 자세가 곧 주님께 우리의 삶을 양보하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사랑에 자신을 완전하게 내어맡기는 것만이 우리의 삶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비결입니다.” 이러한 권면을 대할 때 우리는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가. 대개의 경우 좌절한다. 그 숭고한 경지를 추앙한 들, 과연 어떻게 자아를 부인할 수 있다는 말인가. 목적에 이르는 길에 무지하다면 성도는 이따금 차가운 열정을 데워 피상적인 간증을 나눌 뿐 인격의 변화 곧 성화의 도정에 오르지 못한다.

유소년 시절 구타를 일삼은 부모 밑에서 성장한 자녀는 그것의 부당함을 인지하고 혐오하나 답습한다. 왜 그러한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성화의 열쇠를 제공한다. 신자는 분명 죄의 불의와 귀결을 알고 더욱이 상한 심령으로 통회하나 악을 따른다. 때로는 자신을 탓하고 때로는 ‘어쩔 수 없다’며 현실을 개탄하나 여전히 결론은 동일하다. 죄악을 행한다.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신자가 사후(ex post)에 여호와의 질책이 두려워 자위의 수단으로 죄를 회개할지언정, 사전(ex ante)에 주의 은혜에 감격해 탐욕을 미워하며 죄를 절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악습의 원인은 죄죽임(mortification)의 결여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두 가지 경로를 통해 구축되어 정체성 - 이를 일컬어 성경은 ‘견고한 진’이라 한다 - 을 형성한다. 첫째가 ‘구조화된 구조’로서 사회의 체제에 따라 형성되는 마음판(Regime of Heart)이고, 둘째는 ‘구조화한 구조’로서 내면의 성향에 의해 보강되는 마음틀(Frame of Heart)이며, 상술한 양자가 결합하여 신자의 활동에 자기구속성을 행사하는 ‘행위 규범의 복합체’인 마음의 정체(政體, Institution of Heart)를 구성한다. 신자의 영혼은 마음의 정체가 선호하는 경향성에 따라 좌우되어, 외부의 접촉으로 생성되는 정념(passio)이나 내부의 상상으로 발현되는 정욕(epithymia)의 방향을 결정한다.

배영진 목사의 서신에 정신분석학적 접근이 기저에 배태되어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본서가 추구하는 성화란 마음의 정체를 변혁함으로써 죄의 작용을 통제하고 추동하는 내면의 체질을 개편하여 죄악이 아닌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며, 이러한 성화의 견인은 조나단의 서신 속에 목회의 5가지 요소인 ①예배, ②교육, ③교제, ④봉사, ⑤전도와 조응하여 총체적으로 기록되어있다: 성화의 근원인 ‘예배’와 단계별 변화를 도모하는 ‘교육’, 사랑의 동심원적 확장을 지향하는 ‘교제’와 그것이 가정교회를 통해 체계적으로 실현되는 ‘봉사’, 그리고 앞선 모든 것을 통해 감당하는 사명 ‘전도’.
  
성화는 요란한 자기의지를 포기함으로써 온전한 자유의지의 회복을 지향한다. 다시 말해 자기가 있되 자기가 없어야 하기에, 성화는 [자신의] 성화 자체가 목적일 경우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다. 따라서 성화로 가는 길은 반드시 하나님과 인간을 잇는 공동체 가운데 있다. 하늘문 교회 성도는 이와 같은 신조를 공유하고 또한 유념하고자 배영진 목사의 5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본 서한집을 기획하였다. 탐욕이 팽배하여 오만과 절망으로 점철된 극단의 시대에 위계의 제고를 포기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경계의 확장을 희구하며 「The Letters of Jonathan」를 편집 출간한다.

2010. 9. 10, 편집부 적음.

: 2:34 am: bluemosesErudition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신30:20) “여기서 ‘부종(附從)하다’라는 말은 ‘접착제 같은 것으로 말미암아 벽에 딱 달라 붙어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님과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연합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추구했던 삶은 이렇게 온 마음과 영혼으로 하나님께 붙어 있는 삶이었습니다.”(김남준, 2010: 108~109) 

: 1:04 am: bluemosesErudition

“로마인들은 장사와 상업을 관장하는 신을 메르쿠리우스(Mercurius)라고 불렀다. 원래 물건과 물건을 맞교환하는 물물교환에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없는 물건을 교환을 통해서 얻는 것이므로, 교환으로부터 특별히 이익을 취하려 하지 않았다. … 서양 고대인들은 장사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물건을 사들인 값 그대로 물건을 판다면, 장사하는 사람에게 남는 것이 없을 것이고, 따라서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는 물건에 많은 말을 덧붙이고, 심지어 말을 바꾸는 일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서양 고대인들은 장사꾼을 수다쟁이, 혹은 거짓말쟁이로 멸시했다.”(안재원)

* 메르쿠리우스는 탐욕(pleonexia)과 정욕(epithymia)의 표상이었던 셈이다.

: 12:49 am: bluemosesEru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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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48 am: bluemosesErudition

1. 기도의 자세

“우리는 그 동안 기도를 우리가 원하는 무엇을 얻어내는 수단으로만 생각했지, 자신의 성화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릅니다. 필요한 것을 간구하는 청구용 기도와 성화의 작용에 효능이 있는 성화용 기도가 따로 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 기도가 죄를 죽인다고 말할 때, 죄를 죽이는 그 효과는 기도 제목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에 쏟아 붓는 마음과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거하는 자리가 입술이라면 거룩한 기도 제목들이 쏟아져 나올 때 그 제목들을 들으면서 죄가 죽어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의 자리는 우리의 입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비록 기도의 내용이 세상적인 것처럼 보여도,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며 열렬히 기도하면 그러한 실천을 통하여 죄는 죽습니다. 죄를 죽이는 것은 기도의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하고 그분께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죄는 마음의 시선으로 하나님을 주목하며 우리의 중심을 정직하게 쏟아놓을 때,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비로소 죽습니다.” “따라서 중언부언하는 기도 생활은 죄를 전혀 위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아예 기도 생활을 안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거하기 좋은 환경을 죄에게 제공합니다. … 터널식 세차기에서 세차를 할 때면, 우리는 차 위로는 물이 소낙비처럼 쏟아지지만 차 안에는 한 방울도 물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경험합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기도한다 할지라도 그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 마음 자체를 쇄신시키는 어떤 변화와 함께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안에 있는 죄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김남준, 2004: 24~27)

2. 설교의 퇴락

“복음에 대해 싫증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관심사가 실제적인 것들로 향합니다. 요즘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실제적인 설교를 해야 교회가 부흥을 하지!’ 그러나 복음 안에서 복음을 토대로 한 실제적인 것은 좋지만 복음에 싫증이 난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그 무언가를 가르쳐 주고자 하면 그것은 결국 설교 강단에서 울려 퍼져야 할 메시지가 아니라 회관에서 울려 퍼질 강연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 18세기 이후로부터 20세기까지 유럽의 교회들이 급속하게 황폐화되기 시작했습니다. …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라고 설교자가 외치면 사람들은 ‘누가 아니라 그랬나요? 우리 모두 그 말에 동의합니다. 다 아는 얘기하지 마시고 실제적인 것을 좀 얘기해 달란 말입니다!’라며 대꾸했습니다. … 그들에게는 복음에 대한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저 지적인 동의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의 요구에 반응한 설교단은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이 주일날 설교된 설교 제목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감자를 먹는 유익’,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즐거움’, ‘예방 주사의 중요성’, ‘양들을 가두어 기르는 것보다 놓아 기르는 것이 좋다’, 이 모든 것들이 자료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설교들이 강단을 물들이는 동안 교회는 하나둘 문을 닫게 된 것입니다.”(김남준, 2010: 148~149)

* 세속의 도전에 대한 신앙의 응전이 바로 기도요, 설교야 한다.

: 12:45 am: bluemosesErudition

1875년 “라살파(전독일노동자동맹)와 아이제나흐파(사회민주노동당)가 대립을 해소하고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을 결성하고 고타강령을 채택함. 1890년 사회민주당으로 개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