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anuary, 2007

January 29, 2007: 9:44 pm: bluemosesErudition

출력을 전제하지 않은 입력은 지적 노고를 수반함에도 불구하고 연구대상을 소외된 채로 남겨 두기에 피학적 유희로 그치고 만다. 그저, 단지 읽어선 안된다. 꼭 쓰면서 읽어야 한다.

: 3:13 am: bluemosesErudition

폭풍전야, 절박함이 없다면 뇌사상태와 다를 바 없다. 파국의 종말을 어떤한 모습으로 맞이할 것인가. 부디 끝에서 시작하라.

January 28, 2007: 6:02 pm: bluemosesErudition

“나는 인혁당 사건 관련자의 아들이다. 30년 전 어머니는 인혁당 사건으로 광주교도소에 복역 중이던 아버지를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에 광주 시내에서 “박정희는 참 나쁜 ×이다”라고 외치셨다. 그러자 바로 경찰서에 끌려가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온몸을 구타당한 뒤 노숙자 시설 같은 곳에 몇 달 동안 방치되셨다. 그러다가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었던 형사가 택시에 어머니를 태우고 우리 어린 형제들에게 데려왔다. 그때 어머니는 우리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셨다.

어머니는 그 뒤 병원에서 몇 해를 보내시다가 내가 중2(1981년) 여름방학 때 퇴원해서 나와 함께 시골 큰댁에서 주무시다가 내 품에서 고통을 호소하시며 돌아가셨다. 30년 전 한 여인은 대통령을 욕했다는 이유로 맞아 병원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 나의 어머니에게 욕먹은 그 대통령의 딸은 현직 대통령을 욕하고도 오히려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최근 인혁당 사건이 법원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30여년 전, 어머니와 추운 겨울날 손을 꼭 붙잡고 새벽기도회를 갔었다. 그때 큰 보름달이 언덕 위에 걸려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저희에게 저 달을 보면서 각자의 소원을 빌어보자고 하셨다. 그때 어머니의 소원이 바로 며칠 전 법원에서 판결한 아버지의 무죄 아니었겠는가? 최근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참 나쁜 대통령이다”라는 말로 세간의 이목을 끈 적이 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박정희 대통령이야말로 참 나쁜 대통령이었다(황세영/경기 고양시 일산동).”

: 5:20 pm: bluemosesErudition

위대함은 거대함과 다르다. 위대한 조직의 충분조건은 거대한 위용의 과시를 통해 충족되지 않는다. 거대한 조직은 하향식 통제로 인해 구성원의 다양성을 억압하고, 관리의 명목으로 비효율적 업무를 양산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경직된 규율과 규정에 의거해 개인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행동양식을 결정할 뿐더러, 이에 대한 점검과 검열의 차원에서 허다한 인원을 동원하여 업무를 위한 업무를 수행한다. 베버가 관료제의 폐단을 지적한 바 있으나 문제점은 시정되지 않고 있다.

위대한 조직은 ‘크기에의 충동’에 함몰되지 않는다. 또한 ‘품 안으로’ 세력을 규합하는 데 몰두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행위는 강자와 약자의 지배구조를 고착화하는 동시에 시장의 경쟁압력을 증대시킴으로써 사회관계의 비인간화를 가속화할 뿐이다. 위대한 조직은 본질적인 것에 일치를 추구하되, 비본질적인 것엔 자유를 허용하고 모든 것에 사랑을 부여함으로써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해 일손과 물질을 나눈다. 그리하여 작은 자가 천(千)을 이루도록 한다(사 60:22).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 하셨던 것처럼.

January 27, 2007: 2:48 pm: bluemosesErudition

“말로 설명하지 말고, 보여줘라. (중략) ’그는 키가 크다’라고 하는 대신 ‘그는 키가 184센티미터이다’라고 써 놓은 다음 두 문장을 비교해보라(안정효, 2006).”

업무보고 시 가장 중점을 두어야 할 사항이다. 형식적 혹은 통계적 사고 운운하며 투덜댈 문제가 아니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반응할 때, 두말 말고 보여줘라.

“The Showing of Darwin is better than the telling of Marx on popular communication.”

: 12:51 pm: bluemosesErudition

한반도 살길은 남북 경제통합: “이대로 종속적 기업전체주의 국가로 전락하는가? 공공성 작동하는 ‘신진보주의 발전모델’ 고민, 역동적 갈등 조정하는 정치 처방으로 정책정당 필요조건, ‘민족경제’ ‘지역경제’ 구상은 분단 극복으로까지 인식 확장.”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현재의 소비로부터 보류된 일부 생산물의 형태로서 사적으로 전유된 이윤에의 의존이 물질적 이해의 실현을 둘러싼 비결정적 투쟁의 기초가 되는 그러한 체제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정치적 행위를 정치적 참여로 구조화하는 동시에 정치적 투쟁을 단기적인 물질적 쟁점으로 축소시킨다. 그것은 물질적 이익을 둘러싼 갈등을 촉발하고, 또한 갈등을 그러한 문제로 축소시킨다. (중략) 헤게모니의 비용은 일정한 유형의 갈등은 반드시 허용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헤게모니의 효과는 오직 특정한 투쟁만이 조직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참호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Przeworski, 1995 : 192).”

January 23, 2007: 12:33 am: bluemosesErudition

“정치란 어떤 갈등을 선택하고, 어떤 갈등을 배제하느냐 하는 것을 본질로 하는 파워게임이다. 현실의 중심적 갈등을 배제하고 새로운 갈등으로 대체하려 할 때 정치가 갖는 파괴적인 양상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 정치를 부정적으로 보면서 정치 밖에서 외재적 제도를 부과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위험하다. 헌법이 잘못됐다, 단임제 때문이다 하는 식으로 정치 밖의 제도의 힘을 통해 안 풀리는 정치를 해결하려고 하면 결국 사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만든다. 대연정 시도도 같은 성격의 문제를 가졌다. 갑자기 반지역주의를 들고 나오면서 불평등과 양극화 등 우리 현실의 실제 갈등을 이데올로기적 허상으로 대체하려 하고 선거를 통해 성립한 정당정치의 구조를 일거에 대통합하자는 태도의 연장선에 지금의 개헌론이 있다고 생각한다.  (중략)  무엇보다도 노무현 정부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이유 중 하나는 노 대통령이 정치를 이해하는 방법과 그것이 가져온 매우 부정적 효과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사회의 광범위한 갈등이나 이해관계가 정당에 의해 대표되고 의회가 민의의 대표기구로서 역할을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그런데 당정분리를 내걸고 당과 국회의 역할을 가급적 우회하거나 회피하려 하고, 청와대 중심의 정책 산출, 전문가 중심의 정책 산출, 관료 중심의 정책 산출에 너무 크게 의존했다고 생각한다. 노 대통령의 이러한 정치관이 대연정이나 지금과 같은 헌법개정 추진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최장집).”

* 노무현 대통령의 자의적 의제설정과 권위적 규칙변경에 대한 최장집 교수의 비판적 분석: “노무현 대통령이 개헌 이슈 들고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의 문제를 과도하게 단순화하고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좋지 않다. 민주주의는 그런 것이라기보다 사회적으로 제기된 이슈와 의제에 대해 정치세력과 지도자들이 그 대안을 조직하는 데 있다.”

January 22, 2007: 10:19 pm: bluemosesErudition

표현의 절제는 그놈에게도 그녀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전자에게 부여된 법의 힘과 후자를 민망히 여기는

사회경제적 계층의식을, 넘어설 의지도 여력도 없는 내게,

또 다른 나는 침묵할 것을 종용한다. “그것이 최선이야.”

 

It’s not difficult to reproduce social structure.

January 21, 2007: 9:00 pm: bluemosesErudition

바람에 나는 겨가 되지 않으려면, 똥개가 짖어도 아랑곳없이 달리는 기차가 돼야 한다.

사명은 생명보다 귀하다. 기력은 쇠하기에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지는 시점이 

온다. 후회가 남지 않게, 살아가는 이유와 공부하는 목적이 일치하는 지점을 고수하자.

 

부흥의 씨앗[희망]이 결실[증거]을 맺기 위해선, ‘성령의 역사’와 ‘헌신의 규모’가 만나,

예배의 회복을 이룰 때 가능하다.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다. 이에 자족의

평안이 요구된다. 허나 헌신의 규모는 인간의 책임과 직결된다. 따라서 개혁의 용기가 

필요하다. 2년 6개월 뒤, 어떤 모습의 나를 맞이할 것인가. 선택하라.

: 7:36 pm: bluemosesErudition

교회의 보수성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외치는 이는 자칭 진보세력일테고, 회개하여 천국이 가까웠음을 깨우쳐야 할 대상은 교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우선, 진보세력은 교회를 비판할 수 있는가. 진보는 보수와 동일하게 인권을 기반으로 하되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모든 억압을 거부하고 사회적 규제로부터 개인의 해방을 구현한다는 명목 하에 낙태와 동성연애 등의 비윤리적(비성서적) 욕망마저 정당화하고자 한다. 교회는 진보와 보수의 범주로 귀속시킬 수 없다. 교회는 [약자 및 소수자와 연대하여 강자의 기득권과 그에 기생하여 형성된 지배적 가치를 전복하는] 급진적 진보성향을 내포하는 동시에 [성서의 무오류성에 근거하여 윤리 기준을 강제하는] 고루한 보수성향 또한 담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보세력은 교회의 보수성을 비판할 개념적 층위를 확보하지 못한다.

다음으로, 비판대상인 교회는 실재하는가. 교회는 예수를 좇는 이들(Christian)의 회합으로서, 머리되신 예수의 몸을 이룬다(엡 1:23, 5:23). 이에 예수를 좇는다는 것은 예수의 정신을 실천함을 의미한다. 성육신의 이유와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예수의 정신은 다음과 같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마 20:28, 막 10:45).” 교회의 실재성은 신도들의 마음과 행실에 의거한다. 만약 신도들이 섬김의 수여가 아닌 수혜를 위해 교회를 찾는다면, 교회의 실재는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소멸한다. 반면, 교회의 표상은 신도들이 예배자에서 소비자로 변질됨에 따라 동일한 비용(헌금)으로 양질의 혜택(은혜; ’spiritual awakening’이 아닌 ’mental well-being’)을 받고자 갈망하기에, 중소교회는 고사하고 대교회는 팽창한다. 따라서 비판대상으로서의 교회는 그 본질(Chritianity)을 상실한, 교회(church for worship service) 아닌 교회(church for customer service)로 잔존하기에 비판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물론, 기의를 상실한 기표 운운하며 비판을 회피하는 자세는 용납할 수 없다. 다만, 허상의 교회에 비판을 가하며 - 목욕물과 함께 아기까지 버리는 식으로 - 실재의 교회를 모독하는 행위 역시 수용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