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불교(라마교)의 가장 대표적 종파인 거루파(格魯派)의 수장인 법왕(法王)의 호칭으로서, ‘달라이’는 몽골어로 바다를, ‘라마’는 티베트어로 스승을 뜻한다. 텐진 갸쵸(Tenzin Gyatso)는 14대 달라이라마이다.”
“티베트 불교(라마교)의 가장 대표적 종파인 거루파(格魯派)의 수장인 법왕(法王)의 호칭으로서, ‘달라이’는 몽골어로 바다를, ‘라마’는 티베트어로 스승을 뜻한다. 텐진 갸쵸(Tenzin Gyatso)는 14대 달라이라마이다.”
자유를 [부르주아적] 소유의 함수로 규정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양하고,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이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를 구축하기 위한 3가지 열쇳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 계급의 혁명적 업적의 하나로 ‘문서로 인증되고 정당하게 얻어진 자유를 단 하나의 양심 없는 상업적 자유로 바꾸어’ 놓은 것을 거론한다. 부르주아 계급은 인간의 자유를 실현하는 모든 조건들과 요소들을 경제적인 차원으로 환원시켰다. 그리고 이것을 민주주의와 결합시켜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념으로 표상했다.”
“《선언》선언 제2장은 민주주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노동자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을 타도하여] 지배 계급으로 올라서는 것, - 더 나아가 경제적 착취 관계를 완전히 제거하여 사회의 계급 적대 자체를 소거하는 것, 즉, - 민주주의의 쟁취라는 것을 보았다.’ … [이에] 진정한 민주주의는 ‘일반적인 의미의 소유 철폐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의 철폐’를 목적으로 한다.”
“《선언》에 따르면 ‘본래 정치적 권력은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계급의 조직된 힘을 의미한다.’ …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궁극적으로 내세우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이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는 경제적 차원에서의 계급의 대립을 철폐함으로써 정치가 폐기되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공동체이다.”
“한반도를 규율하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강력한 구도인 미-일-한 삼각동맹과 삼각공조”의 자장 가운데 형성된 “대중의 상식은 단연코 성장 이데올로기를 사회적 의제로서 강력하게 지지하며, 사회적 맥락을 과감하게 제거한 개인적 부의 발악적 찬양과 추구, 특권층으로의 처절한 지위 상승 노력과 약자에 대한 가학적 억압이다. 이는 잡초처럼 억세고 강한 풀뿌리 보신주의라 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근대의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모든 관심사를 철저하게 세속적인 단일한 차원으로 환원시킨다. 그런 까닭에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은 물질적 욕망과 이익이라는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것 외에는 반응하지 않도록 규정된다. [따라서] 그에게 수행될 어떠한 정치적 프로젝트도 이 차원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선언> - 역자후기(강유원, 2008)에서 발췌
** 민주주의는 ‘2차 이데올로기’이다. ‘어떤’ 민주주의를 추구할 것인가. 이것이 “첫걸음”이다.
01. 개요
“들뢰즈의 관심은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와 같은 전기의 이론철학에서 가타리와 함께 작업한 <안티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과 같은 후기의 실천철학으로 옮겨갔다. … 전기의 존재론적 사유가 저류를 이루고 그 위에 사회철학적 사상이 난만하게 꽃핀 연못, <천 개의 고원>.”
02. 기계
“왜 기계인가. 다른 것들과 접속함으로써 그 자신의 속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 모든 개체는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을 내재한 즉 ‘욕망하는 기계’이다. “스스로 변화하고 달라지는 종결 없는 과정이 개체들의 운명인데, 이 차이생성의 일시적 응결 형태가 존재이고 동일성이다. ‘동일성의 섬들은 차이생성의 바다 위에 구성되고 해체된다.’”
03. 배치
“기계들이 접속하여 선을 이루고 나아가 면을 이루면, 그 장을 가리켜 ‘배치’라고 한다. … 배치에는 ‘기계적 배치’ 외에 ‘언표적 배치’도 있다.” 예를 들면 야구경기는 심판과 선수, 공과 글러브와 배트 등의 기계적 배치와 야구규칙이라는 ‘언표적 배치’가 합쳐져 성립된다.
04. 탈주
“배치가 만들어지는 것을 ‘영토화’라고 하면, 그 배치가 풀리는 것이 ‘탈영토화’이고, 그 배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탈주’다. 욕망이 있는 한 기존의 배치를 뛰어 넘으려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삶, 다른 존재방식, 지금의 나를 규정하고 있는 울타리 바깥을 꿈꾸게 된다.”
05. 되기
“다른 삶으로, 바깥으로 이행하는 ‘되기’(becoming)는 동일성의 고착, 그리고 그렇게 고착된 동일성들 사이에 성립하는 차이의 윤리를 극복하기 위한 사유다. … 되기가 진정한 윤리적 내용을 획득하려면 언제나 ‘소수자 되기’여야 한다. … 소수자 되기를 통해, 자기 내부의 ‘다수자’를 극복하고 기존의 지배질서를 바꿔 새로운 배치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한겨레, 고명섭 기자 (출처)
“Who am I, and who are my people, that we should be able to give as generously as this? Everything comes from you, and we have given you only what comes from your hand.”(1 Chronicles 29:14)
석식 후 다락방에서 성모, 요한 형제와 꿀차 교제를 나눴다.
- “화석화된 안락을 위한 출혈” : 고시 공부
- “죽을만큼 힘들 때, 목숨걸고 할 일” : 기분전환(pass-time)
- “평시의 행복은, 전시의 충성과 직결” : 이순신, 승리의 리더십
- “단련되지 않은 미덕의 참을 수 없는 유약함” : 하드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나이
01. 예찬의 방명록에 띄운 ‘잎글’
깨지기 쉬운, 그러나 보배를 담고 있는
질그릇과 꼭 닮은 글.
진솔한 글은 실존의 투사라서
그 때, 그 곳의 예찬이 살아 숨쉬네요.
세속의 거울에 비친 왜소함으로
제 연민에 일그러져 격렬히 자위하다,
이내 완악한 자고함을 고백하며
투명하게 존귀의 이유를 되새기는 그.
‘너는 나의 보혈만큼 귀하다.’
덕분에 정체성을 묵상합니다.
여전히 그리고 늘 타인의 시선에 요동치겠지만,
그것은 질그릇이지, 내 안의 보배는 아닙니다.
변하는 것들 사이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붙잡는 연습, “더욱 깊이 있어지자.”
02. 주일 분반 공부
우리반 아이들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관해 공부하다 관련 성구 암송을 위해 고안한 문장, “‘고’난 ‘후’에 ‘사’랑이 ‘찾’아온다.” (고후4:7) 앞 글자 연상법! ^^
03. 거룩한 산 제사 -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삶
“We have this treasure in jars of clay to show that this all-surpassing power is from God and not from us. We are hard pressed on every side, but not crushed; perplexed, but not in despair; persecuted, but not abandoned; struck down, but not destroyed. We always carry around in our body the death of Jesus, so that the life of Jesus may also be revealed in our body. For we who are alive are always being given over to death for Jesus’ sake, so that his life may be revealed in our mortal body. So then, death is at work in us, but life is at work in you.” (2 Corinthians 4:7~12)
“노촌 이구영(1920~2006)은 충북 제천에서 만석꾼 갑부이자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벽초 홍명희, 위당 정인보 선생의 제자였으며, 일제 당시인 1943년 독서회 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이구영은 1950년 월북하여 북한에서 김일성에게 실학사상을 강의하다, 1958년 9월 부산에서 남파간첩으로 체포되었는데, 그를 체포한 경찰은 일제시대에 그를 고문했던 형사였다. 이후 22년간 수감생활을 하면서, 신영복, 심지연 등에게 한학과 세예를 가르쳤다. 1980년 출소해 경기 안양시에 이문학회를 창립하여 후진에게 한학을 가르쳤고, 호서의병사적과 의병운동사적을 출간하였다. 2006년 10월 20일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동안 노촌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하였음을 뉘우치게 된다. 그러나 조금도 적조한 느낌을 갖지 않고 있다. 문득 문득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국어사전을 찾을 때면 일부러라도 290쪽을 펼쳐 본다. 국어사전 290쪽은 노촌 선생님께서 바늘을 숨겨 놓는 책갈피이다. 바늘을 항상 노촌 선생님께 빌려쓰면서도 무심하다가 언젠가 왜 하필 290쪽에다 숨겨 두시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290’이 바로 ‘이구영’이라고 답변하셨다. 엄혹한 옥방에서 바늘 하나를 간수하시면서도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여유이면서 유연함이었다. 지금도 물론 나의 가까이에 국어사전이 있고 자주 사전을 찾고 있다. 찾을 때면 290쪽을 열어 보고 그 시절의 노촌 선생님을 만나 뵙고 있다.”
지리산 끝자락을 산보하며, 동명이인의 후배와 이름을 두고 담소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