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경제학자 우석훈은 우리 사회의 이런 슬픈 자화상을 ‘내릴 수 없는 배’로 은유하였다. 그는 이 병적으로 비정상적인 사회를 진단하기 위해서 ‘재난 자본주의’라는 개념어를 발명하였다. 재난 자본주의란 “사람들이 엄청난 재앙에 놀라고 당황할 때, 그 사회 기득권 집단이 자신들이 원래 하고 싶었던 일을 강력히 전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재난 자본주의’에 침수된 한국 사회는 유령선의 몰골이다. 우석훈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나라의 경제와 정치가 만난 가장 슬픈 사건”에서 우리는 회개와 성찰,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거대한 슬픔조차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하려는 비뚤어진 욕망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20~21. 우리 교육의 근간을 규율하는 <교육기본법> 제2조(교육 이념)는 “교육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중략) 홍익인간이라는 이념은 1945년, 미군정의 자문기구였던 조선교육심의회 교육이념분과위원회에서 우리 교육 이념으로 처음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홍익인간 이념은 대한민국 건국 후 1949년 제정 공포된 <교육법> 제1조에 공식적인 교육의 기본 이념으로 규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로 홍익인간은 영어로 “Maximum service to humanity”로 번역된다. 학자에 따라서 “The greatest service to the benefit of Humanity”로 번역되기도 한다.

29~30. 우리의 이 모든 소비 행위는 기업의 계획적 진부화 전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계획적 진부화란 기업에서 신상품의 판매 촉진을 위해서 기존 상품을 계획적으로 진부화시키는 행동을 뜻한다. 미국의 자동차 회사 제너럴 모터스가 계획적 진부화 전략을 통해서 자동차 산업의 선두 주자인 포드를 파산에 이를 정도의 궁지로 내몰고 최대 자동차 회사로 부상한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일화이다. 제너럴 모터스의 계획적 진부화 전략은 오늘날 모든 자동차 회사의 일반적 생산 전략이 되었다. 세르주 라투슈는 <낭비 사회를 넘어서>에서 제조사가 제품 생산 단계에서 이미 사용 연한을 설정하고 그 안에 제품이 고장 나도록 기술적인 조치까지 한다고 폭로하고 있다. 1881년 에디슨 전구의 수명은 1,500시간, 1920년대 공장 제품은 2,500시간이었다. 그러나 1924년 제너럴 일렉트릭을 비롯한 전구 업체들은 전구 수명을 1,000시간 이하로 하기로 담합했다. 품질 좋은 동독제는 수입되지 못했고 수명이 긴 전구 제작과 관련된 특허는 모두 매장되었다. 프린터에는 인쇄 매수가 1만 8,000장이 넘으면 자동으로 멈추게 하는 칩이 삽입되어 있다. 수리가 안 되는 아이폰 배터리는 수명이 18개월로 제한되어 있다. 배터리 수명이 다하면 휴대전화 자체를 바꾸어야 하는 셈이다.

30. 삼성반도체 기흥 공장에서 집단 백혈병이 발병했을 때 소비자들이 삼성 제품 불매운동을 벌였다면 어떠했을까?

31. 울리히 벡은 1986년 <위험사회>를 통해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궁핍은 계급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는 유명한 경구를 남김으로써 현대사회의 위험의 본질을 명료하게 부각시켰다. 그의 경구를 증명하는 사건이 공교롭게도 책이 출간된 1986년 구소련의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로 실제로 일어났다. 1986년 4월 체르노빌 핵발전소 제4호기가 폭발하여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100배 이상의 방사능이 유출되었다.

36. 바우만은 “‘포드주의적 공장’은 (……) 자본과 노동 간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식의 일종의 결혼 서약이기도 하였다. 그 결혼은 사랑의 결합인 적은 거의 없이, 편리나 필요에 따른 결혼이었지만, (그것이 개인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었든지 간에) ‘영원토록’ 이어질 운명이었으며 거의 대부분 그렇게 지속되었다”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액체 근대의 시대에는 그런 안정적인 노사 간 영속적인 관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은 장소의 속박에서 벗어나 이익이 되는 곳이라면 지구상의 어느 곳이라도 순식간에 이동한다.

37~38. 엄기호의 ‘단속사회’라는 개념은 이런 현실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개념어이다. 그는 엄마와 마주 앉아 있지만 엄마와는 대화도 나누지 않고 친구들과 카카오톡에만 열중하는 한 소년의 모습에서 충격을 받고, ‘쉴 새 없이 저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하는’ 단속의 양상에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엄기호의 지적처럼 오늘날 네트워크를 통한 연결은 ‘접속 차단’과 동시에 존재한다. 스마트폰의 모바일 메신저 등을 통해서 우린느 쉴 틈 없이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주고받지만 여기에는 접속 차단이라는 비밀 제동 장치가 담겨 잇다. 접속 차단 장치의 도움으로 우리는 나와 다른 낯선 것과의 만남, 진정한 타자와의 만남을 차단하며, 공적인 것과도 단절한다.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경우에도 불가피하게만 최소한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자기 검열 속에 숨는다. 이처럼 나와 같고 비슷한 것에는 끊임없이 접속해 있지만 조금이라도 나와 다른 것은 철저히 차단하고 외면하는 사회를 엄기호는 ‘단속 사회’라고 부른다.

41~42. 공부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를 좀 더 객관적으로 확인해 보기 위해서 나는 강연이나 연수에서 교사들을 만날 때 가끔 미니 활동을 하곤 한다. 즉, 한국에서 ‘공부하는 모습’ 하면 전형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려 보거나 말로 표현해 보도록 과제는 낸다. 그러면 90퍼센트 이상은 동일한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그린다. (중략) 그렇다면 외국 사람들도 ‘공부’에 대해 이런 이미지를 떠올릴까? 동일한 이미지를 연상한다면 공부의 의미나 공부 방식이 보편적인 특성을 지님을 의미한다. 다른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우리의 공부 문화와 그들의 공부 문화가 다르다는 것이다. 만약 후자라면 ‘공부란 무엇이고 공부의 목적이 무엇이며 공부하는 방식은 문화마다 어떻게 다른가’ 하는 낯선 질문을 제기할 필요가 생겨난다.

47~48. 미국의 언론인 아만다 리플리는 2013년 <무엇이 이 나라 학생들을 똑똑하게 만드는가>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중략) 이 책에는 미네소타의 미네통카 고등학교에서 부산의 남산고등학교에 교환학생 자격으로 온 에릭의 이야기가 나온다. 에릭은 학교 수업이 밤 9시가 되어야 끝나고, 그 이후에도 ‘학원’이라고 알려진 사립 교육 기관으로 향해 11시까지 수업을 듣는 한국 학생들을 보며 “어떻게 십 대 청소년들이 공부 외에 아무것도, 진짜 다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 수 있단 말인가” 하며 놀라워한다. 에릭에게 한국은 수업 시간에 다들 잠을 자면서도 국제 시험에서는 높은 성적을 내는 신기한 나라이자, 똑같은 수업을 학교에서도 듣고, 또 학원에 가서도 들어야 하는 비효율의 극치인 나라이다. 아만다 리플리는 에릭의 목소리를 통해 사회적 성공을 명분으로 학생들을 엄청난 학습량과 살벌한 경쟁으로 내모는 한국의 교육 시스템을 ‘압력밥솥’이라고 은유하고 있다.

49~50. 정현모 피디는 유태인들이 미국 아이비리그 학생의 30퍼센트를 차지하고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23퍼센트를 휩쓸었다는 기사를 접했을 때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세계 인구의 0.2퍼센트에 불과한 유태인들이 그렇게 높은 성취를 올리는 이유가 궁금해졌다고 한다. … 후속 작업으로 기획된 것이 2013년에 방영된 <공부하는 인간, 호모 아카데미쿠스>이다. (중략) 문화마다 공부하는 모습이 다르다. 예컨대, 한국의 도서관에 가면 어디나 ‘정숙’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왜? 도서관은 나 홀로 공부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고시원이나 교실이나 독서실이나 도서관이나 우리는 정숙하기를 요구받는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공부는 혼자서 집중해서 무엇을 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유태인들의 공부하는 장소는 어디를 가도 시끄럽다. 유태인들에게 공부는 질문을 매개로 한 토론과 논쟁이기 때문이란다.

59. 해방 이후 15년밖에 지나지 않은 1960년에 연간 국민소득이 78달러에 지나지 않는 상황에서 선진국에 육박하는 교육비가 국가와 가계에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등록금을 납입해야 하는 학기 초에는 전체 통화량 가운데 20 내지 25퍼센트가 학교에 들어갔을 정도였기 때문에 ‘교육망국론’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76. 철학자 손봉호는 행복을 늘리는 것보다 고통을 줄이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말한다. 그는 <고통받는 인간>이란 책을 통해 “최소 수의 최소 고통”이라는 윤리적 이론을 제시한다. 그는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더 긴급하다”라는 말로 고통을 없애거나 줄이는 것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필수적이고 근본적이라고 주장한다.

79. ‘나쁜 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서’ 부모들은 자녀들을 독립적인 인격으로 인정해야 한다. 성적이란느 단일한 기준으로 자녀를 타자와 평가하기를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자녀가 타자의 고통에 둔감한 존재가 되지 않도록 훈육할 책임도 감당해야 한다. 어떤가? 실천할 만한가? 이렇게 적고 보니 ‘나쁜 부모 되지 않기’가 ‘좋은 부모 되기’보다 더 어렵다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_ 이혁규, <한국의 교육 생태계>, 교육공동체 벗,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