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0. 『오늘의 책』 1985년 겨울호(8호)에 실린 반성완의 「총체성의 이념과 변증법적 인식」은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 의식』에 대한 매우 중요한 글이다. 루카치의 본질을 유토피아적 전망에 있다고 보는 관점에서 루카치의 물화 현상 분석을 설명하고 그것의 수용을 요약하고 있는데 글이 평이하고 정곡을 찌른다.

1. 14. 작품은 짜임새가 부족하고, 이미지가 선명하지 못한 - 선명하지 않은 것도 선명하게 선명하지 않아야 한다 - 곳들이 많다.

1. 24. 산은 깊이 들어갈수록 낮아진다는 신대철의 시구가 얼마나 옳은 진술인지 이제 알겠다.

2. 25.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불안감에서 해방되려 한다. 위대한 선동가는 그것을 이용하여 우선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그것을 해소하는 가장 손쉬운 길을 제시한다. 그 길이 축제로 변할 수 있을 때 혁명은 완성된다. (중략) “사랑하는 사람이여 사람을 보내 / 말하지 말고, 제발 직접 와주세요 / 중간에 사람이 끼면 위험하니까요” 중세 연예시의 서두이지만, 이 서두는 하나의 깊은 암시를 간직하고 있다. 독자들에게 작품은 직접 읽어야 한다는 권유로 이 서두는 새롭게 읽힐 수 있다.

3. 28. 고은의 『전원시편』(민음사, 1986)은 별 재미가 없다. 아마도 내가 농부가 아니어서 그럴 것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의식이 없는 의식에 대해 나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자작농의 밋밋한 삶은 고양된 혹은 충전된 삶에 대한 감각이 마모되어 있어, 비장이나 장엄에 이르지 못하고 있으며, 그렇다고 사실의 정확한 전달이라는 묘사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도 못하다. 그것은 고은이라는 떠돌이의 의식이 자작농에 가탁한 가면 때문이다. 무의식적인 오문들(예: 나는 그 영감 생시보다는 손톱만치 달라져야겠구나), 달관의 제스처 섞인 선적 언어의 비-선적 남용(예: 벌써 별 하나 떠 이 세상이 우주이구나 - 이 무슨 소리!), 지켜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 잘 알 수 없는 민족 정서들에 대한 집착…… 등의 토포스들이 넘실대는 이 시편들은 비진정성이 진정성의 탈을 쓰고 있다.

5. 2. 김인환의 『한국 문학 이론의 연구』(을유문화사, 1986)는 라캉을 자세히 소개한 공적을 갖고 있다. 분석의 정확성이 눈에 띈다.

5. 23. 현상학적 환원이 결국은 하강 초월이 아닐까라는 질문은 충분히 던져 볼 만한 질문이다. 자신의 내부로 하강 초월하면 거기에 대상이 있는 게 아닐까?

5. 27. 나는 전라도 사람으로서의 나 자신에 대해 숙고했다. 때로는 혐오하면서, 때로는 연민을 갖고서,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도피의 마음으로,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하숙을 거절당한 것, 사투리 때문에 놀림받은 것, 전라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80년 이후에도 조용하다는 것…… 등의 것들이 뭉쳐져 내 가슴에 들어왔다. 쿤의 책은 내 경험 세계의 신학적 의미를 되묻게 만든다. (중략) 쿤의 언명 중 나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나의 신학적 한계와 내가 흑인들의 사회적 조건들과 밀착돼 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라는 선언이다.

5. 31. 김윤식의 『우리 소설과의 만남』(민음사, 1986)을 공들여 읽다. 그의 가장 빛나는 대목은 자기 직관에 그가 유보 없이 매달릴 때이며, 그가 가장 어설픈 대목은 원론에 집착할 때이다.

6. 19. 낭만적 지식인은 조직력의 결여를 그 약점으로 갖고 있지만, 그것은 또항 장점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조직력이 없기 때문에 그는 싸움의 변두리로 밀려나지만, 그렇기 때문에 조직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드러낼 수가 있다. 토마스 쿠오의 『진독수 평전』(민음사, 1985)을 읽고 느낀 점.

6. 29. 김욱동 편의 『윌리엄 포크너』(문지, 1986)에서 읽은 포크너의 기억할 만한 말: “가장 서글픈 사실 중의 하나는, 사람이 하루에 여덟 시간씩 매일 할 수 있는 일이란 일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루에 여덟 시간씩 계속 밥을 먹을 수도 없으며, 또 여덟 시간씩 술을 마실 수도 없으며, 섹스를 할 수도 없지요. 여덟 시간씩 할 수 있는 일이란 일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이토록 비참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이유이지요.” 과연!

8. 1. 미륵 사상이 집단적 희원을 주조로 하고 있다면, 함석헌주의는 개인적 유토피아주의를 기저에 갖고 있다. 내가 그것을 함석헌주의라 부르는 것은 『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서의 세계의 하수구로서의 한국이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그 주의는 이 고난의 땅은 시창작의 명당 자리이다라는 서정주류의 미학적 함석헌주의와 고난이 없으면 해방이 있을 수 없다라는 김지하류의 해방적 함석헌주의로 나눌 수 있겠는데, 김진경은 김지하에 가깝다. (중략) 그의 함석헌주의는 그러나 공허한 관념적 체조가 아니라, 교사로서의 실천의 자리에서 얻어진 구체적 관념이어서 깊은 감동을 전해준다.

8. 25.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논의가 가십의 차원에서 시작되고, 진행되고 논의된다는 것이다.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세목들이 굉장한 중요성을 띠고 논의의 중심에 자리잡는 것을 볼 때의 그 허망함.

9. 5. 전영애의 『어두운 시대와 고통의 언어』(문지, 1986)는 학위 논문을 다듬은 것인데, 글이 평이하고 자상하다. 말라르메의 전통을 잇고 있는 첼란의 난해시를 일일이 번역하고, 해석-주석을 붙인 것은 큰 공적이라 생각되지만, 그 반면에 그 때문에 시적 울림 줄어든 곳도 눈에 뛴다. 난해시일수록 리듬에 더 집착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을 읽은 뒤에 얻은 한 결론이다.

10. 4. 그(이국선)는 내가 대학을 마친 뒤 신학 대학에 가보겠다는 내 생각을 내보였을 때, 그것을 극력 말렸다. 너같이 편하게 자란 아이는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곱게 대학원으로 진학했고, 그는 그의 가파른 길을 그대로 걸어갔다. 그는 계속해서 나에게는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아버지이며 스승이었다. 그 스승의 뒤를 이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고재식이다. 묘소에서 그는 거의 실신할 듯하였다. 아버지와 스승을 잃은 슬픔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그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좋은 제자를 두었다.

10. 6. 어제 저녁에 오랜만에 강강수월래를 보았다. 내 유년의 기억 속에서, 그것은 찬란한 축제의 이미지였다. 보름달이 뜨면, 거리거리가 조금씩 달아오르면서 북교국민학교로 가는 인파들이 집앞을 가득 메웠다. 그 인파들에 휩싸여 학교까지 가보면, 운동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강강수월래를 추고 있었다. 그 빛나는 돎 속에 내가 모르는 어떤 성적인 것이 숨겨져 있었고,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애달아하였다.

10. 11. 아름답다의 아름은 알음알음의 알음, 앎의 대상이다. 아는 물건 같다가 아름답다의 어원이다. 고유섭은 아름을 앎이라고 생각했으나, 아름은 앎이 아니라 앎의 대상이다.

11. 21. 양귀자의 「원미동 시인」은 좋은 소설이다. (중략) 김반장의 배신을 계집애, 시인은 다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진국이라” 생각하지만, 계집애는 그 거짓말 때문에 “속터지려” 한다. 그는 시인에게 그것을 알려주지만 그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딱 잡아뗀다. 시인은 박해받고 싶은 순교자이다.

12. 6. 고은의 『만민보 1, 2, 3』(창비, 1986)에는 (중략) 유년 시절에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간간이 끼어드는 역사적 인물들은, 그것이 민족지의 차원에서 선택된 것이라 해도, 누구의 입장에서 이야기되느냐가 분명해야 힘을 얻는데 그것이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이 구수한 시집은 자꾸 야담집 같아 보인다. 애석하다.

12. 12. 황지우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한마당, 1986)는 뛰어난 시인이 쓸 수 있는 좋은 산문집이다. 김수영ㆍ정현종ㆍ김지하의 산문집에 필적할 만한다. 지식 노동자로서의 부끄러움이 배어 있지만, 감성적이면서도 빠트린 것 하나 없는 것 같은 지적 문장, 뛰어난 분석력(분석은 분석을 벗어나는 것을 과감히 버리는 행위까지를 포함한다. 바보들만 하나도 안 버리려다가 다 버린다), 음흉한 자기 방어(그 반작용으로의 공격력)는 눈여겨볼 만하다. 좋은 산문가는 뛰어난 통찰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12. 26. 모든 구멍 체험이 되돌아가는 것은 오르페 신화이다. (중략) 오르페 신화를 구멍 체험으로 보게 되면, 유리디스로 표현되는 이타성은 핑계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어두운 지하 동굴 속에 허상으로 존재하는 유리디스. 여자와의 정사가 언제나 허망하게 끝나는 것은 그것 때문인가.

_ 김현, <행복한 책읽기>, 문학과지성사,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