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당쟁 가운데 ‘회니시비’는 이런 삼전도의 치욕에 대한 기억이 주요 논점이다. 두 주역인 송시열과 윤증은 원래 사제지간이었다가 훗날 정적이 됐다. 송시열이 회덕(대전)에 살았고 윤증이 이산(논산)에 살다 보니 이들 사이의 논쟁은 ‘회니시비’로 불렸다. (중략) 송시열은 북벌의 의리를 내세우면서도 양반과 지주의 기득권을 최대한 지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자 골몰했다. 이 시기에 그가 제기한 것이 바로 윤휴에 대한 ‘사문난적’ 논란이었다. 윤휴는 유교 경전에 대한 독자적 주석을 통해 주자와는 다른 정치론을 체계화했다. 그는 강렬한 반청 북벌론자였는데 제도 개혁을 통해 양반제와 지주제의 모순을 제거해야만 북벌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송시열은 윤휴의 제도 개혁 주장을 잘 알면서도 그가 주자를 비판한 것만 강조하며 이단으로 공격했다. 이에 대해 윤선거는 “윤휴의 경전 주석은 작은 일이니 문제 삼을 일이 아니며 그의 제도 개혁론을 수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송시열에게 요구했다. 하지만 송시열은 양반과 지주의 기득권을 양보해 국가 위기를 극복하자는 일부 지배층의 주장을 사문난적 논란을 통해 무마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