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더 큰 집이 필요하다 그 안에 온 우주를 가둘 수 있는,

그러나 우주도 결국 하나의 집이다
집 우(宇) 집 주(宙), 넓을 홍(洪) 거칠 황(荒)…… 평수가 좀더 될 뿐

우리가 또 여기서 어디로 갈 수 있겠어? 가도 가도 여기 이곳뿐인데

그래서 지금보다는 훨씬 큰 집이 필요하다
그건 크기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한순간의 진동일 수도 있고 물에서 빠져나와 들이쉬는 단 한 번의 숨일 수도 있지만

여하튼 그 안에 모든 발광과 기쁨과 통곡과 신경쇠약을 가둘 수 있는
눈물과 눈물 없인 못 들어줄 그 모든 노래를 넘나들 수 있고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마음껏 건너뛰며 놀 수 있는,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필요하다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흉곽 안에서 마음껏 뛰놀 수 있는
풍선처럼 터지지 않는 심장이 필요하고
그 안에 모든 핏물과 파도치는 피바다를 견뎌낼 수 있을 장대하고 긴 핏줄과
충만한 힘이 마음놓고 뻗어나갈 수 있을 드넓은 아량과 이해와 그 모든 넘쳐나는 것들의 온갖 표면장력을 잡아 가둘 수 있을 단
한 채의 집이

손에 집히는 걸 모두 집어던지는 대신
눈에 보이는 걸 모두 자판으로 두들겨 화면 속에 때려박아버렸는데
세상에, 글자들이 담긴 여백이, 그 글자들보다 더
그럴듯해 보이는 거 있지!

아무래도 좀더 큰 집이 필요하다
네 모든 무지와 나태와 방종을 가둘 수 있는, 그것들 모두를 가둬 굶겨 죽일 수 있는

아무래도 하나의 극단적인 선택이 필요하다

춤으로 바다를 건너낼 수 있다고 해놓고선
바닷속으로 풍덩
물속에 들어가는 칼처럼
깨끗하게 입수하는 춤들

오늘은 유난히 밤이 길다
바다 끝까지 가라앉는 데 걸리는 시간과 노력처럼
축 늘어진 팔다리처럼
나는 그 팔다리를 다 주물러주고 싶었으나

누구는 그 팔다리를 몽땅 다 잘라주고 싶었을 것이다
더이상 흔들리며 걸어다니지 않아도 되도록
물처럼 바람에 출렁이지 않도록
다 잘린 너를 식물처럼 땅에 심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흐르러지게 붉은 꽃 필 것인가
바다 위에 점점이 흩어진 산다화 같을 것인가
인간 주제에
그래봤자 겨우 눈에서 딱정벌레가 왔다갔다할 뿐인 주제에!

무당들이 시퍼런 칼을 먹고 밤새도록 긴 물 뿜어내는 밤
지평선에 가까워져 바닥에 펴쳐지는 몸뚱아리처럼
오늘은 길어지는 밤이 끝도 없고

너는 정말이지 환하게 미쳐 있다
아주 멀리서도 다 보일 만큼

***

초자연의 밤-
나는 늘 뭘 잘 모르고 뭘 잘 모르는 내가 그것에 대해 품는 생각은 늘
실제의 그것을 초과한다

초자연의 밤- 초자연적 밤바다
누구도 온전히 수용할 순 없어
인간 주제에
그래봤자 겨우 쾌와 불쾌 사이를 요리조리 왔다갔다할 뿐인 주제에!

자, 여기 칼이 많이 잠들어 있다 어느 칼을 깨워 베워줄까?
잠든 칼은 깨우기만 해도 춤이다 깨어난 칼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춤이 두 눈 번득인가 물에 칼자국 난다!

칼로 물 베기의 예술을, 이번에 누구에게 보여줄까
칼처럼 고요히 누워 있는 물을 누구에게 먹여줄까? 누구 목에 부어줄까?

칼춤 추는 무당아, 하늘에서 보면 너는 붕붕거리는 한 마리 무당벌레로밖엔 안 보이는구나
아무리 날아봐야 출발지와 도착지가 거기서 거기인 작은 버러지 한 마리로밖에는 생각되지 않는구나
뭐 눈엔 뭐밖에 안 보인다곤 하지만

그러나 네 손가락 위를 기어가던 무당벌레는 손가락이 끝나면 그 끝에서 양 날개를 펼치곤

날아가버리고

뒤에 남겨진 손가락은 날아가는 무당벌레를 멍
하니 바라만 보다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와
뒤늦게 자판이나 두들긴다

춤으로 바다를 다 건너낼 수 있다고 해놓고선
바닷속으로 풍덩
물속에 들어가는 칼처럼
깨끗하게 입수하는 춤들

오늘은 유난히 밤이 길다
바다 끝까지 가라앉는 데 걸리는 시간과 노력처럼
축 늘어진 팔다리처럼
나는 그 팔다리를 다 주물러주고 싶었으나

누구는 그 팔다리를 몽땅 다 잘라주고 싶었을 것이다
더이상 흔들리며 걸어다니지 않아도 되도록
물처럼 바람에 출렁이지 않도록
다 잘린 너를 식물처럼 땅에 심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흐드러지게 붉은 꽃 필 것인가
바다 위에 점덤이 흩어진 산다화 같을 것인가
인간 주제에
그래봤자 겨우 눈에서 딱정벌레가 왔다갔다할 뿐인 주제에!

무당들이 시퍼런 칼을 먹고 밤새도록 긴 물 뿜어내는 밤
지평선에 가까워져 바닥에 펼쳐지는 몸뚱아리처럼
오늘은 길어지는 밤이 끝도 없고

너는 정말이지 환하게 미쳐 있다
아주 멀리서도 다 보일 만큼

***

가까스로 화장실로 몸을 던져 지퍼를 여는 데 간신히 성공한 나는
놀란다! 아직도 내 몸안에 이렇게나 많은 따뜻한 것들 숨어 있었다니
술이 확 깬다, 알 수 없는 힘 솟구친다!
그러고는 미소지은 채 그 자리에서 그대로 고꾸라지고

하늘이 땅에 물을 주면 땅은 그걸 또 좋다고 다 받아 마신다
술 처먹고 노상 방뇨하는 아저씨들의 물조차도 땅은 다 받아 마셔

만취 상태에 드니 대지가 울렁울렁
대지도 토하고 싶은 거겠지 대기도 흔들린다
때로는 대기도 확 다 토해내고 싶은 거겠지

술에 꼴아 더이상 차도와 인도를 구분하지 못하는 분이시여
차도를 인도처럼 걸어다니며 온갖 차들로 하여금 너님을 비켜가게 하는 분이시여!

다 토해내고 난 후의 밤이 좋다
“세상을 다리니 그 위에 집을 짓지 말라” 따위의 문장들을 강물 위에 잔뜩 띄워놓고는 그곳을 홀연히 뜨자마자 하나둘 강물 속으로
뛰어들기 시작하는 단어들이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한 밤

우울함이 다리 위에서 다리 아래를 바라보는 나를 보고는
못 본 체 그냥 지나가준다
모든 것은 지나가
이번만은 나도 널 그냥 지나가주지

수십 번 돌려봐도 내 것이 되지 않던 필름처럼 삶이 내 것이 되지 않을 때
그날 봤던 강변의 대관람차를 떠올리며 생각한다, 아무렴 삶이 내 것은 아니지
돌고 도는 삶 위에 올라타 돌고 돌고 돌다 미처 내릴 생각을 못하고
그 아래 펼쳐지는 야경에 탄성이나 내뱉다, 말한다

그러니가 그건, 네 것도 아니다

갈 데까지 갔다, 라는 말이 있던데 갈 데는 무궁하고
겨우 제자리를 돌고 돈 주제에 갈 데까지 갔다, 라고 생각하는 바보 멍청이들이여
삶을 좀 우습게 봐줄 줄 알아야 삶도 널 우습게 보지 않겠어?

별짓 다해봐야 한갓 인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과도한 오류와 확대 해석을 통해서만 간신히 신성(神性)에 도달하는 오늘은 정말이지 더 큰
사랑이 필요하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감당하다 내가 죽을, 죽어도 여한 없을 사랑이……
(그럼 신성으로서도 영광이겠지)
나 대신 여기서 더 멋지게 마지막을 장식해줄
지구 최고의 다이빙 선수가 필요하다!

……어머 나 좀 취했나봐,

(오죽하면 네가 그럴까)

그날따라 우린 세상에서 우리가 못할 건 없을 것만 같았고

차라리 모든 걸 잃고 싶다 모든 걸 잃고 나면 사람은 바뀌기 싫어도 바뀌고
정신이 송두리째 뿌리 뽑혀 생각지도 못한 생각에도 이르게 되고

인생을 포기하자 갑자기 멋있어진 한 인간에게 어느 날 너는
한눈에 반하고

그런 밤이면 좀 지나치다 싶을 만큼의 여백이 필요하다
글자를 읽다 잠시 여백으로 새어나가 마냥 걷다보면 누구도 방해하는 이 없어, 정말이지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을 만큼의 고요 속에서
끝도 없이 홀로 거닐다 마침내 조용히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네가 내 혈관 속에 흐를 수 있게 해줄게
내가 네 혈관 속에 흐를 수 있게 해줄래?

(오죽하면 내가 이럴까)

그런다고 죽는 일은 없겠지만
목숨을 다해서, 라는 기분으로
그래봤자 우리가 어제의 인간에서 한 치라도 벗어날 가능성 따윈, 아무래도 없다고 봐야겠지만
마침내 난 내 모든 걸 다 바쳤다! 라는 기분이 들 때쯤
원하든 원치 않든 다시 잔뜩 들어찬 글자들로 붐비는 아침은 올 것이고

너는 이윽고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말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어쨌거나 오늘은

너의 엄청난 힘이 내 위에서 쓰러지는 게 나는 좋다

_ 황유원, “초현실적 3D 프린팅”, <너의 아름다음이 온통 글이 될까봐>, 문학동네, 2017.

[시인의 말] “존재는 소음으로 가득하다. 따라서 내 앞에는 두 가지 시의 길이 주어져 있다. 존재의 소음을 최대한 증폭시켜보는 길과 존재의 소음을 최대한 잠재워보는 길. 나는 이 두 길 모두를 가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