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글쓰기를 비롯한 여러 행위들의 제로 포인트가 결정된다면 그 행위들의 대상이나 결과도 엄청나게 달라질 거예요. 이제부터는, 잃어버렸다거나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순간순간 만들어내고, 순간순간 만들어지는 것이 중요하지요. 물론 추후에 발견의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겠지만, 유일 불변의 의미 같은 없거나, 혹은 있다고 해도 신화에 불과하겠지요. 예전에 나는 글쓰기를 땅바닥에서 흙에 묻힌 글자를 읽어내는 놀이나, 미술시간에 배운 스크래치 기법 같은 것으로 이해한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나는 이제 근원을 내정하는 어떤 글쓰기도 믿고 싶지 않아요. 가령 미켈란젤로는 조각이 돌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돌속에 갇힌 사람을 끌어내는 일이라 했다지만, 나는 글쓰기란 말을 쪼아서 사람을 만드는 일이라 생각해요. 애초에 말 속에 갇혀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 같은 건 없어요. 있다면 구원에 대한 신화가 있을 뿐이지요.

_ <고백의 형식들>에 수록된 이성복 시인의 산문 “장봉현 선생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