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헌트>의 배경이 되는 곳을 저 옛날식 경건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토박이들로 이루어진 이 소규모 마을 공동체는 현대 대도시의 집단적 삶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가족적 유대감과 도덕적 신실함으로 결합돼 있다. 문제는 이것이다. 어디서건 열릴 수 있는 지옥의 문이 하필 그런 곳에서 열릴 때 그 지옥은 가장 끔찍해진다는 것. 이 영화에서 그 문은 기소, 변론, 선고의 단계를 차례로 거치고 난 뒤에도 끝내 닫히지 않는다.

테오와 루카스는 특히 막역한 사이여서 서로 숨길 것도 없고 숨길 수도 없다. 전처와의 관계가 원만하다고 둘러대는 루카스에게 테오는 말한다. “거짓말 티 나. 거짓말을 할 때마다 네 눈이 씰룩거리거든.” (이 대사는 중요한데, 후반부에 나오듯이, 누명을 쓴 루카스가 테오에게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눈밖에 없기 때문이다.)

클라라는 테오의 딸이다.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평을 받고 있고, 경미한 강박증이 있어서 바닥에 그어진 선을 밟지 않고 걸으며, 불편한 상황에서는 입을 씰룩이며 말하는 이 소녀가 하필 아빠의 친구이자 유치원 선생님인 루카스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끼게 되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클라라가 루카스에게 아이답지 않은 애정을 표하자 루카스는 그 소녀를 부드럽게 거절한다. 상처를 입은 이 예민한 소녀는 유치원 원장 선생님에게 루카스가 싫다고 투정을 부리는 와중에 (며칠 전에 그녀의 오빠 친구가 보여준 성인 남성의 성기 사진을 떠올리며) 루카스의 성기를 보았다고 말한다. 이 즉흥적인 거짓말은 이제 마을 전체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

루카스가 클라라를 성추행했다고 판단한 원장은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일련의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다. 아동심리전문가를 불러 클라라를 인터뷰하고, 루카스에게 출근 정지 명령을 내리고, 학부모 회의를 열어 추가 범죄 여부를 조사한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마치 ‘거짓기억증후군’(false memory syndrome)의 경우에서처럼, 유치원의 다른 아이들이 자신도 유사한 일을 겪었노라고 제 부모에게 고백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필 멀런의 <프로이트와 거짓기억증후군>에 따르면, 정신치료나 상담을 받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어린 시절의 성추행을 ‘기억’해내는 이 기이한 증상은 1990년대 초반부터 보고되기 시작했다.)

중세 마녀사냥에서 가장 어리석은 것 중의 하나는 그 엉터리 해석학이다. ‘그녀를 불과 물로 테스트해보라.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은 저 여자가 마녀인지 아닌지를 알려주는 신의 메시지다. 그것을 해석하면 된다.’ 메시지가 불확실하면 해석의 단계에서 많은 것이 결정된다. 신의 메시지는 불확실하므로 해석자인 사제의 권력은 그만큼 막강하다. 비슷한 일이 이 영화에서도 벌어진다. 아이(신)의 메시지는 불분명하므로 그것을 해석할 줄 안다고 간주되는 전문가(사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 아동심리전문가로 짐작되는 남자는 유도 질문(loaded question)을 던지고 클라라의 예스를 끈기있게 유도해낸다. “클라라, 고마워. 지금 내 질문에 아주 잘 대답해주고 있단다.”

항의하는 루카스에게 유치원 원장은 말한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자신이 거짓말을 했음을 뒤늦게 실토하는 클라라에게 그녀의 엄마는 말한다. “끔찍했던 기억을 네 무의식이 차단한 거야.” 이런 믿음에는 어떠한 악의도 포함돼 있지 않다. 모두가 차분하게 자신의 이성을 사용한다. 그런데 누구도 잘못하고 있지 않은데, 모든 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영화에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성의 역설이다. 이 역설을 ‘합리적 부조리’라고 불러야 할까.

광기의 창궐로 열린 지옥의 문은 이성으로 닫을 수 있지만, 이성의 집단적 사용이 자체의 한계 때문에 열어버린 지옥의 문은 무엇으로 닫을 수 있을 것인가. 루카스는 침착함을 잃지 않으면서 법을 통해 진실을 밝히는 길을 선택한다. 이성의 지옥에 맞설 수 있는 권능도 일단은 이성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자넨 너무 참아서 탈이야.” 루카스를 믿고 돕는 브룬이 이렇게 힐난을 하지만, 루카스로서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중략) 다행히 경찰 조사 결과 아이들의 어떤 공통된 진술 중 하나가 사실무근임이 밝혀지면서 루카스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었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이성적 판단으로는 법원의 판결을 납득할 수가 없다. 그래서 돌을 던져 유리창을 박살내고, 가족과도 같은 개를 살해하고, 마트에서는 린치를 가하는 식으로 비로소 비이성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법적 이성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는 이들을 이제는 무엇으로 설득해야 하나.

성탄 예배가 진행되고 있는 마을 교회로 갈 때 루카스는 망가진 안경을 그럭저럭 손봐서 쓰고 가지 않고 그냥 간다. 클라라의 입에서 시작된 거짓말이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 거쳐 가짜 진실이 되었고, 루카스가 이에 맞서서 자신을 변론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은 그의 눈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동의할 테지만 루카스가 눈물을 흘리며 테오를 바라보는 장면은 이 영화의 절정이다. 루카스가 테오를 세번 바라보았을 때 시력이 나쁜 루카스의 눈에 테오의 눈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루카스는 테오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테오에게 자신의 눈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내 눈을 봐. 내 눈을 보라고. 뭐가 보여? 뭐가 보이기나 해? 없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그만 괴롭혀.” 루카스의 눈에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진실이 있었다. 다행히 테오는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김혜리의 다음과 같은 질문은 정곡을 아프게 찌른다. “이 영화의 관객은 루카스의 아동성추행 혐의가 누명이라는 사실을 안다. (중략) 하지만 만약 소녀와 루카스 사이의 진실을 보여주는 신들을 가리고 영화를 본다면? 우리는 여전히 주민들보다 우월한 자리에 서서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킬 수 있을까.” 어디선가 한 말이지만,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쉽게 ‘유죄추정의 원칙’에 몸을 싣는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속담은 유죄추정의 원칙이 대체로 옳다고 우리를 오도한다는 점에서 혐오스럽다.

비관적 결론이 거절하는 것은 낙관이지 희망이 아닐 것이다. 낙관의 논리는 ‘언제나 가능하다’는 것이고 희망의 논리는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진실에 도달하는 일이 언제나 가능하지는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불가능하지 않으므로, 필사적으로 무죄추정의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나는 다시 서사의 힘에 대해 생각한다. 좋은 서사는 언제나 한 인간을 이해하게 만들고, 모든 진정한 이해는 성급한 유죄추정의 원칙을 부끄럽게 만든다. 예컨대 <롤리타>라는 소설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은 한 인간을 이해하는 말이 아니라 오해하는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사내를 이해하는 길은 오로지 그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방법밖에 없다.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우리는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을 집어던질 수 있게 될 것이고, 무죄추정의 원칙을 새삼 되새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_ 신형철, “필사적으로 무죄추정의 원칙 고수하기”, 씨네21 2013/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