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것도 없이 릴케의 명성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어 있는 것은 소위 “사물시(Dinggedicht)”이다. 이 용어는 1926년에 출판된 쿠르트 오페르트(Kurt Oppert)의 저서, 『사물시: 뫼리케, 마이어, 릴케에 나타난 예술 형식(Das Dinggedicht: Eine Kunstform bei Moerike, Meyer, und Rilke)』에 쓰인 용어이고, 19세기 중엽부터 두드러지게 된 독일어 시의 특징을 다룬 것인데, 이 책은 사물시의 예로서는 주로 릴케의 시들을 든다. (물론 릴케가 그러한 추상 개념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의 시 쓰는 방식이 그러했다는 것이다.)

흔히 말할 수 있는 객관적 묘사가 참으로 객관적인가? 그것은 일상적 상식의 인지 체계에서 나오는 사물의 이름을 적는 일에 불과하다. (중략) 이 글에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사물을 생각하는 시가 다시 사물과 인간과 감정과의 관계에 대한 명상(冥想)이 되고, 다시 존재론적 탐구가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영양」이 수록되어 있는 『신시집』 두 권에는 135편의 시가 들어 있다. 릴케가 이 시들을 쓴 것은 1907년과 1908년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작품들 가운데 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오르페우스에게 부치는 소네트(Die Sonette an Orpheus)』 전 55편, 『두이노 비가(Duineser Elegien)』 10편 가운데 6편을 1922년 2월 한 달 동안에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시들을 보면, 그 운율이 그렇게 유려할 수가 없다. 그에게 이러한 시들의 언어는 흐르듯이 나왔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독일어의 “Fernweh”는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는 기묘한 단어이다. 그것은 “Heimweh” —향수(鄕愁), 집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대조된다. 익숙하게 사는 집은 먼 곳 또는 먼 것의 앞에 있다. 시의 원문에서, “vor der Ferne”라고 되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림과 같은 공간을 상정하는 말이다.

집에서 나와 알게 되는 것은 사람이 사는 세계가 집보다는 광활한 것 — 또는 막막하고 허무한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그것과 타자적 관계에 있다. 그러면서 그 일부이다. 그런데 그 일부가 되는 데에 매체가 되는 것은 다른 생명체이다. 사막의 경험은 사람이 완전히 황막한 모래 평원과 무한한 하늘 — 두 무생명의 허무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은 이렇게 두 이질적 공간 속에 존재한다. 그것을 연결하는 것은 깊은 신앙심뿐이다. 미술 이론가 존 버거는 아라비아와 스페인의 회화를 설명하면서, 초목이 없는 사막의 풍경의 심리적 효과를 이렇게 설명한 일이 있다. 그런데 식물이 이것을 달라지게 한다. 그것은 먼 공간들도 완전히 타자적인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리고 나무는 크게 자랄 수 있다. 그것은 언어와 같다. 그렇다는 것은 언어로 표현됨으로써 낯선 세계의 많은 것이 인간이 이해할 수 있고, 파악할 수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어느 4월에(Aus einem April)」

숲에는 다시 향기가 부유한다.
높이 나르는 종달새들이 어깨 위로
무겁게 우리를 내리누르던 하늘을 들어올린다.
가지들 사이로 낮을 보기는 했지, 그 공허함을.
그러나 오래 오래 나리는 비의 오후 끝에
이윽고 금빛 햇빛 내리쬐는
새로운 시간이 온다.
그에 이어 먼 곳의 집들의 전면의
상처 받은 창문들이
조심스럽게 날개를 친다.

그리고는 정적(靜寂). 가늘어진 비가 내린다.
고요히. 조금씩 어두워지며 빛나는 돌 위로.
시끄러웠던 소리들이 잦아든다.
나뭇가지 위의 반짝이는 싹 안으로.

사람이 상징물 속에서 산다는 것은 그 삶이 이중의 차원에 걸쳐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상징과 현실 속에 산다는 말이고 동시에 지상과 플라톤적 이데아의 세계에 산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특이한 것은 릴케의 인간관에 있어서, 이 두 차원이 일상적 삶에 항시 출몰하고 교차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교차하는 전체가 상징물의 배경이 되고 삶의 배경이 된다. 『형상집』에는 “저녁때(Abend)”라는 제목의 시가 실려 있다. 밤과 낮의 교차가 그러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위에서도 시사한 바 있지만, 이 시는 인간의 삶이 두 개의 차원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일상적인 일로써 예시한다.

저녁은 서서히 옷을 바꾸어 입는다.
오래된 나무가 그 한 끝을 잡고 있었다.
그대는 본다. 토지들이 둘로 갈라지는 것을,
하나는 하늘을 향하고 다른 하나는 떨어지고.

그대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아,
말없는 집처럼 어둡기만 하지도 않고,
밤마다 별이 되어 오르는 어떤 것처럼,
틀림없는 영원함을 약속하지도 않고.

말로 할 수 없게 풀어주면서도 그대의
삶을 불안하게, 엄청 크게, 성숙하게 하여
경계를 지으면서, 한껏 거머쥐면서,
그대의 삶은 그대 안에서 돌이 되고 별이 된다.

그의 시는 사물에 대한 지각 그리고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감정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에 내비치는 형상의 직관에 이르고자 한다. 그러면서 그의 시는 단순한 감정의 표현으로서 끝나지 아니한다. 그것은 형상에—인간의 삶과 지각 체험에 드러나는 형상(形相)에 대한 그의 관심이 그의 작품에 정신적 기율을 부과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기율은 외면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작품의 예술적 완성감으로 구현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기율이 그의 시적 생애를 통하여 그의 작품들을 하나의 지속적인 정신적 추구가 되게 한다. 그리고 이 추구에서 그의 작품들은—물론 사물과 감정에서 시작하지만—존재론적 탐구가 되게 한다. 즉 시적 지각과 탐구로 시작하여 그의 시는 세계의 존재론적 근본에 대한 명상이 된다. 그러한 탐구가 객관적으로 물리적 세계를 연구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닌 까닭에, 그것은 다시 세계 내의 존재로서, 그리고 세계를 형상화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의 모습에 대한 명상이 된다. 이러한 탐구의 최종적인 표현이 『두이노 비가』이고 그에 대한 보충적 주석이 『오르페우스에 부치는 소네트』이다.

「제1 비가」는 시 전체의 기본 주제를 언급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제1 비가」를 조금 살펴보고, 그 후의 시들로 옮겨가기로 한다. 그 첫 부분은 다음과 같다.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는다면, 천사의 반열에서
누가 그것에 답할 것인가? 천사 하나
갑자기 가슴에 나를 당겨 안는다면,
그 강한 존재로 하여 나는 사라져버릴 것이다.
아름다움은 우리가 겨우 견디어내는
두려움의 시작일 뿐. 경이로운 것은 우리를
우습게 보아 부숴버리지 않는 것이리.
천사는 모두 두려운 존재,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 삼가고 어두워가는
흐느낌의 유혹을 참고 삼킨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쓸 것인가?
천사도 안 돼, 사람도 안 돼. 의미 있는 세계에
우리가 편하게 거주하지 않음을
영리한 동물은 눈치로 안다. 어쩌면
남는 것은 날마다 보게 되는 비탈에 선
어떤 나무, 어제의 길거리, 가지 않고 남아 있는
어떤 습관의 비틀린 충심(忠心).
아, 밤이여, 세계 공간으로 가득한
바람이 우리의 볼을 후비고, 밤은
머물지 않아—고대하던, 부드러이
실망케 하는 밤은, 고독한 가슴 앞에
지쳐 서 있다. 연인들에게는 밤은
더 가벼울 것인가? 그러나 그들은
서로에 의지하여 그들의 운명을
감추는 것일 뿐. 그대는 아직 모르는가?
그대의 팔에서 빼어내어, 공간들로
우리가 숨 쉬는 허공(虛空)을 던지라.
새들은 아마 보다 넓어진 공기를 느끼고
보다 다정히 비상하리니.

사람은 해석이 되지 않는 공간에 존재하지 못한다. 사람이 열린 공간(das Offene)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동물의 경우와 대조된다. 릴케는 이 주제를 여러 군데, 여러 시에서 생각한다. 『두이노 비가』의 8번째 시의 머리에도 이것은 길게 이야기되어 있다.

눈으로 동물은 널리 열린 공간을
본다. 우리의 눈만이 우리의 주변을
돌아본다. 그리고 자유롭게 나갈 곳에
덫으로 주변을 막아놓는다. 그 외부에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오로지
동물의 얼굴에서 짐작할 뿐이다.
어린아이도 우리는 억지로
되돌아봄을 강요하면서, 동물의
눈에 깊이 들어 있는 열림이 아니라,
모양을 이루는 모습을 뒤로부터 보게 한다.

_ 김우창, “릴케, 시로 읽는 오늘”, 열린연단, 2017.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