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상징계는 결여를 낳기에 인간은 언제나 욕망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결여가 있다는 것은 그것에서 배제되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라캉은 상징계의 구조적 우월성을 인정하면서도, 상징계가 결코 동화시키지 못하는 범주인 실재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화시킴으로써 인간의 정신적, 물질적 삶의 메커니즘을 총체적으로 해명하려고 노력한다.

149. 주체가 존재 결여 때문에 [또 다른 차원의] 욕망하는 존재가 된다고 할 때, 여기서 존재가 바로 실재에 속한다. 실재는 왜 욕망이 대타자의 욕망에 머물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 너머로 가려고 하는지, 그리고 상징계로 진입한 주체가 왜 항상 결여와 불안을 안고 사는지에 대한 라캉의 답이다.

150. 라캉은 실재계가 언제나 싱징계, 상상계와 함께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보로메오 매듭이다.

151. 실재는 상징계에 의해 현실에서 배제되는 영역이다. 언어가 사물의 살해라고 했을 때 실재는 기표에 의해 대리되면서 그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칭한다. 이것은 자연이 인간화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인간은 말을 배우면서 상징화된 세계 속에 살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접촉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상징에 의해 배척된 것은 그렇게 사라지는 게 아니라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은 상징계가 그것을 배척하지만 실재는 늘 돌아온다는 뜻이다. 라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재는 항상 같은 장소로 되돌아오게 하는 그런 것이다. 사유하는 주체, 즉 사유 실체인 코기토는 이 자리에 도달할 수 없다.”(세미나 11권,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

153~154. 실재는 현실에서 배척되고 억압되지만 언제나 그 자리로 되돌아온다. 프로이트는 억압된 것의 회귀를 무의식의 증상으로 보는데, 라캉은 실재가 상징계의 틈을 뚫고 돌아오는 것이 증상symptom이라 설명한다. 라캉은 이렇게 돌아오는 억압된 실재와 만나는 것이 바로 트라우마라고 말한다. 사실 상징계는 실재를 감당할 수 없기에 배척하면서, 기표적 질서 속에서 실재를 상징적으로 구조화하려고 한다. 하지만 억압된 실재는 늘 다시 돌아온다. 실재가 회귀하는 경험은 주체에게 언제나 낯설면서도 동시에 친숙하다.

154. 실재는 상징계에 의해 배제되는 것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실재는 적극적으로 상징화에 저항한다. 저항은 언어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은 채 상징계 너머에 지속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실재는 애초에 상징화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라캉은 상징화에 대한 실재의 저항을 “쓰이지 않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하면서 이를 불가능성이라고 말한다. 이와 반대로, 상징계의 논리는 합리적 필연성과 관계되며 “쓰기를 멈추지 않는 것”으로 정의된다. 상징계는 계속해서 실재를 현실 속에 기입하려고 하지만 불가능성의 논리에 가로막힌다. 실재는 모든 개념과 기표의 논리가 좌절되는 곳이다. 사유 주체의 대명사인 코기토가 실재에 도달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재의 논리적 불가능성과 상징계의 필연성이 대립하는 것이 인간 삶의 현실이다. 상징계가 분화ㆍ분리되는 요소들인 기표에 의해 차이의 논리를 통해 구성된다면, 실재는 충만하며 전혀 틈이 없는 영역이다. 시니피앙은 충만한 실재의 영역에 분할과 대립의 구조를 도입하는데, 시니피앙은 이를 통해서만 상징계라는 새로운 현실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156. 결여는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상징화를 거부하는 실재의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실재는 상징계보다 먼저 존재하는 절대적 영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상징계에서 결여되는 것은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라 존재라고 했는데, 존재는 바로 실재에 속하는 것이다. “존재는 상징계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본질적을 실재라고 할 수 있다.”(세미나 6권, 『욕망과 그 해석』)

157. 욕망은 결국 주체가 상실한 존재, 즉 실재에 대한 갈망이라 할 수 있다. 실재는 이처럼 언어에 대해 언제나 이질적이며 길들여지지 않는 것으로 남는다. 그러면서 상징계의 틈을 뚫고, 상징계가 결국 완전한 존재의 질서를 보장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실재는 상징화가 절대로 동화하지 못하는 영역이 우리 삶에 존재함을 일깨워준다. 라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국 시니피앙에 절대 동화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주체의 개인적 존재성이다. 왜 주체는 여기에 있는가? 그것은 어디서 왔을까? 여기에서 무엇을 하는가? 왜 주체는 사라지는가? 시니피앙은 이런 질문에 답을 줄 수 없다. 주체를 죽음의 너머에 위치시키기 때문이다.”(세미나 3권, 『정신병』)

_ 김석, 『프로이트 & 라캉』, 김영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