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마스 교수의 역설은 그가 입술 입천장이 갈라진 구순구개열, 일명 언청이로 태어났다는 데 있다. 이 병은 현대의학의 수준으로는 태어나면서 완벽하게 고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유년기에는 불가능했다. 흡사 늑대소리 같은 발음을 내는 이 병을 나치정권은 유전병으로 간주했다. 하버마스 교수는 유년 시절 여러 번 수술을 받았다. 이에 관한 기억을 2004년 일본 교토(京都)상을 받으면서 처음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자연히 나의 호기심도 커졌다. 언어장애가 소통이론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그의 학문적 성취는 타고난 실존의 조건을 극복하려는 각고의 노력이 거둔 인간적 승리가 아닐까. 그러나 그는 겸손했다. “특별히 대단한 점은 없어요.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있었고 이들과 정상적인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체험의 역할을 부정하진 않았다. “나의 포용적인 소통이론에 유년기의 심층심리가 작용했다는 해석은 사실 이탈리아에서 심리학자로 일하는 나의 아들 틸만이 이미 제안했던 것입니다.”

이 대화로 나는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의 소통이론은 강자가 대변하는 패권적 세계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반대로 약자, 소수자, 장애인 등의 동등한 참여를 옹호한다. ‘정상인’이 이끄는 주류 소통보다 훨씬 급진적으로 열린 소통, 주류에서 밀려난 타자가 자기 목소리를 내는 열린 소통을 지향한다. 그러면서도 약자에 대한 배려를 약자의 특수한 관점이 아니라 보편적 이론에 접목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한 것에 그의 진정한 학문적 고뇌와 매력이 있다고 느꼈다.

하버마스 교수는 자신의 청소년 시절 체험도 소개했다. 그는 누구나 가입했던 ‘히틀러 유겐트’(나치의 청소년 조직)의 정규 복무에 언어장애로 인해 동참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응급처치반의 하급 의무요원으로 일했다. “주말이 되면 애들이 집단으로 시내를 행진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는 그게 정말 너무 싫었어요. 나는 정규 복무를 벗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당시 14세였던 그의 업무는 같은 반의 어린 학생 몇 명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중 한 명이 두 살 아래의 한스 울리히 벨러였다. 그러나 벨러는 자주 교육에 나오지 않았다. 하버마스는 통상의 절차로서 우편엽서 크기의 미리 인쇄된 복무요청서를 1943년에 보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벨러는 이 문건을 일기장에 끼워 넣고 수십 년간 보관했던 것이다.

유명한 역사학자로 성장한 벨러는 1970년대 하버마스와 하룻밤을 지내면서 전쟁 경험을 회고하던 중 그 문건을 언급했으며 뒤에 이것을 찾아 그에게 보냈다. 다음 해에 그 문건에 관해 묻자 부인 우테 여사가 “위르겐이 이것을 삼켜버렸어요”라고 응수했을 때 모두 한바탕 웃었다. 누가 들어도 재치 있는 농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악성 루머가 번지기 시작했다. 나치체제를 비판했던 하버마스 교수가 사실은 히틀러 유겐트의 지도자였으며 나치체제의 성공을 확신하고 지지했다는 해석이었다.

이 소문은 10년, 20년을 지나면서 새로운 변종으로 부풀려졌고 독일의 언론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과 ‘디 차이트’에 사실인 양 보도됐다. 나아가 독일의 언론인 출신 역사학자 요아힘 페스트는 자서전에 마치 숨겨진 비밀을 폭로하는 것처럼 이 소문을 적었다. 우테 여사의 농담은 ‘증거 인멸’로 둔갑했다. 이에 벨러는 진상을 밝히는 공개서한을 발표했고 하버마스 교수는 소송을 제기했으며 법원은 관련 부분을 자서전에서 삭제하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사태를 종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