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던 두치케는 1967, 68년 당시 독일사회주의학생동맹(SDS)을 이끌었다. “내가 주창했던 비판이론은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모든 권위와 터부를 검증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하버마스 교수는 계급 해방을 강조한 비판이론의 전통을 자유주의에 접목하여 완전히 개방적인 비판과 계몽으로 사회를 개혁하자고 주창했다. 그리고 대학은 기술공학적 관심과 함께 비판에 내재하는 해방적 관심을 대변할 수 있다고 봤다. 이런 그의 논쟁은 1960년대 말 독일 학생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학생운동은 하버마스의 기대보다 앞서 급진화되었고 ‘위대한 거부’(마르쿠제의 표현)의 전략으로서 폭력의 정당성이 쟁점으로 제기되었다. “급진화된 운동권은 폭력의 사용을 옹호했습니다. 우리가 폭력의 수단으로 체제를 공격해야만 체제의 폭력적 본성이 드러난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이것은 잘못된 전략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리하여 하버마스 교수와 학생운동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운동권은 체제폭력과 저항폭력을 양쪽에 놓고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물었다. 침묵하는 다수는 결국 적의 손을 들어준다는 논리를 폈다. 이에 하버마스 교수는 분개하여 이런 전략은 ‘우파 파시즘’에 못지않게 나쁜 ‘좌파 파시즘’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때의 심정을 묻는 나에게 그는 “잘못된 전략을 비판했을 뿐 학생운동 자체를 배척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화가 난 학생들은 비판이론의 산실인 프랑크푸르트대 사회조사연구소까지 점령했고, 소장이었던 테오도어 아도르노 교수는 질서 유지를 위해 경찰 파견을 요청했다. 인신공격이 난무했고 아도르노 교수는 충격 속에 사망했다. “학생들은 학교 내부 문건을 공개하면서 공격했습니다. 대학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죠.” 연구소도 중대한 난관에 처했다. 연구소를 재건할 수 있는 인물은 하버마스 교수뿐이었다.

“그런데 왜 학교를 떠났습니까?” “나는 항상 학문과 정치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학문은 논쟁을 요구하지만 정치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요구합니다. 당시 대학은 너무도 정치화되었고 나는 그 한복판에 서게 되었어요. 동료들이 그런 눈으로 나를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나를 이끌어준 은인 아도르노 교수의 죽음 앞에 나는 정말 망연자실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조치를 취했습니까?” “나는 강단을 떠나는 입장을 밝히는 공개서한을 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3명의 자녀를 키워야 할 아내가 며칠만 더 생각해보자고 청했습니다. 그때 이것을 발표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도 아쉽습니다.” 그때 독일의 저명한 물리학자인 카를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 박사가 17세 아래인 하버마스 교수에게 슈테른베르크의 막스플랑크연구소 공동소장직을 제안했다. “그의 제안은 강단을 떠나기로 결정하기 전에 왔습니까, 아니면 후에 왔습니까?” 그의 대답은 솔직했다. “전에 왔죠. 그것이 없었다면 나도 가정을 꾸려야 하는데 훨씬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많은 혜택이 보장된 정교수직을 버리고 1971년 시골로 내려가 1년간은 혼자 지내며 현재 거주하는 집을 짓느라 바빴다고 했다. 당시 뮌헨 올림픽 공사가 한창이어서 목수를 구하기도 힘들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그곳에서 1983년까지 연구소의 공동소장으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