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식구들이 집을 옮기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오히려 완전한 절망감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친척들이나 지인들 가운데 그 누구도 당해보지 않은 그런 불행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세상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바를 그들은 최대한 이행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말단 은행직원들에게 아침을 날라다주었고, 어머니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속옷을 바느질하느라 온 힘을 다 쏟았으며, 여동생은 고객들의 요구에 따라 판매대 뒤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식구들에겐 더이상 여력이 없었다. 아버지를 침대로 데려다놓고 다시 자리로 돌아온 어머니와 여동생이 하던 일을 놓아둔 채 볼과 볼이 맞닿을 정도로 바싹 다가앉을 때, 그러다 어머니가 그레고르의 방을 가리키며 “그레테야, 저기 문 좀 닫고 오거라” 하고 말할 때, 그래서 그레고르가 다시 어둠 속에 있게 될 때면, 등짝의 상처가 새로 생긴 것인 양 욱신욱신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 시간, 거실에서는 두 여자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눈물을 흘리거나, 눈물조차 말라서 식탁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_ 프란츠 카프카, 이재황(역), <변신>, 문학동네,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