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게 말하자. 발견이 없는 시. 생명력이 없다. 발견이 없는 시. 그것은 사산이다. 태어나자마자 죽는 시. 아니, 아예 죽어서 나오는 시.
좋은 시란 무엇인가.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 좋은 시는 무엇 때문에 좋은 시인가. 이 간단치 않은 질문 / 자문 앞에다 나는 세 가지 시약이 든 병을 꺼내 놓고는 한다. 고백과 묘사, 그리고 발견이라는 시약병 셋.
시를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혐의를 받을 수도 있지만, 이 세 시약은 시를 평가할 때 제법 능력을 발휘한다. 한 편의 시, 한 권의 시집뿐만이 아니라 한 시인의 전체 시 세계까지 이 세 가지 시약으로 분석 / 해석할 수 있다, 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모든 시는 이 세 가지 시약의 합성, 즉 이 셋의 화학이다.
고백은 정직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정직할수록 고백은 아프다. 고백은 (원)죄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묘사는 운명적으로 대상에 종속한다. 그러나 대상과 하나(혹은 분리)되려고 하면 할수록 묘사는 차가워진다. 그리하여 고백의 끝, 누추할 때가 많다. 묘사의 끝, 묘사하려는 대상 앞에서 무릎 꿇을 때가 많다.
고백과 묘사의 정점은 아픔의 미학이다. 나는 아프다, 나는 이렇게/ 이토록/ 다른 아픔과 다르게 아프다, 라고 말하는 시들. 그러니 아픔의 미학, 아직 미성년이다. 아프다, 라는 말(고백)을 버리고 이렇게(묘사)에만 머물 수 있다. 그러나 묘사,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인간과 세계에 대하여 간섭하지 못한다. 생래적으로, 궁극적으로 묘사는 가치를 배제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발견이다. 문제는 발견이다. 발견을 외면하는 고백, 발견을 생산하지 못하는 묘사, 에너지가 없다.
고백과 묘사가 발견을 만날 때, 고백은 고백대로, 묘사는 묘사대로 자기 형태와 생명을 획득한다. 그리고 이때, 발견은 고백과 묘사라는 구체적인 몸을 얻는다. 고백, 묘사, 발견이 이루어 내는 단단하고 환한 구조물 – 트라이앵글.
고백이 내부 / 과거를 향한 들여다보기라면, 묘사는 타자 / 현재에 대한 집중이다. 고백이 윤리라면 묘사는 과학이다. 그러나 아직, 고백과 묘사는 완성체가 아니다. 고백과 묘사가 발견을 지향할 때, 그때부터 진화가 진행된다. 발견과 한 몸을 이루려는 그 길 에서 한 방을, 한 줌, 마침내 한 문장의 발견이 태어난다. 시간과 공간의 전부를 품어 안는 발견. 전체를 가리키는 하나. 하나 속에 들어앉은 전체.
이 발견 앞에서 인간과 세계는 아프다. 매우 낯익은 것들이 돌연, 낯설어진다. 나는 내가 아니고, 너는 네가 아니고, 나무는 나무가 아니고,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돌연한, 기쁜 아픔. 이 기쁜 아픔을 제공하는 시만이 공간과 시간을 견뎌 낸다. 시의 자궁은 고백과 묘사, 그리고 발견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_ 류시화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에서 이문재, “<소금인형>에서 <소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