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영화는 결국 그 영화가 만들어진 역사 안에서, 그 역사에 대해서, 그 역사를 향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철학자 들뢰즈는 단언적으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어떤 영화도 자기가 만들어진 대지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영화가 던져진 역사로부터 벗어나고, 자기가 만들어진 땅을 떠날 때, 그 영화들의 대부분 치매에 걸리게 된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는 내내 화면과 이야기에만 매달리게 된다. 자기를 영화 마니아라고 소개하는 분이 아는 게 영화밖에 없을 때 그분에게 영화를 설명하기는 매우 힘들어진다. 이건 경험적인 이야기이다.
95. ‘영화가 현실을 피해 가려 할 때 결국에 그건 파시즘을 미학적으로 다룬다’는 결론을 내린 벤야민의 글에 (영화에 대한) 내 믿음을 걸었다. 나는 영화주의자지만(그 어디에도 없는 말!), 그 영화가 세상과 어떻게 어우러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내 생각을 이끌고 있는 이름은 바로 발터 벤야민이다(다시 더 거슬러 올라가 19세기 ‘이전’의 위대한 거장들은 지지해야 할 사상이 아니라 가져야 할 교양이다). 벤야민이 쓴 짧은 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영화에 관한 가장 좋은 글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글은 항상 오해받는다. 이 글의 핵심은 ‘그러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영화의 본래 자리’에 대한 철학적 사유이다. 나는 이 글이 프리츠 랑의 <엠>(M, 1931) 주변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다가오는 나치즘. 독일 영화의 위기. 레니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1935). 이 글의 세 번째 판본은 1936년에 수정되었다. 그리고 벤야민이 이 ‘유명한’ 영화를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그 글 속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시간의 토픽을 절단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그러해야 할 영화’와 ‘그렇게 되어 버린 영화’, 바로 그 사이에서 나는 영화의 정치성에 대해서 사고한다.
233~234. 나는 백지수표에 대한 몇 가지 재미있는 명단을 갖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1995년 로카르노영화제가 장 뤽 고다르의 <영화사(들)>를 상영하면서 그에게 위임한 백지수표 명단이다. (중략) 이 명단은 1995년에 제출되었고, 고다르는 영화가 자기 시대의 근심을 잊는 것은 영화의 윤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 명단의 영화를 모두 보았다(별로 찾아보기 어려운 영화는 없다). 어떤 영화가 있고 없는 것은 그 사람의 취향이다. 나는 그가 오즈를 뽑지 않았다고 해서 서운하지 않다. 오히려 이 명단 전체에서 가장 내 심금을 울린 것은 바로 그 마지막 영화이다. 영화는 하여튼 세상의 기록이다(알랭 레네의 영화 제목의 변주). 그 기록이 황홀한 예술인 것으로 만족한다면 우리는 파시즘에 굴복하는 것이다(벤야민의 충고). 그러므로 우리는 영화에서 윤리라는 문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고다르 명단의 교훈이다.
257~260. 쇼트를 나누는 순간 세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는 액션을 맞추어야만 한다. 그 다음은 시선의 상상선이 문제가 된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기술적 문제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맞출 수는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세 번째이다. 심리적인 지속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에 있다. 이것은 영화의 가장 불편한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해서 성공적으로 대답한 영화를 보지 못했다. 이 지속을 성공시킨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건 누가 해도 안 된다. 이미 그 순간 지속을 놓쳤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배우조차 카메라와 조명이 이동하고, 세트를 다시 뜯어내는 과정에서 그걸 유지시킬 방법이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감독들은 대부분 이 문제와 마주하는 순간을 필사적으로 피한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도록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테면 존 포드. 문제는 그 순간과 어쩔 수 없이 마주할 때 결국에는 롱테이크로 찍을 수밖에 없느냐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허우샤오시엔이 나를 탄식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어쩔 수 없다면 차라리 그 순간 만을 남겨 놓은 다음 모두 롱테이크로 찍어서 통일성의 리듬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허우샤오시엔에게서 보아야 할 것은 롱테이크가 아니라 그것이 롱테이크일 수밖에 없게 남은 순간들의 필연성이다. 그런데 오즈는 그 순간과 마주한 다음에도 결국 쇼트를 나눈다. 그것은 거의 결단이라고 불러야만 한다. 확실히 부엌에서의 그 장면은 백번을 질문해도 롱테이크로 찍는 것이 최선이(라도 생각한)다. 그러나 오즈는 나눈다. 변화를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오즈의 후기 영화에 롱테이크에 가까운 긴 쇼트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것이 오즈의 휴머니즘이라고 생각한다. 이 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부 사이의 관계 변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이 대목이 거의 마지막인데도 불구하고 이 씬의 이전과 이후가 있을 뿐이다. 오즈는 그 대사를 따라가면서 차곡차곡 쇼트를 쌓아 올린다. 그게 무서운 것은 쇼트를 나누면 한 인물과 다른 인물을 번갈아 보여 주면서 진행할 수밖에 없는데, 오즈는 대사를 따라가면서 만일 그 대사에 대한 반응을 보아야 한다면 남편을 미디엄 쇼트로 잡은 다음 바로 바스트 쇼트로 더 들어간다. 사실 한 인물을 연이어 사이즈를 달리 잡으면서 쇼트를 진행시키는 것은 학교에서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교과서적인 금기 중의 하나이다.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할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순간 컷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진행이 중단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즈는 그것을 더블 액션으로 기묘하게 연결시켜서 그냥 남편을 보여 주고야 만다. 그래서 그것이 한 쇼트의 확대와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말하자면 쇼트로는 더 큰 클로즈업에 지나지 않는데도 보는 쪽에서는 마치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본 것 같은 착시. 단 한순간의 결정이지만 이 대목은 테마이기 때문에 필사적인 쇼트(를 일단 먼저) 나누기와 (그런 다음 그 쇼트와 다른 쇼트를 붙여 보고 다시 원래의 인물로 돌아올지, 아니면 바로 이어 붙여야 할지를 고민한 끝에 결심한) 붙이기일 것이다. 오즈는 이 결정을 하면서 결국 영화로 인간의 내면을 그려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영화에는 오직 상황과 대사 그리고 액션만이 있는 것이다. 카메라라는 표면만을 보여 줄 수밖에 없는 저 기계적인 재현의 시스템 안에서 영화는 만들어져야만 한다. 그것도 아주 불편한 과정을 통해서만 만들어진다. 영화는 수없이 안 되는 것들의 규칙들이 넘쳐나는, 참으로 부조리한 세계이다. 그 안에서 그 불편함을 적극적을 받아들이면서 오즈는 세상을 살아가는 질서의 깨달음을 얻어 간다. 그러니까 영화를 본다는 것은 결국 그 선택을 보는 것이다. 그 영화에 대해서 테마를 이야기하고, 줄거리를 설명하고, 지금 막 본 영화의 명장면에 대해서 수없이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것은 사실 그 선택의 착시 효과를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즈는 거기서 극단의 결단을 내린 사람이다. 오즈의 영화적 형식이 갖는 그 기기묘묘함, 그 안에서 하여튼 살아가야 하는 인물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삶의 일상이 가라앉듯이 조용하고 슬프게 자리 잡기 시작한다. 오즈는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이야기를 가장 기괴한 영화 형식을 통해서 담아낸 사람이다. 나는 오즈 야스지로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저절로 한숨이 먼저 나온다. 그는 영화에서 하나의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사람이다. 만일 당신이 영화를 사랑하면서도 오즈가 없는 목록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마치 세잔이 없는 회화의 역사를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즈는 세상이라는 인상을 그저 그렇게 물끄러미, 하지만 도저히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없는 자리에서 그렇게 바라본 영화를 만든 셈이다. 나는 오즈의 54편의 영화가 정말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목록 중의 하나라고 믿는다.
300~302. 에릭 로메르와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 울었다면 그건 거짓말이거나, 아니면 영화를 크게 잘못 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두 사람은 연애의 슬픈 감정이라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최면에 걸린 그 낭만적 사랑의 자리에 가서 보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의 관심은 이 사랑에서 누가 주인인가에 있다. 말하자면 주인의 자리를 놓고 다투는 이 경쟁에서 그들은 서로 유혹의 대상에 이끌린다. 그러나 그 대상은 상대가 내놓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설정해 놓은 것이다. 이것이 사랑에서의 최면의 이유다. 상대가 사랑스러울수록 그것은 자기가 스스로에게 걸어 놓은 최면의 나르시시즘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드는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 사랑의 계략에 빠져들어 무아지경으로 끌려들어 가는 동안 에릭 로메르와 홍상수는 그걸 바라보는 자리에 가서 지켜본다. 그것은 그들의 결단이다. 하지만 왜 그런 결단을 내린 것일까? 그들은 결코 사랑이 숭고한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자기의 환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대상을 놓고 자기 자신과 벌이는 내기이다. 여기까지가 그 둘 사이의 공통점이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에릭 로메르는 그 대상에 다가가려는 마지막 순간 그 실패를 맞이한다. 그것은 때로 그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한정 없이 그 순간을 미루는 것이기도 하고, 때로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그 어떤 순간으로 인해 미루어진다. 반대로 홍상수는 언제나 그 대상을 그만 지나쳐 버린다. 그러므로 그는 대상과의 관계를 망쳐 버린다. 여기서 그 둘 사이는 전혀 다른 자리로 가는 것이다. 에릭 로메르는 그것을 미룸으로써 낭만적 사랑의 자리에 윤리적 사랑의 질문을 가져온다(당신은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도덕적 사랑이라고 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에릭 로메르의 주인공들은 종종 칸트적인 질문을 던진다. 여기서 사랑은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초자아의 실재와 마주 대면해야 한다. 그들은 그러기 위해서 욕망의 대상을 목표로 하면서도 그것을 미룸으로써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기에는 일종의 역전이 존재한다. 이제 자기를 대상으로 놓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보는 사람에게서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홍상수는 연애의 욕망이 목표로 하는 대상을 지나쳐 감으로써 결국 불안과 마주해야만 한다. 그것은 사실상 실재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나 연애의 실재는 다가가면 갈수록 거기서 자기가 연출해 낸 최면의 효과만을 보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진실인 척했던 거짓과 대면해야 한다. 그러나 그 대상에 정확하게 가 닿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는 돌아서서 대상을 보는 또 다른 덫에 걸려들 수밖에 없다. 그것은 거짓을 벗어나기 위해서 다른 거짓을 끌어들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서 보는 것은 지지대를 빼앗긴 환상이다. … 사랑이란 주관적 착각이라고 비웃은 홍상수가 걸려드는 것은 객관적 착각이다.
418. 정치의 계절. 그때 나는 (자본주의-파시즘적인) 주술을 깨야 한다는 (정치적) 주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영화를 본다는 행위보다 이론적 학습이 우위에 있었으며, 예술과 정치 사이의 수상쩍은 구별을 놓고 그 간극을 채울 수 있는 영화를 간절하게 찾았다. 그 자리에 앙겔로풀로스가 정확하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 나는 말하자면, 테제들과 상황을 우회해서 앙겔로풀로스를 (완전히 내 방식으로 의도적으로, 주관적으로 오해를 해서) 받아들였다. 그 간극을 채우지 않았다면 나에게는 영화인가 정치인가, 라는 양자택일만이 남았을 것이다. 나는 이 계절을 건너갈 사다리가 필요했다.
422. 당신에게만 하는 말. 앙겔로풀로스는 오픈 토크를 기다리다가 불현듯 내게 물었다. “지금 한국 정부는 정치적으로 왼쪽입니까, 오른쪽입니까? 유럽의 우파 신문들은 좌파 정부라고 부르고, 좌파 신문들은 미국에게 조종받는 자유주의자 정부라고 합니다. 어느 쪽이 진실입니까?”
422~423.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시대는 영화가 이미지에 포위당하고, 점점 더 야만적인 이미지들, 이를테면 게임이나 뮤직비디오처럼 사유하지 않는 이미지들에 의해 영화가 죽어 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영화에서 예술을 향해서 싸우고 있는 당신에게 영화의 미래는 어떤 것입니까?” 앙겔로풀로스는 매우 길게 답변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인상적인 말로 마무리를 했다. “결국 영화는 하나의 기록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그것을 포기한다면 더 이상 우리 시대의 인간에 대한 시선의 기억은 말소되고 말 것입니다. 시선을 거둘 때,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보지 않겠다는 시대를 맞이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화를 만드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너를 볼 때, 이미 너는 내 안에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말입니다.”
427~428. 아버지는 슬프지만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남겨진 것들은 딸이 이제 채우지 않아 텅 빈 주전자처럼 슬프게 저기 놓여 있고, 없던 자리에 새로운 것들은 어느새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선다. 그 사이에 마치 시간은 멈춘 것처럼 하늘은 항상 맑고, 그래서 기후의 변화가 거의 없는 오즈의 영화는 그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오즈에게서는 (1959년의 <부초>를 예외로 하면) 구로사와 아키라처럼 비가 몰아치거나 안개가 쏟아져 내리거나, 눈이 내리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구로사와가 세상을 뒤흔들어 보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탄식하는 동안, 오즈는 그 세상을 멈추어 보려고 그렇게 조용히 앉아 있어도 결국 시간은 그 주위의 모든 것을 바꾸고 있음을 슬프게 인정하고야 만다.
429. 동일한 쇼트가 다시 되돌아온다. 오즈는 같은 자리에서, 같은 구도로, 같은 장면을 계속해서 찍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같은 장면 안에서 결국에는 없는 것을 본다. 이제 할아버지 곁에 더 이상 할머니는 없다. 아버지 곁에 딸은 더 이상 눕지 않는다. 참으로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오즈의 영화에서 계절은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즈는 이 모든 것을 순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_ 정성일+정우열,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바다출판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