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 선배는 나를 처음 야구장에 데려가준 사람이었다. 홍대 인디 문화가 뭔지, 대학로 소극장의 서늘함이 얼마나 기분 좋은 건지 알려준 사람. … 나는 지금껏 선배처럼 이상적인 남자를 본 적이 없다. 존경도 하고, 말벗도 하고, 괜찮다면 잠도 같이 자고 싶은 사람. 혹 요사스런 성적 취미가 있다 해도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복종이 좋아요’라고 말하며 눈 딱 감고 따라가보고 싶은 그런 상대 말이다. 당시 나는 사내들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세상엔 두 종류의 남자가 있는데, 착하고 재미없는 남자와 재밌지만 나쁜 남자가 전부라는 생각이었다. 세계가 그렇게 납작하게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건 나중에 알았지만. 사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닌 인간의 복잡함과 울퉁불퉁함을 잘 헤아릴 줄 아는 남자라는 것 역시 뒤늦게 깨달았지만.

12~14. 교정의 초목과 잘 식은 봄밤 공기는 가슴을 떨리게 하기 충분했다. 지금도 나는 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라는 식물의 방어 물질에 사랑의 묘약이 섞여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신학기의 그 많은 청춘이 그렇게 동시에 상기된 채 헤롱댈 수는 없는 일이다. … 나는 스무 살을 새로운 도시에 맞는 게 좋았다. 철학과 사람들의 눈빛과 말투, 안색에도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나이엔 의당 그래야 하는 듯 알 수 없는 우울에 싸여 있었고, 내 우울이 마음에 들었으며, 심지어는 누군가 그걸 알아차려주길 바랐다. 환영식 날, 잔디밭에 모인 무리에서 슬쩍 빠져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거기 없다는 걸 통해, 내가 거기 있단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 나는 모임에서 이탈한 주제에 집에 기어들어 가지 않고 인문대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스스로 응석을 부리며 뭔가 흉내 내는 기분이 못마땅했지만. 숨은 그림 찾아내듯 누군가 나를 발견하고, 내 이마에 크고 시원한 동그라미를 그려주길 바랐다. … 아마, 그래서였을 거다. 훗날 누군가 내게 사랑이 무어냐고 물어왔을 때, ‘나의 부재를 알아주는 사람’이라 답한 것은.

15. 그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줄 때면, 뭉클하니 아늑해져 까치발을 든 채 ‘더요! 더요!’라고 외치고 싶어지곤 했다.

17~18. 티브이도 없고 컴퓨터도 없는 음습한 자취방에서 이따금 확인하는 선배의 문자가 참 반가웠던 기억은 난다. 한밤중 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조그만 불빛을 따라 내 마음도 빨갛게 깜빡거렸다는 것과, 그 나이에만 쓸 수 있는 순수하고 유치한 문장들에 내가 퍽 의지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선배는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줬다. 쉽게 판단하거나 충고하지 않았고, 범박하고 산뜻한 농담도 잘 해줬다. 상대에게 수치심을 주지 않으면서 위로하는 방법을 알았다랄까. … 그 시절, 나는 어딘가 아프고 피곤하면 무턱대고 긴 잠을 자는 버릇이 있었다. 어느 때는 기면증 환자처럼 이틀 내내 곯아떨어져 있기도 했다. 그날 역시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선배가 선물해준 ‘어떤 날’을 카세트에 넣고 틀었다. 뒷면에 건전가요가 들어 있는 오래된 테이프였다. 방 안 가득 「오후만 있던 일요일」이 잔잔하게 퍼졌다. 그러자 문득 선배에게 말을 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19. “야구장은 신전이야.” 나는 ‘아!’하고 감탄했다. 그건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반하는 순간 심장에서 울리는 효과음이었다.

19~22. 하지만 선배가 진심으로 좋아진 계기는 따로 있었다. 선배가 나를 알아봤듯 나도 선배를 알아본 순간이었다. 선배가 4학년, 내가 2학년이던 여름밤. 전국적으로 유례없는 열대야가 지속되던 때. … “신기해요.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 곡을 제게 처음 알려준 사람이 생각나요. 그것도 번번이요. 처음 가본 길, 처음 읽은 책도 마찬가지고요. 세상에 그런 게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떠올라요. ‘이름을 알려준 사람의 이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건 사물에 영원히 달라붙어버리는 것 같아요.” 나는 ‘아니, 내가 이렇게 멋있는 말을 하다니!’하고 혼자 감탄했다. 하지만 선배의 쪽지는 더 근사했다. “우리가 신을 잊을 수 없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거야.”

23~24. 모니터 위로 느릿느릿 사람들 모습이 지나갔다. 선배와 나는 친근한 얼굴이 보일 때마다 품평을 하고 낄낄댔다. 그러다 내 사진이 나왔다. 벚꽃을 배경으로 학교 옥상에서 찍은 독사진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친구가 맞은편 건물 안에서 셔터를 눌러, 창문 주위의 네모난 어둠이 액자처럼 봄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봄 한가운데에 내가 있었다. “이 사진 좋다.” 선배가 ‘일시 정지’ 단추를 눌러 슬라이드 쇼 상태에서 자동으로 넘어가는 사진을 멈추게 했다. “난 싫은데.” “왜?” “이 가방 때문에요. 옷이랑 너무 안 어울리잖아요. 다리도 굵게 나오고.” 나는 황토색 인조가죽 가방을 가리키며 투덜댔다. 당시 내게 하나밖에 없던 가방이라 아무 옷에나 줄기차게 들고 다닌 거였다. “난 저 가방 때문에 이 사진이 좋은데.” 선배가 모니터를 응시하며 말했다. “에? 왜요?” 선배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 여자의 ‘생활’이 보여서.” “……” 나는 푸른 불빛에 얼비친 그의 옆얼굴을 가만 바라봤다. 그리고 이제부터 이 사람을 본격적으로 좋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세상에 내 사진을 보고 그렇게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은 선배밖에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44. 아직 상복을 벗지 못한 채 울고 있는 나를, 여름옷을 주렁주렁 매단 2단 옷걸이가 무심히 그리고 오랫동안 굽어보고 있었다.

144. 도시 곳곳에는 한쪽 손을 번쩍 들어 택시를 잡은 뒤, 술에 취해 아름답고 어그러진 말들을 차비처럼 내려놓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173. 기옥 씨는 커튼을 걷고 방 안을 환기시켰다. 골목에서 한 노인이 오토바이 뒤 칸에 쓰레기봉투를 싣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곧이어 음식물 종량제 쓰레기봉투에서 새어나온 구정물 냄새가 청량한 새벽 공기를 타고 기옥 씨네 집까지 들어왔다. 간밤, 잠을 설친 도시가 찌뿌둥한 얼굴로 기지개를 켜며 내는 구취였다.

297.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298. 그 일로 원래부터 여유가 없었던 우리 집은 더이상 복구가 안 될 정도로 폭삭 주저앉고 말았어요. 집안에 닥친 불운의 자장이 너무 강해, 잘못 하다간 나까지 빨려들어 갈 것 같아 돕고 싶기보단 도망치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였죠.

_ 김애란, <비행운>(너의 여름은 어떠니, 하루의 축, 서른), 문학과지성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