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5. 1755년 만성절(그리스도교의 모든 성인을 기념하는 날)에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지진이 일어난 후 볼테르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가능한 최고의 세상’에 대한 믿음을 버렸다.

52. 프레드릭 뷰크너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은 설명하지 않으시고 대신 감정을 폭발시키신다. 그분은 욥에게 ‘너는 네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기나 하는 거냐?’라고 물으신다.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욥이 궁금해하는 문제들에 대해 설명하려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대합조개에게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그분의 큰 계획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다만 그분 자신을 드러내실 뿐이다.”

78. 한 여성이 어머니의 장례식을 도둑맞았다고 분노하며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장례식 직후에 선교사 몇 사람이 내게 다가와 미소를 지으며 ‘장례 예배 중에 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면 자매님의 어머니의 죽음은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말했어요.”

91~92. 스레브레니차에서 세르비아인들은 열다섯 살 이상의 남자 8천 명을 체포해 손을 등 뒤로 묶은 채 사살했다. … 헤이그에 있는 국제형사재판소에서 나온 목격자들의 증언 기록을 읽으면 너무 끔찍해 더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임신부들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 장총의 개머리판으로 내리치고, 어린 여자아이들을 집단으로 성폭행하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의 머리를 잘라 엄마의 무릎에 놓는 등의 만행이 실려있다.

92~94. 본래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는 공통점이 없는 세 그룹을 강제적으로 연합한 나라였다. 가톨릭 신자들이 주류를 이루는 크로아티아는 서유럽과 가까웠고,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들은 동쪽에 있는 러시아와 통했고, 보스니아 무슬림은 다른 무슬림 나라들의 지원을 기대했다. 공산주의 붕괴 후에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될 때 강력한 세르비아 족은 ‘대(大) 세르비아’를 표방하며 팽창주의를 추구했고, 소수 민족들은 그에 대항했다. 크로아티아인들이 제일 먼저 저항한 그룹 중 하나였다. 자체적으로 군대가 없는 그들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쓰던 탱크 몇 대와 농약 살포용 비행기 몇 대가 전부였다. 그들이 임기응변으로 생각해낸 것이 농약 살포용 비행기에서 프로판가스통과 온수기를 세르비아 군대에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국제사회가 무기 금수조치를 취하자 그들은 감옥살이하던 조폭들에게 돈을 가득 실은 트럭을 주면서 무기 암시장에서 무기를 사오라고 시켰다. 그 조폭들 중 일부는 무기 밀매에 성공한 대가로 훗날 정부의 고위직에 오르기도 했다. 유고슬라비아 군대의 대부분을 접수한 세르비아 군인들은 1991년부터 1995년까지 사라예보를 포위한 채 공격을 퍼부었다. 그 도시는 숲이 울창한 산들로 둘러싸인 좁고 긴 땅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적의 포위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천혜의 지형을 갖고 있었다. 세르비아 군대가 도시를 에워싸고 있던 그 야만적인 4년은 현대사에서 최장의 포위 공격 기간으로 기록되었다. 날마다 평균 329개의 로켓 추진식 수류탄과 포탄과 박격포탄이 비 오듯 쏟아졌다. 어떤 날은 이보다 열 배에 달하는 공격이 이어졌다. 세르비아의 소총수들은 마치 연못에서 노는 오리를 사냥하듯 손쉽게 목표물을 조준할 수 있었다. 부상자를 돌보던 의료진, 일곱 살짜리 무슬림 소녀, 그리고 일흔이 넘는 할머니가 그들의 표적이 되었다. 4년 동안 적어도 1만1천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 1,600명은 어린아이들이었다. 공동묘지에 더 이상 자리가 없자 매장 관계자들은 1984년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축구장을 시체 매립지로 사용했다. 이런 일들이 현대 유럽에서 일어났다. 그토록 잔혹한 일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곳이 바로 유럽 아닌가! 하지만 실제로 일어났다. 전기와 난방과 가스와 전화 서비스가 다 끊긴 한 도시가 쉴 새 없이 포탄 세례를 받는 일이 1443일 동안이나 일어났다. 물을 얻을 수 있는 주요 수원(水源)은 양조장 주인이 인심 좋게 개방한 양조장의 깊은 샘이었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총격을 가할 수 있는 세르비아 저격수들에게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한 사람만이 그 샘에 이를 수 있었다. 심지어 지금도 사라예보의 대부분의 건물에는 총알과 포탄 파편 자국들이 남아 있다. 박격포 일제사격에 의해 22명이 죽은 골목과 40명이 목숨을 잃은 보행자전용도로와 70명이 사망한 근처 식료품 시장 등 민간인이 희생된 장소들에는 추념(追念) 동판이 붙어 있다. 나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의 수도원에 머물렀는데 지금은 보수된 그 수도원에도 42발이 명중했다고 한다. 잔학 행위를 가장 많이 저지른 것은 세르비아이지만 모든 종족들이 범죄를 저질렀고, 그들의 지도자들이 전범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결국 전쟁은 1999년에 끝났다. 나토(NATO)의 폭격과 빌 클린턴의 평화조약이 전쟁 종식에 부분적으로 기여했다. 결국 유고슬라비아는 일곱 개의 다른 나라로 나뉘었고, 그들 중 세르비아가 가장 큰 영토를 차지했다.

105. “당신은 나를 쏘지 못할 것이오. 오히려 내게 커피 한 잔을 대접할 것이오.”

114. 앗수르와 바벨론 다음에 페르시아가 쳐들어왔고, 페르시아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패배했다. 알렉산더가 죽자 일련의 후계자들은 그의 영토를 분할했는데, 그들 중 가장 악명 높은 것이 안티오코스 4세(에피파네스, B.C. 175~163 재위)이었다. … 다른 곳에서의 군사적 패배에 좌절한 안티오코스는 유대 종교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다. 하나님의 성전을 제우스 숭배의 중심지로 바꾸고 자신을 ‘육체로 임한 신’이라고 선포했다. 남자 아이들을 상대로 ‘역(逆) 할례’ 수술을 강제로 시행했고, 고령의 제사장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채찍질하여 죽였다. 그의 가장 악독한 행위 중 하나는 지성소의 제단에 부정한 돼지를 희생제물로 바치고, 그 피를 성소 주변에 바른 것이다. 안티오코스의 만행에 격노한 유대인들이 무장봉기를 했다. 마카베오 가문이 주도한 그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이 유대인의 명절 봉헌절(하누카)이다. 하지만 그들의 승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안 가 로마의 군대가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와 반란을 진압하고, 헤롯을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했다. 로마에게 정복당한 후 그 땅의 전체가 폐허로 변했다.

132. 이십 년 후 그는 이미 언급한 책(<하나님 앞에서 울다 A Grace Disguised>)의 후속편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뜻 A Grace Revealed>를 썼다.

133. 고통이 속량되어도 상처는 남는다.

143. 고통의 제거가 아니라 고통의 속량이다.

165~166. 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권운동가이자 성공회 주교인 데스몬드 투투가 … 진실화해위원회의 책임자가 되었을 때 그는 자기의 신학이 큰 시험대에 오를 거라고 생각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중략) 남아공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네덜란드개혁교회가 만들어 낸 공식적 정책이었다.

170. 뉴타운에서 나는 ‘고통의 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Where is God when it hurts?)라는 익숙한 질문을 살짝 바꾸어 ‘고통의 시간에 무신이 어디에 있는가?’(Where is no-God when it hurts?)라고 물었다.

172~173. 영국의 계관 시인인 알프레드 로드 테니슨은 젊은 친구의 죽음을 본 후 “사랑해본 적이 전혀 없는 것보다 사랑했다가 그 사랑의 대상을 잃는 게 더 낫다”라고 말했다.

177. 슬픔은 사랑과 고통이 만나는 지점이다.

178.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그의 책 에서 “우리가 역사 속에서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배웠지만 두 가지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의 난제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나는 우리 마음속의 ‘악’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이다”라고 말했다.

189. 찰스 채풋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악함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 이 순간부터 다르게 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192~193. 나는 뉴타운 사람들에게 독일의 작가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시 한 편을 읽어주었다. 이 사람은 성홍열(세균성 인후염)로 두 자녀를 잃은 후 슬픔이 찾아올 때 428편의 시를 썼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그의 시 다섯 편에 곡을 붙여 ‘아이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들’을 만들었다. 그것들 중 하나는 “마치 밤 사이에 슬픈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이제 태양은 밝게 솟아오르려고 한다”라고 시작된다.

199. 죽음의 죽음!

212. 우리가 과거를 돌아볼 때 성 금요일은 우리에게 ‘속량 못할 고통은 없다’라고 말해준다.

214. 목회자이자 신학자로서 나치 정권에 저항했다는 죄목으로 강제수용소에 갇히는 고난을 당한 본회퍼는 이렇게 썼다. (중략) “나는 우리의 실수와 실패조차 헛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실수와 실패를 다루시는 것이 우리의 가장(假裝)된 선행을 다루시는 것보다 더 힘들지 않다고 나는 믿는다.”

_ 필립 얀시, <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 규장,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