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패러디해 보자.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국민은 (시장에서) 다른 국민보다 더 평등하다”. 영국의 사상가 R.H 토니는 “큰 물고기의 자유는 작은 물고기에게는 죽음”이라 했다. 국민 사이의 권력 불균형과 시장 참여자들 사이의 권력 불균형을 시정하지 않는다면 자율적 통제란 강자의 통제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국가론이 신자유주의적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그는 자신은 작은 정부론을 주장하지 않으며, 시장 자율을 중시하지만 국가의 사회정책적 역할도 중시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국가가 시장에서 패배한 사람들에게 안전망과 보호막 역할을 해야 하며, 낙수효과에 기초한 성장우선 정책이 변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신자유주의와 미국, 영국, 유럽 등에서 현실로 구현된 형태의 신자유주의가 다르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다. 후자의 기준을 적용하면 김병준의 국가론은 충분히 신자유주의적이라 할만하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역할을 변형시켰을 뿐 축소한 적이 없다. 사회안전망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서 필수적인 정책이며, 낙수효과 경제학에 대한 반성은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국가들에 널리 퍼졌다.

김병준은 실패를 낳는 시장의 구조는 그대로 두고 대신 시장의 실패자들을 사회정책으로 따뜻하게 보듬는 ‘어머니 같은 정부’를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표현부터 잘못된 것이다. 어느 어머니도 (심지어 아버지도) 애초에 아이들이 다칠 수 있는 위험한 곳에서 놀게 두지 않기 때문이다. … 물론 김병준은 자신이 구조의 측면을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변할지 모른다. 적어도 그는 대기업 문제와 관련한 국가의 보충적인 역할 중 하나로 공정거래 또는 공정경쟁의 확립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는 더 큰 구조적 문제인 경제력 집중과 재벌 지배구조에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 회사의 투자자나 채권자가 결정할 문제라는 것이다. 이는 공정거래, 경제력 집중, 지배구조가 마치 별개의 문제들인 것처럼 보는 위험한 견해다. 이들은 분명히 서로 관련되어 있다.

자유는 역설적으로 자유가 제한될 때만 보장될 수 있다. 예를 들면 국가의 사법제도(법률, 치안 등)에는 금지하는 것들 투성이다. 그럼에도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안심하고 자유롭게 거리를 다닐 수 있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특정한 권리에 대한 제8한 그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그러한 규제가 얼마나 민주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으며 공공의 목적과 필요에 부합하는가, 그리고 자유를 누구에게 어떻게 얼마나 늘릴 수 있는가이다.

김병준의 국가론은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가 파탄 난 후 현재의 기득권 보수정당이 채택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선택지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그것의 운명은 순탄치 못할 것이다. 그 자기모순적이고도 신자유주의적인 국가론은 결코 대한민국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김병준의 엉성한 문제제기에 대응하여 이제 민주 진보진영은 국가가 왜 시장에 개입해야 하고, 어떻게 불평등과 분배, 고용과 복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자신의 명료한 이론과 전략을 제시하고 능력을 검증 받아야 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