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99. 몇 줄 뒤에서 워즈워스는 자신을 “신 및 자연과 의사소통하는” 사람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그의 사유를 스피노자의 사유로 만들기 위해서 ‘및’을 ‘혹은’으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세계를 과학에서 참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도 참이 되는 다른 관점이란 없다고 본다면, 우리는 자연 법칙에서 자유롭게 되거나 혹은 인과성의 연쇄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우리가 자유롭다면, 오래된 종교에서 선포했던 또 다르면서도 보다 고양된 의미에서의 자유여야 한다. 자유는 하나의 관점 혹은 필연적인 체계를 고려하는 하나의 방식에 있을 뿐이다. 우리 모두는 사유하는 순간에 이것이 의미하는 것에 친숙하지 않은가? 물리적 실재의 일부로서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우리가 있다는 것과 화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이다. 이런 화해 작업이야말로 진정한 종교이며, 우리를 우리 자신과 우리 존재의 기원인 신에게 귀속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세계를 영원의 관점으로 보도록 힘써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스피노자는 옳다고 할 수 있겠다. 인과성의 배후에서 전체의 의미와 패턴을 보는 그런 사유가 아니라면, 인과성의 연쇄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따라서 화가가 한 경치의 형식을 이끌어낼 때 경치가 변하고, 음들이 음악 작품으로 결합될 때 음들이 변화되듯이, 우리가 이런 패턴을 발견할 때, 사물들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이때 일종의 인격성이 사물들의 구조 도처에서 빛을 발한다. 우리는 신의 창조작업이라는 사실 속에서 신에 가깝게 된다.

104~105. 이 책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은 철저하게 ‘세계를 영원의 관점으로 보는 철학’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런 해석은 ‘세계를 시간적 관점으로 보는 철학’과 스피노자의 철학을 갈등관계에 있게 하며, 결국 시간적 관점에서 파악되는 모든 존재(무한양태, 개별자, 상상)의 의의를 스피노자의 체계에서 배제시킬 위험이 있다. 또한 세계를 보는 시간적 관점이 이처럼 부정적으로만 해석된다면, <에티카>와 이후의 정치저작 속에서 등장하는 국가구성에서의 상상의 적극적 역할은 스피노자 철학 내에서 상당히 해명하기 어렵게 된다.

_ 로저 스크러튼, 조현진 옮김, <스피노자>, 궁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