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는 언어의 진부함과 돌연함에 기대고 있다. 시 언어의 유동성과 변덕성은 현실이라는 무정형의 덩어리를 한 순간에 부수어 놓는 가능성으로서 존재한다. 시 언어의 덧없음과 부질없음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어쩌면 존재할지도 모르는 ‘덧있음’과 ‘부질있음’을 모색하게 한다.

2. 시는 빈번히 비현실적이라거나 불온하다는 험구를 감내해야 한다. 시의 불온성과 비현실성은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다. 입과 항문이 동일한 하등생물에서와 마찬가지로, 시의 불온성과 비현실성은 세속의 순응주의와 현실주의의 전도된 모습일 뿐 그 내용이 다른 것은 아니다.

3. 피상적인 시는 시에 대한 부정이며 모독이다. 시를 쓰고 읽는 이유는 우리 삶을 칭칭 감고 있는 피상성의 굴레에서 한 순간이라도 벗어나고자 하는 데 있다. 근본적으로 벗어남이 불가능할지라도, 거듭해서 벗어남을 시도하는 것은 그 이외에 다른 진실과 아름다움, 올바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실과 아름다음, 올바름은 오직 ‘불가능’으로만 존재한다.

4. 시란 말을 엮어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통해 시 쓰는 사람은 자기가 누구이며 자기 삶이 어떤 식으로 얽혀 있는지 알게 된다. 그 앎이 충격적일수록 시가 일으키는 효과 또한 크다. 한 편의 시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이상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억지로 말을 엮어야 할 이유가 없다. 좋은 시는 읽는 사람 자신의 삶을 한 순간 불가능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5. 시인의 통렬한 자기 반성에 의해 태어난 시는 결국 독자의 통렬한 자기 반성을 초래할 것이다. 은폐된 삶의 실상을 파헤치는 시 정신의 집중과 긴장은 짧고 덧없는 시가 오랜 예술 양식의 하나로 존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덧없고 사소한 우리의 삶은 시에 의해 구제받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견디고 살아낼 만한 것이 된다.

6. 시의 생명은 경직된 관념과의 싸움에 의해 확보된다. 문제는 그 싸움이 매순간 언어라는 사각의 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좋은 시는 독자로 하여금 삶의 새로운 발견에 동참하게 된다. 그 새로움은 인위적으로 가공된 것이 아니라, 문화와 체제에 의해 은폐된 삶의 본래 면목일 뿐이다. 좋은 시는 제대로 이행된 ‘숨은 그림 찾기’이다.

7. 흔히 문학의 정수라 하는 시의 위의는 의미 있는 세부를 통한 현실의 복원과, 일상성 속에 내재하는 기괴함의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시는 더 이상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삶이 궁지에 몰려 내지르는 외마디 소리이다. 좋은 시는 그 부르짖음에 의해, 읽는 자신의 삶을 한 순간에 무너뜨린다.

8. 삶에 대한 열정이 곧 시가 되는 것은 아니나, 삶에 대한 열정에서 태어나지 않는 시는 없다. 문장이 서툴거나 비유가 식상하다는 것은 그리 큰 흠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시 쓰는 사람이 도무지 자기 삶과 갈등이 없다는 데 있다. 시는 갈등을 먹고 소화하고 배설하는 과정으로 지속된다.

9. 시의 의의는 평범함 가운데 깃들인 비범함을 발견하게 해주는 데 있다. 그 발견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그 구체성은 내면 감정의 발로가 아니라 외부 현상의 발견에 의해 획득된다 시는 당구로 치면 ‘쓰리 쿠션’이고 바둑으로 치면 ‘성동격서(聲東擊西)’이다. 요컨대 시의 언어는 항상 ‘간접적’으로 제시된다.

10. 시를 읽는 것은 읽는 사람 자신의 삶을 읽는 것이다. 시는 우리가 미처 짐작치 못한 진실에 눈 뜨게 해준다. 우리 삶은 미세한 실핏줄들로 얽혀 있다. 나날의 습관과 고정관념에 가려 보이지 않는 그 실핏줄들은 끊임없이 삶에 영양을 공급하고 노폐물을 실어 나른다. 시를 쓰는 것은 바로 그 미세한 혈관들의 지도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11. 시는 현실의 삶에 근사하면서도, 나름의 일관성을 갖춘 정신의 지도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지도가 언어로 그려진다는 점에 있다. 흔히 생각하듯 좋은 글은 좋은 아이디어에 의해 쓰이는 것이 아니다. 시는 아이디어로 표현되거나 요약될 수 없으며, 근본적으로는 아이디어 또한 언어에 의해 구성된다. 언어라는 전달 도구는 그것이 전달하는 아이디어를 변형하고 왜곡한다.

12. 언어는 결코 투명한 유리 그릇 같은 것이 아니다. 언어는 삶과 마찬가지로 불순하다. 언어는 항시 삶에 오염되며, 삶을 오염시킨다. 시 쓰기는 오염된 쓰기이며, 시 쓰기를 통해 만들어지는 삶의 지도 또한 오염된 지도라 할 수 있다. 언어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곧 오염된 삶에 대한 관심과 주의력이라 할 수 있다.

13. 시는 구체에서 추상으로, 감각에서 깊이로, 평범에서 비범으로, 가벼움에서 무거움으로, 사소함에서 소중함으로 나아가며, 그 반대 방향은 당연히 비시적이다. 시는 총알이 뚫고 나간 시체나 바늘구멍 상자처럼 들어오는 길은 비좁아도 나가는 방향은 놀랍도록 넓다. 시의 언어는 큰 수레바퀴를 돌리는 작은 톱니바퀴나, 육중한 것을 들어 올리는 지렛대와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

14. 시는 존재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말장난이다. 시는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배설하는 것과 같이 일상을 거스르며, 그에 의해 가리어진 삶의 속살이 드러난다. 시 쓰기의 기술은 요들송이나 복화술처럼 오랜 훈련을 통해 터득된다. 시는 ‘자기 부상 열차’와 같아서 일단 언어 위로 떠오르지 않으면 속도가 나지 않는다. 혹은 시는 ‘잠수함’처럼 언어 바로 밑에서 움직이는 것이어서, 결코 자기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15. 오늘날 우리 삶에서 시는 노후한 수도관에서처럼 유실되고 있다. 그러나 정말 위험스러운 것은 시라는 모세혈관이 터져 버림으로써 정신의 수족마비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선인의 말처럼, 시를 모르면 높은 담장 앞에 마주서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16. 예술의 여러 장르 가운데 시만큼 몸으로 때웠느냐, 아니냐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도 없다. 단적으로 말해 시는 몸이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이다. 울음 가운데는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마른 울음도 있듯이, 끙끙 앓는 소리에도 건성 입만 뻥긋거리는 신음소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 몸이 앓는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는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17. 시만큼 칼같이 정확한 예술도 없다. 시는 몸으로 살아낸 만큼 쓸 수 있는 것이니, 덤도 에누리도 기대할 수 없다. 시는 머리의 방어막을 뚫고 나오려는 몸이 발버둥치는 소리이다. 그 소리는 고통으로 인해 반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게거품처럼 번져 났다가 사라진다. 그 번져남과 사라짐 사이에 길고 짧은 시간이 개재하며, 그 시간들의 반복되는 장단이 불가항력의 음악을 만들어낸다.

18. 시에서는 착안이 절반이다. 여럿이 달라붙어도 꿈쩍 않는 피아노를 인부 혼자서 번쩍 들어 올리듯이, 시인은 대상의 의미를 단번에 낚아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숨겨진 급소와 보이지 않는 손잡이를 찾아내 대상을 뒤집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기술은 이미 정신이다. 달리 말해 시 정신은 대상을 뒤집으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뒤집는다.

19. 시라는 칼은 손잡이까지 칼날이다.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에게 시가 위험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시라는 칼의 독기와 살기가 가장 먼저 닿는 곳은 당연히 그 칼을 쥐고 있는 손이다. 먼저 스스로 찔리지 않고서는 시라는 칼로 다른 사람을 찌를 수 없다. 아름다움이란 무엇보다 스스로를 겨냥한 독기와 살기이다.

20. 시 쓰는 이 자신의 삶이 담보되지 않은 시는 잔고가 없는 채 발행되는 수표와 마찬가지이다. 그에 반해 가장 아름다운 시는 전 재산을 걸고 떼어주는 백지 수표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누가 감히 그렇게 무모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아무도 발 딛으려 하지 않는 조악하고 추잡한 삶의 늪이야말로 시가 자라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라는 점이다.

21. 사람의 지옥은 시의 낙원이다. 단적으로 말해 시 쓰는 사람은 필히 더럽고 불편한 삶의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티끌 먼지도 없는 높은 산 언덕에서 연꽃을 찾을 수는 없다. 시라는 연꽃은 온갖 퇴적물이 부패하고 발효되는 진흙 수렁에서만 무성하게 피어난다. 본래 깨끗하고 예쁜 것을 지금 깨끗하고 예쁘다 해서야 무슨 대수일까. 지금 추하고 흉한 것이 본래 귀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면, 시는 무엇인가?

22. 좋은 시의 요체는 비시적인 혹은 반시적인 일상사의 급소를 급습해서 매몰된 진실과 아름다움을 구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뒤집히는 것은 다름 아닌 시 쓰는 이 자신의 삶이다. 그렇다고 해서 늘 진지하고 심각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때로는 유희나 유머보다 더 엄숙하고 비극적인 것은 없다. 시인은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의 선원들처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절망적인 연주를 계속해야 한다.

_ 이성복, 『현대시』 2014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