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이도 읽는 이도 자신이 ‘아는 것’ 속에 시를 가둬놓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 그게 사건이든 풍경이든 아니면 삶 자체든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붙들려 우리는 시를 쓰고 또 읽는 것 아닌가. 그러니 시의 매혹에 대해서라면 의미로 치환되는 명징한 논거보다는 ‘그저 드러날 뿐이며 그로써 신비를 갖는다’(비트겐슈타인)는 말이 좀더 유효할 것이다. 어떤 순간의 감정이나 예감이 끝내 말해질 수 없는 채로 드러나는 것.

대개 각각의 층위들이 논리적으로 튼튼하게 연결된 시들일수록 시인의 의도가 깊게 관여하여 언어적 질감을 해치곤 한다. 아무런 필연성도 찾을 수 없다면 당연히 좋은 시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어떤 필연성도 찾을 수 없지만 각각의 층위가 알 수 없는 연관 속에 배치되고 있다고 느껴지는 시가 있다. 경험의 실감보다는 감각적 배치를 통해 세계를 구축하는 것.

여전히 내가 아는 곳에 세계가 있다고 믿으며 단일하게 그것을 포착하려는 시선에 대해서는 안타까울 뿐이다.

_ 신용목의 글을 읽으며, “초점 없는 혼합주의”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