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시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묻기에 대답을 구하다가, 시는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인 것 같다고 말했다. 꼭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시를 쓸 수 있는 거냐고 다시 묻기에 지나치게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었다고 풀어 설명하고 좀 후회했다.

25. 왜 사람은 누군가를 안는 구조로 생겨서 타인을 갈망하게 되는 걸까?

27. 나는 울 때 제일 아름다운데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 애인들은 내가 우는 걸 구경도 못 하고 떠났다.

35. 나에게 창작은 그냥 도서관 가는 일이다.

36. “너 문학사에 이름 남기고 싶냐?”

37. 행위는 반복되는데 행위자는 다르다.

40. 흡연구역과 나는 서로에게 교회 같은 곳이다. 불행할 때만 찾아가는 곳.

48. 슬픔의 용도에는 관심이 가지 않는다. 슬픔은 오롯이 슬픔이기만 하면 좋겠다.

49. “내가 너무 충분해서 당분간은 내가 아닐 필요가 있다.”

52~53. 이윽고 내가 시를 쓰는 이유가 궁금증을 사들이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다다랐다. 궁금증이 내 성감대라서 그렇다. 누군가 궁금하다는 건 그 사람을 쳐다본다는 건데 사랑이 식은 사람은 모두 옆모습을 하기 마련이고, 옆모습의 뜻은 되돌릴 수 없음이다. 한번 식은 궁금증을 소생시키는 방법을 나는 모른다. 사랑을 박탈당한 사람, 타인의 궁금증을 수혈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역으로 무기징역의 궁금증을 선고받아 지나간 모든 것이 궁금해지고 “왜?” “왜!” “도대체 왜?” “왜 갑자기 떠나버린 거야!”를 연발하며 이불을 차게 된다. 그러다 시력이 심각하게 좋아져 지나간 것들을 너무 자세히 보게 되고 선물로 받은 얼룩말 인형의 줄무늬 개수까지 기억하기에 이른다. 궁금증 때문에 두더지처럼 땅을 파고 들어가 지난 연애의 역사를 모조리 다시 쓰고 낱낱이 되짚어보고도 해소되지 않는 ‘왜’들 때문에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잃으러》를 열 권 정도 쓰게 되거나 애도의 일기를 스물다섯 권 쓰다가 결국 필력이 좋아져서 등단을 하고 작가가 되어 이윽고 책을 내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57. “애인에게 내 시를 객관적으로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일의 망령됨”

69. 팔레트에는 검은색 물감을 잘 짜지 않는다. 검은색은 만들어 써야 좋기 때문이다. 검은색 물감을 쓰면 그임이 무서워진다고 그림 선생님이 그랬다. 대신, 다른 색을 섞어서 검은색을 만들면 그림이 어두워진다고. ‘무서운 거랑 어두운 거는 다른 거구나.’

70. “포옹이 절실한 순간에 포옹이 존재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쓰인 소설”

84~86. “‘괴다’는 옛날 말인데 사랑한다는 뜻이야”라고 말하니, “사랑할 때는 턱을 괴서 그런 거예요?”라고 과외학생이 되물었다. 과외학생이 나보다 사랑을 더 잘 아는 것 같다. 과외학생이 사랑에 빠졌는지 어느 날 내게 물었다. “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요?” “음, 그게 헷갈리면 그 사람한테 선물을 하나 달라고 해봐.” “왜요?” “선물을 받았을 때 고마움을 느끼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거고, 미안함을 느끼면 별로 안 사랑하는 거야.” (중략) 과외학생은 훗날 내 친구가 된 인력거다.

89. 춤을 출 때는 상대방을 어항이 든 택배상자라고 생각하세요. 상대방을 사람이라 생각하기 시작하면 춤이 어려워집니다. 어항 속 물과 금붕어에 집중하세요. 수평으로 전진하고 후퇴하는 겁니다. 물이 넘치지 않도록 유의합시다. 다 같이. 사랑을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이 나의 무능인지도 모른다.

113. 우리는 영혼도 재질이 같았던 것이다. 우리는 새벽 맥도날드에서 실실거리며 정신과 여의사 선생님에게 감사해했다. 가끔 우리는 운명의 궤도, 그러니까 망하는 시점과 방향과 각도가 일치해서 우리야말로 평행 우주가 아니냐고 서로에게 따진다. 그럴 때마다 손가락으로 주방가위 모양을 만들어 우리 둘 사이를 잊는 보이지 않는 끈을 싹둑 자르는 의식을 치른다. 한 놈이라도 살아야 하기 때문에.

115. 정신과 약을 먹은 후로 우리는 뭐든 훌륭한 것을 보면 “산도스설트랄린정적이야”라고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116. “사랑에 빠지면 나는 나를 걱정해.”

129~130. 물메기와 나는 베이커리로 들어갔다. 얼그레이 잼이 있었다. 언제 한번 맛보고는 베이커리에 갈 때마다 찾았는데 번번이 찾지 못한 것이다. 얼그레이 잼 덕분에 문득 행복했다. 너무 오랜만에 찾아오셔서 행복인지 못 알아뵀다. 그래서 악수를 하려고 했는데 웬일인지 내 악수를 받아주셨다. 그래서 악수를 한 김에 내 오른손과 행복의 왼손을 수갑으로 채웠다. 같이 걸었다. 그런데 어느덧 혼자 걷고 있었다. 행복은 손목이 너무 가늘어 수갑이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141~142. 죽어야겠다는 말은 수없이 해도 자살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딱 한 번 있는데, 그때 나를 살린 건 정신과 약이었다. 너무 신기한 경험이었기 때문에 정신과 약만의 힘은 아니고 신이 약간의 양념을 쳤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녔다. 내 친구들은 모두 기독교인인데 이것 때문에 자꾸 신이 신경 쓰인다. 신은 나를 보고 있는데 나는 눈을 피하기 때문이다. 불행을 너무 많이 겪는 건 신이 부른다는 소리이고, 선택받은 거라고 누가 말했다. 당신에게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불행하게 만드는 신의 큰 그림이라고. 신이 불행을 인질로 사기극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신이 나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 – 내가 사랑하는 인간들이 다 기독교인이라서, 죽어서 걔네랑 같은 곳에 가려면 나도 신을 믿어야 한다는 신의 큰 뜻 – 은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는데, 나는 선뜻 종교를 갖지 못한다. 내 친구들이 신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서 심각하게 불행하기 때문이다.

159. 애인은 오징어회는 안되고 오징어튀김은 가능하다는 모순에 손님에게 이실직고했다(오징어회는 산 오징어를 잡아서 쓰고, 오징어튀김은 냉동 오징어를 쓴다).

173. 왜 사람들이 웃을 때 나는 웃지 못할까? 생각해보면, 세상이 웃는 방식으로 내가 웃었다면, 애초에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 미소 짓지 않는 방식으로 내가 미소지었으므로 시를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문학은 결국 깊이깊이 무언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인데, 내가 무언가를 너무 깊게 이해할수록 우물 밖의 세상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정말 개구리가 되어버린 거야.

178. 추억이 자꾸 등에 올라탔다.

179. 나에게 시는 너무 솔직해지지 않는 연습.

181.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보드게임인 딕싯도 있었다. 딕싯은 이야기를 만드는 게임이다. 돌아가며 스토리텔러를 맡아 이야기를 만든다. 이야기에 걸맞은 카드를 내고 섞은 다음 스토리텔러의 카드를 찾는 식이다. 스토리텔러는 이야기를 적당히 어렵게, 적당히 쉽게 내야 한다. 아무도 맞히지 못하거나 모두가 맞히면 스토리텔러가 되레 점수를 읽기 때문이다. 보편성과 특수성을 고루 갖추어야 이길 수 있는 게임이다. 극단적인 예술가는 게임에서 지게 돼 있다.

189. 시 한 편 원고료가 평균 3만 원

200~201. 등단하면서 받은 상금은 주식투자로 날렸다.

207. 긴급재난 문자였다. 타인의 휴대폰이 울릴 때 내 휴대폰도 함께 울려서 소속감이 느껴졌다. 누군가 나를 빼먹지 않았다는 게 신났다. 나도 포함된 것이다. 나는 왕따가 아닌 것이다.

209~210. 아침에는 전화영어를 한다. (중략) 아침부터 말이 잘 안 나오는 경험을 하면 겸손해진다. “Why do you like studying English(당신은 왜 영어를 공부합니까)?” “It helps me hesitate. I want to learn how to hesitate(내가 주저하도록 도와줍니다. 나는 망설임을 연습합니다).”

231. 완벽한 암실에 3일 이상 있으면 눈이 먼다고 한다.

231. 웃고 또 웃었다. 사력을 다해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나는 불안하면 웃기 때문이다.

242. 끝, 하고 발음하면 / 자연히 웃는 입 모양을 하게 된다

_ 문보영,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 쌤앤파커스,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