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너먼은 1934년 3월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인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부모는 원래 프랑스 파리에 거주했으나 친척을 만나러 간 이스라엘에서 아들을 낳고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카너먼은 여섯 살 때인 1940년 파리를 점령한 나치 독일군에 쫓겨 숨어 살았다. 유년시절에 겪은 끔찍한 공포는 카너먼에게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일찌감치 버리게 만들었다. 카너먼은 2003년 나치 점령 기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1940년대 초 파리에 살던 유대인은 모두 ‘다윗의 별’ 표시를 해야 했고 저녁 6시 이후에는 집 밖에 나설 수 없었다. 어느 날 친구들이랑 놀다가 6시 통금시간을 어기고 말았다. 골목길을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데 거리엔 아무도 없었다. 그때 한 독일 병사가 내게 다가왔다. 그는 다짜고짜 나를 포옹했다. 내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릴까봐 너무 무서웠다. 그런데 군인은 지갑을 열어 그의 아들인 듯한 소년의 사진을 보여주고는 돈까지 쥐여줬다. 집에 와서 기묘한 느낌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인간은 언제나 너무나 복잡하고 흥미로운 존재’라고 한 어머니의 말씀이 맞다고 확신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헤브루대학에 진학한 카너먼은 심리학과 수학을 전공했다. 1954년 졸업 후 입대해 장교로 활동하다 1958년 미국 유학을 선택한다. 6년 만인 1964년 버클리 캘리포니아주립대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지만 미국 대학에서 바로 자리를 잡지는 못한다. 유창하지 않은 영어가 발목을 잡았다. 그는 모교인 헤브루대를 거쳐 1978년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교수로 부임했다. 전망이론의 공저자인 아모스 트버스키 교수 또한 헤브루대 출신인 데다 이스라엘군 복무 경험이 있어 둘은 잘 통했다. 1970년대엔 혁신적이었던, 심리학과 경제학을 접목하려는 시도 또한 궁합이 잘 맞는 학문적 동료를 만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하지만 트버스키 교수는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으로 1996년 59세로 사망하는 바람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