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들과 함께 <갈릴레이의 생애>를 읽었을 때,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갈릴레이의 자아비판이 잘 공감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갈릴레이의 선택을 아예 긍정하는 입장을 보인 것이다. 아무도 그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없으며 살아서 연구를 완성시킨 그의 선택이 옳았다는 식이다. 물론 갈릴레이가 죽음을 선택했어야 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분명하게 자아비판을 하고 있는데도, 그 굴복이 현명한 선택이었다며 전혀 자아비판을 할 필요가 없다는 이 이해심은 어디서 온 걸까? 사실 여기에는 일종의 기시감이 있다.

10여년 전에 등장한 뉴라이트의 역사관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흔히 ‘친일 미화’라고 표현되듯이 그들은 ‘친일파’(특히 자본가)의 행위를 현명한 선택으로 만들었다. 그런 뉴라이트의 주장에 대해서는 당연히 수많은 비판이 쏟아졌지만, 문제는 그들을 친일파 옹호자로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그들의 논리가 받아들여지는 토양을 바꿀 순 없다는 데 있다.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날이 굴복을 강요당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친일파는 결코 먼 존재가 아니다. 여기서 도덕적인 친일파 단죄는 겉돌기만 한다. 차라리 그런 선택을 긍정해주는 말은 위안이라도 되는데 말이다.

문제는 굴복이라는 행위 자체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굴복이나 패배를 당했다는 것을 직시하고 있는 한, 승부는 끝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저항을 만들어내는 기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강요당한 굴복을 합리화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진정한 패배가 다가온다. 어떻게 보면 패배의식이란 패배를 외면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계속 패배하고 있는 한 승부는 끝나지 않는다. 승부는 패배를 그만둔 순간에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