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임 만 9년 만인 지난 7월 7일, BNPB 공보센터장 수토포가 폐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49세.

인도네시아 재해 공보관은 아시아ㆍ태평양 지역을 비롯한 전세계 언론을 상대해야 하는 자리다. 재난 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알린다는 것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신속하면 정확하기 힘들고, 공식 정보가 디디면 거짓들이 생겨나 소문으로 번진다. 재해의 공포와 혼란 상황에서 괴담은 또 하나의 재해이고, 선정성은 언론의 위험한 본능 중 하나다. 이래저래 국가기관은 신뢰를 잃기 십상이다. 그뿐 아니다. 부실한 재해 대비와 더딘 수습 상황에서는 책임을 따져야 할 일이 잦다. 그건 진실의 영역이지만 동시에 정치의 영역, 선택의 영역이다. 조직을 위해선 예산 기관의 심기를 헤아려야 하고, 보신 출세를 하려면 인사권자의 눈치도 살펴야 한다. 진실은 그렇게 곧잘 덮이고 휘어진다. 수토포가 맡은 게 그런 일이었다. 그가 한사코 마다했던 건, 어쩌면 자신이 없어서였다. 신속 정확은 개인의 역량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었고, 당시 인도네시아 재해 공보 시스템은 빈말로라도 좋은 말 해주기 힘든 지경이었다. 시종 정직하고 정의로울 자신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에겐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이 있었다.

‘팍 토포(Pak Topo, 토포 선생님 또는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더 널리 불린 수토포는 1969년 10월 7일 자바 중부 보욜라이(Boyalali)란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사였고, 어머니는 주부였다. 우기에 집에 기어든 흰개미를 볶아먹어야 했을 만큼 가난했던 탓에 초등학교를 맨발로 다녀 급우들의 놀림과 따돌림을 당했다고 그는, 발병 직전인 2017년 12월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어려서 손금을 봤는데 커서 성공할 거라고 했다고, 영리하진 않지만 워낙 성실해서 아둔함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하더라고도 했다. 그는 “돌이켜 보면 그 말이 옳았다”고, “남들은 한 번 보고 마는 책을 나는 세 번씩 봐야 간신히 이해하곤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93년 족자카르타의 국립 가자마다(Gadjah Mada)대학을 우등 졸업했고, 졸업식장에서 인사 나눈 법학과 우등졸업생 레트노 우타미 율리아닝시(Retno Utami Yulianingsih)와 결혼해 아들 둘을 낳았다. 교수나 연구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는 그는 37번 도전 끝에 94년 10월 ‘응용기술평가원(BPPT)’이란 곳에 취직했다. 그 직장을 다니며 명문 국립대인 보고르(Bogor) 농업대학에 진학, 2010년 수자원ㆍ환경 관련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