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분명히 진화 개념과 상충하지 않는다는 점은 보수적인 기독교 신학자들이 지적했으며, 그 시점은 1871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프린스턴의 유명한 신학자인 찰스 핫지는 식물과 동물의 설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신이 그것들을 만들었다면, 설계의 문제에 관한 한 신이 그것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단번에 만들었는지 아니면 진화 과정을 거쳐서 만들었는지는 전혀 문제가 안 된다.”

20~21. 기독교적인 믿음과 상충하는 것은 바로 진화와 다윈주의가 유도되지 않았다unguided는 주장이다. (나는 여기서 ‘유도되지 않았다’는 표현이 ‘계획되지 않았고 의도되지 않았다’는 의미도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23. 2차 세계 대전 후에 생물학의 대가로서 명성을 떨친 마이어Ernest Mayr에 따르면, “유전자 변이나 변종이 무작위적이라는 말은 새 유전자형의 생성과 주어진 환경에서 필요한 유기체의 적응 사이에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버Elliot Sober는 이 논점을 다음과 같이 좀 더 조심스럽게 표현한다. “어느 변이가 이로울지를 감지하고서 그런 변이가 발생하도록 만드는 물리적인 메커니즘은 (유기체의 내부에도 외부에도) 없다.” 요컨대 한 유기체에서 생기는 변이가 무작위적이기 위해서는 그 유기체나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중 어느 것도 적응을 위한 변이를 일으킬 메커니즘이나 과정, 또는 기관을 포함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25. 진화론이 자연주의와 묶여질 때에는 신의 설계를 부정하게 되지만, 진화론 자체만으로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자연주의와 결합된 진화론적인 과학만이 신적 설계의 부정을 함축할 뿐이다.

27. 1859년 이전에는 “이토록 무수히 다양한 생명체들이 신에 의해 창조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것들이 이 세상에 생겨났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번듯한 답변이 존재하지 않았다.

33~34. 내가 선호하는 답변은 “오, 복된 죄여! O Felix Culpa”라는 답변이다. “오 복된 죄여!”라는 개념은 신약성서 로마서에 나오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5:20)라는 구절에 근거해 있다. 기독교에서는 죄가 징벌의 대상으로서 부정적인 성격을 갖지만, 역설적이게도 선의 구원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되게끔 만드는 긍정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 이 개념에 함축되어 있다. 인간에게 죄가 없다면 구원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는 신이 베푸는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통로가 된다. 그래서 죄가 복되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복된 죄’라는 표현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관점을 악의 문제에 적용시키면, 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위협하는 데에 악의 존재를 끌어들이기 어렵게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인간의 죄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악은 인간이 신의 은총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오 복된 죄여!’에 근거해서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안은 일종의 ‘필요악’ 개념을 발전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44.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준(準)종교”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는다.

45. 내가 전개하고자 하는 논증의 핵심적인 전제들은 다음과 같다. N을 자연주의, E를 현대 진화론, R을 “우리의 인지 기능은 신뢰할 만하다”라는 명제를 나타내는 기호라고 하자.
1) P(R/N&E)는, 즉 N과 E를 전제했을 때 R이 참이 될 확률은 낮다.
2) N&E를 받아들이고 전제 1)이 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R을 논파(반박)하는 근거defeater를 갖는다.
3) 이 논파 근거 자체가 논파될 수는 없다.
4) R에 대한 논파 근거를 갖는 사람은 N&E를 포함해서, 자신의 인지 기능에 의해 산출됐다고 볼 수 있는 모든 믿음에 대한 논파 근거를 갖는다.
5) 그러므로 N&E는 자기 논파적이며,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50~51. 이제 환원적 유물론(RM, Reductive Materialism)만 남았다. P(R/N&E&RM)의 값은 어떻게 될까? 이 이론에서는 어떠어떠한 (믿음) 내용을 가짐이라는 속성은 모종의 물리적인 속성, 아마도 신경적인 속성과 동일하다고 본다. 앞에서 예로 든 외계 생물체가 갖는 특정 믿음 B를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는 ‘믿음 B를 갖는 것’을 적응된 것이되 그것이 갖는 다른 물리적 속성들뿐만 아니라 그 내용 덕택에 적응된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다시금 B와 관련된 내용의 진위 여부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믿음 내용의 진위 여부가 문제되지 않는다고 보게 되는 이유는, 환원적 유물론에서는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으로 환원되는 위상을 가질 뿐이기 때문이다. 즉 유물론자들은 믿음의 신경생리학적 속성만이 인과적인 효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 과정에서 적응력을 인정받는 것은 믿음의 신경생리학적 속성뿐이다. 이것은 곧 심적 속성으로서의 믿음 내용은 진화 과정에서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화론이 자연주의 및 유물론과 결합되면 심적 속성으로서의 믿음 내용은 진화 과정에서 있으나 마나 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런데 우리의 인지 기능에서는 심적 속성인 믿음 내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자연주의 및 유물론과 결합된 진화론은 우리의 인지 기능의 신빙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음으로써 자연주의와 결합된 진화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인지 기능의 신빙성을 부정하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인지 기능이 신뢰할 만한 수준이 못 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없다. 이것은 자연주의적 진화론자들이 자기가 자기를 부정하는 오류에 빠져 있음을 의미한다.

69~70. 베히의 저서가 도착했을 때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책은 진지한 과학서가 아니라 의도적인 누락과 그릇된 설명으로 가득 찬 부정직한 선전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4월에 노트르담대학에 가서 베히의 주장들을 단호하면서도 공정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다뤘고 그의 논변들이 확고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상반되는 증거와 논변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온갖 흔적들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노트르담대학의 그 모임에서 우리의 비판에 대해 쓸 만한 반격은 별로 나오지 않았다. 헤이그와 나(데닛)는 우리의 의무를 수행했다고 생각했다. 그 후 플랜팅거도 베히의 첫 번째 저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보증을 서지 않았는데, 이제는 베히의 두 번째 저서에 대해 문외한적인 찬사를 보내고 있다. 내가 지금 역정을 내고 있는 게 아니다. 나는 할 만큼 했다.

86. 베히에 관해서는, 그의 노트르담대학 방문에 대한 내 기억이 데닛의 기억과는 아주 다르다고 말하는 정도로 끝내겠다. 정말 매우 다르다. 내가 보기에 베히가 협잡꾼으로 판명되기는커녕 별다른 오류가 발견되지도 않았다. 그는 데닛과 그의 동료에 대응해서 자신의 입장을 아주 잘 고수했다고 생각된다.

98~99. 플랜팅거는 베히를 진지하게 고려해줘야 한다는 자신의 의견에 동의할 평판 좋은 생물학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112.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주의Flying Spaghetti Monsterism는 창조론에 근거한 지적 설계론에 대한 패러디다. 지적 설계론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고 감지되지 않는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보는 종교도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112. 러셀의 중국 찻주전자China teapot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태양계에서 지구와 화성 사이의 궤도를 따라 도는 중국 찻주전자가 있다고 어떤 사람이 주장한다고 가정하자. 만약 이 사람이 자신의 이런 주장이 틀렸다고 입증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의 생각을 터무니없다고 볼 것이다. 이것은 곧 증명의 부담은 과학적으로 반증될 수 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그것을 틀렸다고 입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중국 찻주전자는 신의 존재에 관한 논쟁에서 무신론자들이 신을 가리키는 데에 즐겨 사용된다. 즉 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유신론자는 위에서 말한 중국 찻주전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같은 논리를 편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반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신의 존재에 대한 주장을 틀렸다고 입증하지 못한다고 해서 유신론자들이 이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때 러셀의 중국 찻주전자 이야기가 인용될 수 있다.

116. 한때 도킨스는 진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때때로 개인적인 불신감에 의존해서 주장을 펼친다고 불평했다. 그들은 자기네가 좀처럼 진화론을 믿기가 어려우므로 진화론이 거짓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데닛과 그의 동조자들은 유신론에 대해서도 같은 종류의 개인적 불신감에 근거한 반론을 펼친다. 자기네가 보기에 유신론은 믿을 수 없고, 공상적이고, 불합리하고, 조소와 냉소를 받아도 싸다는 등의 비난을 퍼붓는다. 이때 그들은 대체적으로 그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117. 정말 믿기 어려운 것은, 생태계의 경이로운 일들이 유도되지 않은 진화에 의해 생겨났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런 주장을 믿으면서도 유신론자들의 인식적인 월권 혐의에 대해 독선적인 인식적 혐오감을 드러내는 사람들은 마치 자기는 성매매 포주이면서도 이웃에 있는 극장에서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를 상영했다면서 분재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143~144. 베히처럼 플랜팅거에게도 (유전과 문화적 진화에 의해서) 좀처럼 진화할 수 없었을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이 무엇인지를 보여달라고 요청해보자.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자기가 상상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곧 불가능함을 입증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베히처럼 플랜팅거도 깨닫게 될 것이다. … 왜냐하면 이런 잠정적으로 “환원불가능하게 복잡한” 특징들이 실제로 어떻게(언제, 왜) 진화했는지에 관한 증거가 도처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_ 앨빈 플랜팅거ㆍ대니얼 C. 데닛, <과학과 종교, 양립할 수 있는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4.